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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39화 (439/1,064)

439화

쿵! 쿵!

충차가 바깥쪽에서 성문을 두들겼다. 이미 빗장은 너덜너덜해져서 언제 박살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막아! 물러서지 마라!"

뚫리기 직전인 성문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성문 뒤쪽에서 말 그대로 온 몸을 던져 버티고 있는 병사들 덕분이었다. 그야말로 육탄 방어. 백 명이 넘는 병사들이 성문에 몸을 던지다시피 하며 성문이 열리는 것을 막아서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버텨왔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너덜거리는 것이 빗장만은 아니었으니.

"대장님! 2성벽으로 물러나자는 전갈입니다!"

"어디서 온 것이냐!"

살라스의 보고에 군터는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너무 이르다.'

상황이 어려운 것은 틀림없지만, 이렇게 빨리 밀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살라스의 말을 들은 순간, 군터는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세 곳에서 모두……."

한 곳이었다면 어떻게든 지원 병력을 보내서라도 버텨보았겠으나, 세 곳이 동시에 한계를 말한다면 달리 방도가 없다.

"저희 쪽도 성문이 이제 한계입니다. 곧 뚫릴 겁니다."

살라스의 말처럼, 성문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보였다. 성문이 뚫리고, 적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병사들을 물린다."

성벽은 세 개다. 그 중에 하나가 뚫린 것뿐이다.

그렇게 위안 하면서 군터는 지시를 내렸고, 그의 명을 받은 장교들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병사들을 뒤로 물렸다. 성벽 위에 남아있던 모든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후, 그들은 일제히 두 번째 성벽으로 물러났다. 이미 연락을 받은 터라 성문은 열려 있었고, 병사들은 열린 문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렸다.

"쫓아라!"

당연히 물러나는 아군을 적이 가만 둘 리가 없었다. 다행인 것은 아직 성문이 돌파당하지 않았기에 성벽을 넘어온 적병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군터는 소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뒤따라 붙는 적을 상대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 사이 병사들은 성문을 지났고, 적을 막아서던 군터는 마지막으로 성문을 지났다.

쿵!

성문이 닫혔다. 끝까지 따라붙으려던 적은 성벽 위에서 날아든 화살비가 제지했다.

콰앙!

빗장이 박살나고, 성문이 활짝 열렸다.

와아아아아!

무수한 병사가 함성을 지르며 들이닥쳤으나 그들이 싸워야 할 적은 이미 또 다른 성벽 뒤로 숨은 뒤였다.

*

"으으으……."

"아아악!"

"사, 살려줘……."

어딜 가도 들리는 것은 비명뿐이었다. 퇴각하는 와중에는 잊고 있었지만, 긴장이 풀리며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죽고 싶지 않다는 단 하나의 열망이 그들을 달리게 했지만, 다시 싸울 힘까지 주지는 못했다. 지금 쓰러져 비명을 지르는 병사들은 모두 전력 외라고 봐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쓰러진 자들이 족히 열에 두셋은 된다는 점이다.

"군터 대장!"

"빌모렘."

군터를 부른 금발의 중년인은 동벽을 지키던 장수였다. 피와 피곤으로 찌든 얼굴을 한 그는 목소리까지 반쯤 쉬어 있었다.

"조금 더 버틸 줄 알았는데."

"어쩔 수 없었네. 적들의 기세가 너무도 강해서 버틸 수가 없었어. 심지어 이쪽에는 가론드가 왔다네."

"가론드……."

"자네가 보았었던 그 녹포 장군 말이네."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단 한 번 보았을 뿐이나, 그의 존재감은 아직도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룬차이가 없다면…그놈이 군을 이끌고 있는 건가.'

녹포 장군. 제국의 위장이 청녹흑적의 네 위계로 나뉘니, 위장 중 두 번째 서열이다. 이제껏 봤던 이들 중 가장 고위의 장군이나, 별 감흥은 없었다. 이미 황자를 보았기 때문일까.

하지만 지위와는 상관없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은 확실하다.

"최대한 버텨보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성벽이 넘어갔지. 변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 물러나지 않았다면 병력의 반을 잃었을 것이야."

"그 말을 하려고 부른 건가."

"물론 아니지. 사령관께서 부르시네. 자네 뿐 아니라 우리 모두."

"사령관께서?"

"그래. 사령관께서."

유독 사령관이라는 말에 힘이 들어갔다. 혹시 하는 생각에 군터가 슬쩍 눈을 크게 뜨자 빌모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께서 일어나셨네. 직접 회의를 소집하셨지."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도 세레온 우슈무르는 눈을 뜨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이나 지났다고 일어나서 군무를 본단 말인가. 모르긴 몰라도, 필시 상당히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무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적이 다시 공격을 개시한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오늘 안에 이곳에 있는 모두의 목이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세레온 우슈무르가 이를 악 물고 몸을 일으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왔군."

파리한 안색이었다. 그러나 몸은 곧게 펴져 있었으며,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군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쩡한 모습이었다.

"장군."

군터는 군례를 취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때, 코끝을 스치는 희미한 냄새를 맡았다. 아주 희미했지만, 짐승의 수준을 넘어선 군터의 후각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시큼하면서도 조금은 아릿한.

군터는 이것이 무슨 냄새인지 알고 있었다. 전장을 몇 번이나 누비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중상을 입었을 때, 고통을 다스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쓰는 약이다. 그것을 쓰면 잠시간은 통증을 잊을 수 있지만, 약의 섭취를 끊는 순간 전보다 더한 고통에 몸부림쳐야만 한다.

'뒤가 없다 이거군.'

저런 약에 의존하는 것은 생명을 갉아먹는 것이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장군씩이나 되는 이가 약을 삼켰다.

"강녕한 모습을 뵈니 기쁩니다."

"하하. 나야말로. 살아서 다시 보게 되니 기쁘군."

이곳에 오기 전, 그들의 사이는 좋은 말로도 괜찮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군터를 대하는 세레온 우슈무르의 태도는 마치 지기를 대하듯 하는 듯했다. 루반다이 대장의 목을 베어 온 일이 그에게 제법 큰 인상을 준 듯했다.

"이제 모일 사람은 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도록 하겠소."

지휘관들을 불러 모았으나, 그것이 특별히 전할 말이 있거나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현 상황이 어떤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그런 논의 같은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도 잘 알았다.

"상황이 어렵게 되었군."

"송구합니다. 제가 부족한 탓에……."

폴라릭 앤버가 고개를 숙였다. 그에 세레온 우슈무르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찌 누구 한 사람의 잘못이겠는가.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장군이 최선을 다해주었음을 알고 있소. 그럼에도 상황이 이리 된 것은 단지 적이 강했을 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

힘 빠지는 소리나 하자고 불러 모은 것은 아닐 터였다. 군터는 이어질 말을 묵묵히 기다렸다.

"적이 외성벽을 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두 개의 성벽이 더 남아 있소. 적들이 바로 기세를 몰아 쳐들어오지 않는 것은, 적들도 나머지 두 개의 성벽을 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네."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 진행되는 회의인 데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더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폴라릭 앤버가 미처 채우지 못했던 빈자리가 비로소 주인을 찾았다. 대장의 무게감이 돌아오니 안정감도 따라서 돌아왔다.

"우리가 비록 수세에 몰려 있기는 하지만, 실상 우리와 적의 병력 차이는 크지 않소. 사실 비등하지. 상식적으로, 성의 이점까지 지닌 우리가 밀릴 이유가 없소."

그러나 상식적이지 않게도, 지금 그들은 이렇게 절체절명의 상황에 몰려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룬차이. 위대한 군인이지. 나 또한 그를 존경했었고, 남몰래 목상(木像)을 품고 다니며 때대로 기도를 하기도 했지. 하지만…지금은 싸워서 이겨야 할 적일뿐이야."

상처 입은 자의 사나운 눈길이 제장들을 훑었다.

"한 번 생각들 해보게. 우리가 저 룬차이와 대적한 이후, 무엇 하나 특별히 대단한 게 있었나? 하늘에서 불의 비가 쏟아진다거나, 수만이었던 적이 갑자기 수십만이 되어 밀려온다거나. 응?"

세레온 우슈무르가 자신의 의자 옆에 놓아두었던 작은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거기서 악취가 진동하는 덩어리 하나를 꺼내 탁자 위로 던졌다.

"전설이라고 불렸던 루반다이. 그 대장의 목이 여기 있네. 백 년이 넘게 무명을 떨쳤니 어쩌니 해도, 결국 이렇게 목이 잘렸단 말이지. 우리와 같은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는 소리야."

군터는 자신이 직접 베어 온 수급을 한 번 흘깃하고는 다시 세레온 우슈무르에게 집중했다.

"룬차이는 날 죽이려 했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지.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군주는 신이 아니야. 단지 우리보다 조금, 아니면 더 많이 대단한 존재일 뿐. 알겠나? 쉽지 않겠지만, 결코 넘어서지 못할 적이 아니라는 뜻이야. 지레 겁에 질리지만 않는다면!"

쾅!

큼직한 주먹이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작게 우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부터 닷새. 닷새를 더 버티면 우리의 승리다. 알겠나? 닷새일세."

"어찌하여 닷새입니까?"

"이곳에 오기 전부터 전하와 이야기 된 부분이네. 전하께서는 나를 보내시면서도 룬차이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는 못할 것을 짐작하셨지. 닷새 뒤까지 2차로 원병이 오기로 되어 있네.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르게 당도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오오!"

어두웠던 제장들의 얼굴에 활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군터는 처음과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일관했다.

'거짓이겠지.'

머리 쓰는 데는 소질이 없는 군터였지만, 그런 그조차 조금만 생각을 해보니 방금 그 말이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강한 의심이 들었다.

테리브란에서 출발하기 전에 야스메티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그때 야스메티는 세레온 우슈무르의 2만 병력이 실상 7황자가 동원할 수 있는 여유 병력의 대부분일 것이라 했었다. 물론 야스메티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군터의 생각에도 아무리 4개 주를 다스리고 있는 7황자라고 하나 이미 전쟁에 쏟아 붓고 있는 병력만 10만을 훌쩍 넘기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금 이곳으로 원병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설령 보낸다 한들 그것은 정예병이 아닐 터였다. 기껏해야 급하게 끌어 모은 오합지졸 징집병에 불과할 터. 그런 원군은 온다고 해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결국, 높은 확률로 지금 세레온 우슈무르가 한 말은 사기를 띄우기 위한 거짓일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거짓말에 저들은 기뻐하고 있었다. 저들이 멍청해서일까? 아니. 아니다.

저들은 단지 어둠속에 오래 있었기에, 빛이라고 생각되는 아주 자그마한 환각에도 미소 짓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저들은 그만큼 한계에 다다라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장군."

회의가 끝난 후. 다른 이들 틈에 섞여 지휘부를 나섰던 군터는 다시 돌아와 세레온 우슈무르와 독대했다.

"무슨 일인가."

다시 본 세레온 우슈무르의 얼굴은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고통이 묻어 있었다. 약 기운이 조금 가라앉았던지, 아니면 약조차 그의 고통을 다 잠재우지 못한 듯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뭔가?"

"이대로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무슨 말인가. 내 말했듯, 어떻게든 닷새만버티면……."

"닷새를 버티면 엿새째에 죽겠지요.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거짓을 말씀하셨음을 압니다."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세레온 우슈무르가 피식 웃었다.

"…흥. 눈치도 빠르군."

"두려움에 먹히지 않았을 뿐입니다."

"흐흐. 자네는 죽음이 두렵지 않나?"

"달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두렵지도 않습니다."

"좋아. 자네 말이 맞네. 내가 거짓말을 했어. 닷새를 버틴다고 해도 원군은 오지 않을 걸세. 닷새를 버틴다 해도…아마 자네 말대로 엿새째에는 우리 모두 죽게 되겠지. 어쩌면 고위 인사 몇 명 정도는 포로로 잡혀 살아남게 될지도 모르고."

"그리 되길 바라십니까?"

"아니. 포로로 잡힐 바에야 내 스스로 목을 그을 걸세."

"……."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뭔가."

"기병을 내어주십시오. 소관이 룬차이의 목을 베겠습니다."

고통 때문에 찌푸려져 있던 세레온 우슈무르의 눈이 큼지막하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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