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화
"불가능해."즉답이었다.
"읽힐 걸세. 개죽음을 당할 것이야."
"장군께서 말씀하셨듯이, 룬차이는 신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미 한 번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
"무엇보다도, 달리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다 떨어져가는 것은 군량만이 아닙니다. 당장 내일 밤부터는 말들도 굶어야 할 텐데, 그때가 되면 마지막 발악조차 할 수 없게 됩니다."
군터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당장 셀마 성 안에 있는 말만 해도 수천 필이다. 사실 이제껏 감당을 한 것만 해도 상당한 무리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무리를 하는 것조차 한계에 다다른 상황.
"성문을 열게 되면…그것으로 끝일 게야."
"우리의 손으로 성문을 열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이대로 있다가 성문이 뚫리게 되면 그마저도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
한숨 섞인 대답. 순간 흐릿해졌던 눈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자신 있나?"
"……."
무의미한 물음이라는 것은 두 사람 다 알았다. 군터는 답하지 않았고, 세레온 우슈무르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좋아. 한 번 해보세. 만에 하나라도 룬차이의 목을 벨 수 있다면, 전세는 한 번에 뒤바뀔 수도 있어."
사실 베는 것은 룬차이의 목이 아니다. 허나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대장의 목을 베는 것은 같으니, 가론드의 목을 친다면 그의 말대로 전세가 뒤바뀔 수도 있다.
"예."
그렇기에 군터는 담담히 답했다. 무뚝뚝한 그의 모습을 세레온 우슈무르가 믿음직스럽게 쳐다보았다.
*
"병사들은 어떤가."
"충분히 휴식을 취했습니다. 내일 해가 지기 전까지는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가론드는 수하의 말에 짧게 혀를 찼다.
"속단하지 마라. 궁지에 몰리면 몰릴수록 힘을 내는 것은 짐승이나 사람이나 매한가지다."
"옛."
수하에게는 그리 말했지만, 가론드도 승리가 코앞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작은 성벽 두 개만 넘으면 끝이니까. 실질적으로는 하나만 남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마지막 성벽이야 '정리'를 위한 시간 벌이 정도 밖에 되지 않을 테니.
'그래도 제법 버티는군.'
영육(靈肉)의 탑까지 세웠음에도 이렇게 멈추게 될 줄은 몰랐다. 당초의 계획은 오늘 안에 성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적의 저항이 강했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마음만 먹으면 오늘 안에도 두 개의 성벽을 넘을 수 있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말이다.
'무리할 필요는 없지.'
영육의 탑은 병사들의 전의를 최고조로 고양시켜준다. 말만 들으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 효과는 상상 이상으로 엄청나다.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상당히 영악한 부분이 있어서, 극한의 상황이 아닌 이상 가진 힘을 모두 쓸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따금씩 사람이 죽음의 코앞에서 평소에는 내지 못했던 큰 힘을 내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육신은 분명 그 정도의 힘을 낼 수 있지만, 평소에는 그러지 못한다. 일종의 제약이 걸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육의 탑이 발산하는 영기는 그 제약을 없애준다. 전의, 용기, 그밖에 전투에 필요한 감정들을 최고조로 끌어내며 육신의 한계까지 힘을 낼 수 있게 해준다.
다만 그것이 꼭 긍정적인 효과만 내는 것은 아니다. 육신의 제약은 어떻게 보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인간의 몸은 그것이 낼 수 있는 힘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탑의 기운을 받은 상태로 장시간에 걸쳐 전투를 치르게 될 경우, 병사들의 몸이 망가질 위험성이 크다. 물론 그의 주군인 룬차이가 직접 조련한 군사들인 만큼 그렇게 쉽게 망가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무리를 할 필요는 없다.
'주군께서 그것을 손에 넣기만 하신다면 끝이다.'
이 따위 전쟁, 더 이어갈 이유가 없다. 이 성을 함락시키고 나면, 미련 없이 군을 물리리라.
'그 돼지 놈까지 처리해버리면 좋겠지만.'
바라마지 않는 일이나, 그의 주군은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요 근래에 들어서 그는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가론드는 오랜 세월 그를 따랐으나, 주군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영지로 돌아가게 되는 건가. 당분간은…….'
그의 주군은 황자들의 전쟁에 개입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마 물건을 손에 넣는 대로 영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황좌의 새로운 주인이 정해질 때까지 무료한 시간을 보내게 되겠지.
'흐흐. 적을 앞에 두고 마음이 뜬 것은 나도 마찬가지군.'
적은 아직 저 성벽 안에 남아있다. 그 병력의 수도 아마 무시 못 할 정도일 테고. 뭐, 그렇다 해도 끝난 싸움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이대로 끝인가?'
성문을 열고 야습을 가해왔던 발칙한 녀석. 그 정도 기개가 있는 놈이 이대로 포기할까. 물론 놈이 총대장이 아닌 이상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야 없겠지만, 어차피 막다른 곳까지 몰렸으니 모험을 한 번 시도해볼 법하다.
'이대로 기병을 썩히는 것도 멍청한 짓이지.'
필시 이전번처럼 기병을 활용한 야습을 가해올 것이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성문이 뚫리기 전에는 시도할 터.
'모험은 위험을 동반하는 법.'
적이 모험을 걸어오는 그때. 그때를 노린다면 성을 쉽게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다.
'대장기를 높게 세워야겠군.'
적들이 모험을 걸어 노린다면 무엇을 노리겠는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대장의 목이다. 그렇다면 대장이 여기 있다고 알려준다면, 혹시 보고서 와줄지도 모른다.
'내 목을 노리고 온다면 좋겠군.'
그렇다면 일이 한결 편해질 것이다.
*
하늘의 눈이 반개(半開)한다.
거대한 도시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새겨진다.
"가자."
그들은 유령처럼 성벽을 넘어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병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이 가는 길에 인적은 전혀 없었다. 룬차이는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고, 루반다이들만이 허리춤의 칼에 손을 가져간 채 그 뒤를 따랐다.
"이제 곧 마주칠 것이다."
걸음을 옮기던 룬차이가 한 마디를 하자, 루반다이들의 눈매가 한층 더 날카롭게 변했다.
어둡던 골목이 끝나고, 돌아서자마자 그들은 한 무리의 병사들과 조우했다. 그들을 발견한 병사들의 눈이 크게 뜨이기도 전에, 칼을 뽑아들고 있던 루반다이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들을 베었다. 비명 하나 새어나오지 않을 만큼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저곳이다."
룬차이의 눈길이 높게 솟은 첨탑으로 향했다.
"따르오리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밖에서 기다리거라."
"예."
룬차이는 수하 두 명만을 대동한 채로 탑을 올랐다.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 다섯을 제외하면 탑 내부에는 이렇다 할 경계병들도 보이지 않았다. 천안을 통해 그것을 이미 알고 있던 룬차이였으나, 계단을 밟으며 탑을 오를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있군.'
룬차이의 입가에 흐릿한 웃음이 걸렸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바란무르가 비록 어리석은 녀석이기는 해도, 천치는 아니다. 적어도 뭐가 중요한지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런 녀석이 방비를 이렇게 허술하게 할 리 없는 것이다. 무언가 나름대로 안배를 해둔 것이 있을 터. 그게 뭔지는 이제 곧 알게 되리라.
그러나 계속해서 계단을 오르고, 몇 개의 층을 지나도록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자 룬차이의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기는 점점 자취를 감췄다.
"전하. 뭔가 조금 이상합니다."
그를 따르던 수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는 평범한 루반다이가 아니었다. 루반다이를 이끄는 네 명의 대장 중 하나였으니까. 숙련된 전사의 감은 무시할 수 없다. 룬차이가 진즉부터 느끼고 있었던 것을 이제는 그 또한 느끼고 있었다.
"그래. 무언가 있구나."
그런데 문제는,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그조차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천안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무언가라. 뭔지는 몰라도 평범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
그렇게 계속 걸음을 옮겨 꼭대기 층에 올랐을 때. 룬차이는 활짝 열려 있는 큼지막한 금고를 보았다. 그리고 그 위에 걸터앉아 있는 한 사내도.
[왔군.]
그를 본 순간. 룬차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 자네라면 내 눈을 피할 수 있지. 간과했었군.]
[어째서?]
[자네가 날 찾아올 거라는 생각을 못했으니까.]
"전하."
"나서지 마라."
룬차이를 두 수하가 앞으로 나서려는 것을 제지하며, 사내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서…어쩐 일이지?]
[짐작하고 있을 텐데.]
검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빨려 들어갈 것처럼 아찔한 눈. 끝도 없이 깊게 파인 굴을 보는 듯한.
[어째서지?]
[그가 당신의 죽음을 원한다.]
[그?]
[가장 오래된 망령.]
그 말을 들은 순간. 룬차이는 한 사내를 떠올렸다.
이어지는 사내의 말은 그의 추측에 쐐기를 꽂았다.
[그는 변수를 원하지 않소. 그에게 있어서는, 당신이 눈엣가시겠지.]
[그래. 그렇겠지. 그 자는 원치 않는 역사를 지우려 하는군. 그렇지?]
[아마도.]
[자네가 그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그와 뜻이 일치했기 때문인가?]
[내 목에 족쇄는 없소.]
사내가 금고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심지어 옷자락이 휘날리는 소리마저도.
[내가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린 까닭을 아는가.]
[글쎄.]
[당신을 존중하기 때문이오. 당신을 없애야 한다면, 내 칼로 직접 베어주는 것이 내가 당신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라고 생각했지.]
굳어 있던 룬차이의 입가에 다시금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괜찮겠나? 황제의 검에 비하면 부족할지 몰라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걸세.]
[바라던 바.]
둘 사이에 흐르는 무거운 공기를 참지 못하고, 두 명의 루반다이가 뛰쳐나갔다. 그들의 검이 허공을 막 가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머리는 이미 목과 분리되어 떠오르고 있었다.
[최선을 다하시오.]
밤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리 하겠네. 동지여.]
룬차이가 그의 검을 뽑아 들며 짤막히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