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제국의 군주들은 자신들의 군세를 이끌고 전쟁에 임한다. 수만에 이르는 군대를 맡긴다는 것은 보통의 경우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반란의 위험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의 대전략 안에서 어우러지지 않고 돌출되어 움직이는 군대는 그 효용을 발휘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국의 군주들은 예외였다. 그들은 황제에게 절대복종 하며, 각기 독립적인 전쟁을 수행할 충분한 능력을 지녔다.
…중략…
제국의 세 번째 군주, 룬차이는 그가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틀림없이 그의 군재는 군주들 가운데에서도 독보적이다.
하지만 군재가 뛰어나다고 해서 그의 말도 안 되는 위업이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치른 수백, 수천 번의 전투에서 불패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에게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있음은 분명하나, 그와 직접 대면하여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묻는다고 해서 알려주지도 않겠지만) 그를 상대했던 아국의 장군들이 남긴 말들을 토대로 간략하게 정리한다.
첫째로, 그는 전국(全局)을 정확히 파악하는 비상한 시야를 가졌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칼 같이 파악하여 군을 운용하는 데 있어 단 하나의 실수도 없었다. 그는 승리하지 못할 싸움을 하지 않았고, 패하지 않을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둘째로, 그의 군대는 강병이었다. 그의 병사들은 언제나 잘 준비되어 있었고, 그 강력함과 정연함으로 상대하는 적을 압도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전투를 수행하는 것뿐 아니라 병사들을 조련하는 데에도 탁월한 재주가 있음이 분명하다.
셋째로, 그는 전장의 공기를 자유자재로 주무르는 힘이 있었다. 그의 드높은 명성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병사들은 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드높았고 그를 상대하는 적은 움츠려들어 소극적이기 일쑤였다. 그의 깃발이 높이 휘날리는 것만으로도 승기가 그의 군대에게 머무는 것 같았다고 그를 상대해 보았던 이들이 입을 모아 증언했다.
카라누르의 민간에서는 그를 군신이라 부르며 칭송한다고 한다.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가 나서는 전장에 패배는 없으니, 군신이라는 칭호에 그보다 더 적합한 이가 있겠는가.
-우슬라 익세이온 저(著). 제국의 여섯 군주 中 '무패 군주 룬차이'편 일부 발췌-
*
와아아아아아-!
밀어내!
사다리를 오르는 병사를 창으로 찔렀다. 사다리를 밀어내려 발을 들었던 병사의 머리에 화살이 박히니 바로 옆에서 동료가 어찌 되는지를 본 병사들은 두려워하며 나서기를 꺼려했다. 장교들이 뒤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지만 머리에 화살을 맞기 싫은 병사들은 방패 뒤로 숨은 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렇게 움츠러든 사이, 적병이 기어이 사다리를 타고 성벽 위로 올라왔다. 한 손에는 방패, 한 손에는 칼. 눈은 불이라도 킨 것처럼 형형하다. 홀로 적지(敵地)에 발을 디뎠음에도 두려운 기색은 일체 보이지 않았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퍼걱!
그러나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은, 어디선가 날아온 창 한 자루에 의해 깨졌다. 휙! 하는 소리가 들리고, 기세 좋게 서 있던 적병의 머리가 깨졌다. 화살이 박힌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에 기다란 창이 박힌 몸뚱이가 성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뭣들 하고 있는 거냐! 싸우지 않을 놈은 당장 말해라! 내가 직접 저 아래로 내던져 주겠다! 이 성벽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함께 싸울 수 있는 전사뿐이다! 겁쟁이는 필요 없어!"
할렌이 버럭 외치며 살기등등한 눈으로 주변의 병사들을 훑었다. 누구 하나 감히 그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거나,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다 두들겨 패서 정신머리를 고쳐놓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빌어먹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단체로 겁쟁이가 되기라도 한 것일까? 전날에 비해 전투에 임하는 병사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단순히 며칠 동안 성에 갇혀 있어서 그렇다고 하기에는…뭔가 다르다.
더 미치겠는 것은, 병사들을 윽박지르는 할렌 자신조차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투에 대한 흥분으로 인한 두근거림이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아니었다. 영문 모를 불안과 초조가 그를 안에서부터 좀먹고 있었다.
'에이잇! 생각 자체를 하지 말아야지.'
머리가 복잡하게 굴러갈수록 가슴은 조그매진다. 할렌은 숙련된 전사이자 군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다루는 법을 깨쳤다. 두려움을 어떻게 가라앉혀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머리를 비운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한다.
"사다리를 밀어라!"
"예? 아……."
명령을 내렸으나 그와 눈을 마주친 병사는 곧바로 나서지 않고 뭉그적거렸다. 그에 할렌은 손을 뻗어 그 병사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헉!"
"분명 말했다! 이곳에 겁쟁이가 설 곳은 없다고!"
"우, 우아아아악!"
할렌은 병사를 잡아당겨 그대로 내던졌다. 미처 반항할 틈도 없이 내던져진 병사는 사다리를 오르던 적병과 엉켜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너!"
"예, 옛!"
"밀어라!"
"옛!"
그 다음 명을 받은 병사는 신속하게 움직여 사다리를 걷어찼다. 화살은 날아들지 않았다. 발을 쭉 뻗은 후 다시 자리로 돌아온 병사는 오랫동안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구슬땀을 흘려댔다.
"간단하다! 기어 올라오는 놈들을 밀어내고, 기어 올라온 놈들을 밀어내면 된다! 성벽은 굳건하며, 이 전투에서 유리한 것은 우리다! 놈들이 활을 쏘면 우리도 쏘면 그만이야! 겁먹지 말란 말이다!"
사납게 외치는 할렌이었지만, 그렇게 외치고서 방패를 드는 할렌의 입술에는 작게 핏물이 맺혀 있었다.
*
군터는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적병의 목을 베면서 얼굴에 튄 피 때문이 아니었다.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는 전장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은 그야말로 총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사다리만 해도 수십 개가 넘었고, 저 아래에서는 충차가 성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적병들은 마치 오늘 안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다 목이 날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필사적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아니. 아니지.'
다시 생각해보니 필사적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필사적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달려든다는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적들은 그런 것 없이, 자발적으로 목숨을 내놓고 덤벼드는 것 같았다. 그들의 눈에 전의는 비쳐도 두려움은 비치지 않는 까닭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숱한 전투를 치른 군터였지만 이런 적은 처음 보았다. 군을 이끄는 장수 급 정도 되는 이들이라면 모를까, 어찌 일개 병사들마저 이런 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까놓고 말해 소모품에 불과한 이들이다. 병사들 역시 자신들의 처지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 동기부여가 되었든, 그들은 자신들과는 별로 상관없는 전쟁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그렇기에 전투에 임하는 그들의 눈에는 살의는 있을지언정 결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지금. 룬차이의 군대는 말단 병사 하나까지도 장수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처참하군.'
반면에, 아군의 병사들은 그와 정반대였다. 적들이 보이는 기세에 주눅이라도 들은 것인지 하나 같이 겁쟁이처럼 움츠려들었다. 그들이 하는 싸움은 목을 물어뜯겠다고 덤벼드는 맹수에게 하는 소심한 반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전력을 운운하기 전에, 이미 기세에서부터 하늘과 땅 차이다. 어째서인가?
비정상적이다. 군터는 이 일방적인 흐름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저 탑.'
전투가 이어질수록 멀리 보이는 탑의 모습이 변화했다. 처음에는 그저 뚜렷하게 보이던 것이 지금은 불길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마치 옅은 연기에 감싸이기라도 한 것처럼.
'방도가 없는 건가.'
또 한 명. 성벽 위로 막 올라온 적을 걷어차 날려버리고, 군터는 고개를 틀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한 대가 그의 눈앞을 스쳐갔다.
"적들의 공세가 약해졌다! 놈들이 지쳐가고 있다는 증거다!"
힘껏 외쳤다. 쩌렁쩌렁한 고함은 한 순간이나마 전장을 뒤엎었다. 바로 옆에 있던 병사들은 적아를 가리지 않고 귀를 부여잡으며 비틀거릴 정도였다.
"조금만 더 버티면 놈들은 알아서 물러갈 것이니, 모두 있는 힘을 다해 싸워라!"
물론 거짓이다. 적의 공세는 약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적의 기세가 강해졌는지 약해졌는지를 어찌 안단 말인가. 그것을 살필 정도로 여유가 있고, 눈이 좋은 이는 드물었다.
이제 병사들은 힘을 낼 것이다. 이제 곧 끝난다는 거짓말을 믿고 어떻게든 버틸 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것이고, 끌어낸 힘이 다하는 순간 맥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할 것이다.
'달리 방도가 없다.'
하지만 어차피 이대로라면 오래 버티기 힘들다. 적의 기세는 바람을 맞은 불처럼 더 강하게 치솟고 있었고, 아군은 벌써부터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수단,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야.'
불끈 쥔 주먹에서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일렁였다.
이제껏 숨겨두었던 힘을, 어쩌면 이곳에서 써야할지도 모른다.
뒤가 없다면, 더 이상 숨기고 자시고 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싸워라! 적들을 밀어내라!"
군터는 칼 한 자루를 들고 성벽 위를 종횡무진으로 누볐다.
"기름을 부어라!"그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끓는 기름을 성벽 아래로 들이 부었다.
"불화살을 쏴라!"
슈슝!
화르륵!
끓는 기름에 불화살이 스치니 쏟아지던 기름은 불벼락이 되어 성벽 아래의 적을 덮쳤다.
아아아악!
전장을 울리는 처절한 비명 속에서, 전장의 열기는 들러붙은 불길보다 더 뜨겁게 솟구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