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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41화 (441/1,064)

441화

와아아아!

날이 밝음과 동시에 다시 전투가 시작됐다. 넘으려는 쪽과 막으려는 쪽. 두 군세가 치열하게 맞부딪쳤으나, 전투의 양상은 전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격하는 쪽은 승리를 앞둔 것 같았고, 막아서는 쪽은 이미 패배의 코앞까지 몰린 듯했다.

"기가 막히는군."

세레온 우슈무르는 혀를 찼다. 성벽 위를 사수하고 있는 병사들이 그의 눈에는 시체처럼 보였다. 그들의 전투는 전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저 죽고 싶지 않아 발악에 불과했다.

"비켜라!"

카앙!

세레온 우슈무르가 헐떡거리던 병사를 밀쳐내고 방패를 들이밀었다. 병사의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들던 창이 방패에 튕겨나가고, 곧바로 뻗은 검이 적병의 목을 찔렀다.

"크륵!"

목이 찔린 상태에서도 손을 뻗어오는 적병을 걷어차 성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서도 내보이는, 독기라고 해야 할지 전의라고 해야 할지 모를 정신력이 세레온 우슈무르의 등골을 서늘하게 긁었다.

'일개 잡병이…….'

방패를 든 손이 아직도 얼얼했다. 병사의 일격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힘이었다

'뭔가 있군.'

직접 한 번 상대하고 나니 아군 병사들이 속절없이 밀리고 있는 모습이 달리 보였다. 방금 그가 해치운 병사 한 명이 유난히 장사였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전장은 그런 안일한 생각이 통용되는 곳이 아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룬차이는 벌써 열흘이 넘도록 이 성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가 열흘을 쏟아 얻은 것은 고작해야 성벽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닷새 뒤에는 원군이 당도할 것이다, 라는 말은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장교들을 통해 병사들 사이에 소문이 돌게끔 했으니까. 그런 희망이라도 있기에 병사들이 지금도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룬차이는 신이 아니다! 그는 내 목을 가져가지 못했고, 너희들의 목을 가져가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니 두려움 없이 싸워라! 룬차이는 결코 셀마 성을 얻지 못할 것이다!"

와아아아아!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맨다던 총대장이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그것만으로도 병사들의 사기가 높아질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여느 장교들처럼 뒤에서 목소리만 높이지 않았다. 양 손에 칼과 방패를 들고서 직접 적에게 달려갔다. 그를 호위하는 친위병들이 그의 뒤를 따랐고, 그 중에는 대장기를 든 병사도 있었기에 그의 존재는 전장 어디에서든 눈에 띄었다.

전장 어디에서든. 그것은 성벽 아래까지 포함이었다.

'저 놈…….'

가론드는 높이 흔들리는 대장기 뿐 아니라 그 앞에서 맹위를 떨치는 세레온 우슈무르의 모습까지 뚜렷하게 보았다.

'유마의 칼에 찔리지 않았던가.'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유마의 칼은 요철로 만든 귀물(鬼物)이다. 그 칼에 입은 상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낫지 않는다. 제대로 된 치료를 하지 못하고 방치하게 될 경우에는 상처가 점점 더 심해지며, 종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분명 저 적장은 유마의 칼에 찔렸었고, 제법 중한 상처를 입었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설치고 있다는 것은 무리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자그마한 성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했을 리 없으니 말이다.

'정신력 하나는 인정해줘야겠군.'

세레온 우슈무르와는 면식이 없다. 그 이름은 한두 번 정도 얼핏 들어본 적이 있지만,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었다.

'그래. 명색이 제국의 위장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가론드가 팔짱을 풀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사내가 나섰다. 루반다이들과 비슷하지만, 차별되는 외관을 한 자였다.

"장군께서는 자리를 지키시지요. 적장의 목은 제가 베어오겠습니다."

"자곤. 주제넘군."

"송구합니다. 하오나 장군. 전하께서 부재중이신 이때, 전군을 통솔하시는 장군께서 쉬이 움직이셔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도 그리 이르셨지 않습니까."

"으음."

루반다이의 지휘관이라고는 하나 가론드는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사내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며 선을 넘는 상대에게는 얼마든지 가혹하게 굴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자곤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그는 찌푸렸던 인상을 도로 폈다. 다른 것보다도 '전하'라는 말이 그를 망설이게 했다.

"쯧! 그래. 자네의 말이 옳다."

"……."

"공을 넘기지. 가서 적장의 목을 가져와라."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자곤과 그가 이끄는 루반다이들이 성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던 가론드는 다시 성벽 위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색 대장기는 여전히 힘 있게 펄럭이고 있었다.

'자곤의 실력이 나쁘지는 않지만…….'

사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그는 루반다이의 지휘관 중 하나이며, 숙련된 전사다. 어지간한 적은 그의 칼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실패했지. 두 번 실패하지 말란 법은 없다.'

엄밀히 말해 이전번의 실패는 자곤이 아닌 유마의 실패였지만, 둘의 실력은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다 적장도 이미 한 번 당한 적이 있으니 방비를 더 단단히 하고 있을 터. 무엇보다 이전번의 그 건방진 애송이가 다시금 끼어든다면 일이 틀어질 확률이 상당히 높다.

"남쪽에 병사들을 더 투입해라."

"예."

자곤이 적장의 목을 벨 수 있다면 최고지만, 실패하더라도 지지부진한 전세를 흔들어놓기는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를 틈타 밀어붙인다. 자곤이 흔들어놓은 판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다.

'루반다이들을 꽤나 잃게 될지도 모르겠군.'

가급적이면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또 다시 루반다이의 머리 하나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 되면 이 자그마한 성에서 루반다이의 머리 두 개가 꺾이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별 수 없는 일이지.'

전장에서 피가 흐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루반다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어차피 루반다이라는 이름은 몇 번의 세대를 거쳐 이어져온 이름. 선대의 루반다이들도 모두 전장에서 쓰러져갔다. 전설의 무명이라는 것은 그렇게 쓰여 온 것이다.

당대의 루반다이들 역시 다르지 않다. 가론드 자신 역시 큰 테두리에서는 그들과 다르지 않고.

이곳에 있는 모두가 전장에서 피고, 또 사라질 이름들이다. 불멸하며 영원토록 이어질 이름은 오직 하나 뿐.

"비켜라."

고수(敲手)를 물러서게 하고, 가론드는 직접 채를 잡았다. 그리고 힘껏 북을 두들겼다.

두웅!

그는 전장에 뛰어들지 못한 아쉬움을 장엄한 북소리로 풀어냈다. 북이 울며 토하는 것은 그의 목소리였으며, 병사들에게 향하는 독려였다.

두웅!

그의 북소리는 경험 많은 고수가 힘껏 두들길 때보다 훨씬 더 크게 멀리 퍼져 나갔다. 웅장한 그 소리는 틀림없이, 전사의 가슴 속에서 새어나오는 고동과 닮아 있었다.

*

"오는군."

세레온 우슈무르는 성벽 아래서 빠르게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를 놓치지 않았다. 처음부터 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전투에 임하는 와중에도 매 순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루반다이.'

가슴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이곳에 오기 전, 의식이 몽롱해질 정도로 약을 씹었지만 한바탕 몸을 움직이다보니 어느새 약효가 떨어지기 시작했는지 가슴의 상처부터 해서 온 몸에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오래 버티진 못하겠군.'

중간에 다시 몸을 빼서 약을 먹고 올 수는 없으니 이대로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버텨야 한다. 하지만 벌써부터 오한이 느껴지니,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빨리 와라.'

자신의 목을 노리는 적이 빨리 와주기를 바라다니. 꽤나 웃기는 상황이다.

다행스럽게도, 적은 그의 바람대로 빠르게 눈앞에 나타나주었다. 사다리에 올랐다 싶더니만, 숨 몇 번 들이쉬고 나니 어느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적이지만 감탄이 절로 나오는 신속함이었다.

"낯이 익군. 내 잠자리 옆에 있는 놈과 닮았어."

"무슨 소리지?"

한 명. 다른 루반다이들과는 구별되는 외관을 한 자가 물었다.

그에 세레온 우슈무르는 비릿하게 웃으며 답했다.

"네놈이 대장이겠지. 수급만 남아 내 전리품이 된 놈과 닮았다는 뜻이다."

"…곱게 목만 베어가려 했더니, 험한 꼴을 자초하는구나."

섬뜩한 살기가 목덜미를 쓸었으나, 세레온 우슈무르는 더욱 진하게 웃었다.

"네놈 역시 그리 될 것이다."

이미 한 번 당해보았다. 그러니 방심은 하지 않는다. 그는 즉시 각인의 발휘했다. 우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단단한 돌 갑옷이 그의 피부를 덮었다.

탓!

적들이 역시나 예의 그 빛을 뿜으며 달려들었으나, 가장 앞에서 날아오는 칼이 그의 앞까지 당도했을 즈음에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후였다.

'이놈 역시.'

날아드는 칼에서 껄끄러운 기운이 물씬 풍겼다. 한 번 호되게 당해 보았기에 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필시 이 칼 역시 요철인지 뭔지 하는 괴이한 것으로 만든 것이리라.

다만 차이가 있다면, 먼젓번에 상대했던 녀석과는 달리 두 개가 아닌 하나라는 것이고.

카앙!

그래서 상대하기가 조금 더 편했다. 칼의 형태 자체는 평범하니, 상대하는 것도 익숙하다.

"으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다는 것은 아니었다. 두 손으로 쥐고 휘두르는 한 자루인 만큼, 칼에 실린 힘은 먼젓번에 상대했던 녀석보다 월등했다. 최대한 흘리며 받아내도 뒷걸음질을 쳐야 할 정도였다.

"장군을 지켜라!"

세레온 우슈무르의 친위대와 루반다이들이 격돌했다. 이미 한 번 주인을 지키지 못한 전적이 있는 병사들은 불명예는 한 번으로 족하다는 것인지 눈에 불을 켜고 루반다이들에 대적했다.

"목만 남은 놈보다 시원찮군."

"마음껏 떠들어라. 이제 곧 떠들고 싶어도 떠들 수 없게 될 테니."

말장난으로 도발해보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본전도 못 찾은 것 같았다. 상대는 상당히 냉철한 자였다. 도발에 기세가 흐트러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다.

채채챙!

상대의 맹공에 세레온 우슈무르는 연신 뒷걸음질을 쳤다. 그나마 돌 갑옷을 걸친 덕에 몸이 무거워져 쉽게 밀려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돌 갑옷이 없었더라면 진즉에 몇 번이나 땅을 굴러야 했을 것이다.

"장군을 도와라!"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그가 수세에 몰린 것을 보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일개 병사들이 휘두르는 칼이 닿을 리 만무했다. 용감하게 달려들던 병사들이 목이 잘리고, 몸이 갈라지면서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쳤다.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병사들을 보며 세레온 우슈무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병사들에게 끼어들지 말라 외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의 희생을 통해서 그나마 숨 돌릴 틈이라도 벌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으.'

더 정확하게 말하면, 숨 돌릴 틈이 아니라 고통을 삭일 시간을 벌고 있었다. 그저 공격을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그의 몸은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댔다. 누군가 상처에 손을 집어넣고 강제로 잡아 뜯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비켜라!"

그는 피를 토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몸통이 반으로 잘려 무너지는 몸뚱이를 넘어, 있는 힘껏 칼을 찔렀다.

카앙!

얼음처럼 서늘한 눈과 분노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눈이 마주쳤다.

"으아아아아!"

세레온 우슈무르는 배에 가깝게 무거워진 몸까지 실어가며 상대를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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