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화
오오오오오-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군터는 벌떡 일어나 숙소를 나섰다. 그리고 갑옷도 걸치지 않은 채 성벽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리고 보았다.
성벽에 오른 상태에서도 고개를 위로 한참 들어야만 그 끝을 어렴풋이 볼 수 있는, 말도 안 될 정도로 높게 치솟은 탑을.
'…말도 안 되는.'
군터는 그리 생각했다가 곧바로 실소했다.
확실히 충격적이며, 비현실적인 관경이다. 하지만 이런 것을 어디 한두 번 겪던가. 당장 저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눈만 해도 말이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곳에 온 뒤로는 터무니없는 것들만 보게 되는군.'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이었으나, 그보다도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저 거대한 탑을 아무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군터는 그 생각이 다소 성급했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어?"
"왜 그래?"
"아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
"피곤하다고 환청까지 들리나? 엄살 피워도 소용없어. 그래도 순번은 안 바꿔줄 거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한 병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옆의 다른 병사에게 핀잔을 샀다.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군터는 그럴 수 없었다.
'감이 좋군.'
어쩌면 술사의 재능을 타고났을지도 모른다. 영적인 감각을 지녔기에 저 탑을 볼 수는 없어도, 그 기운을 느낀 것이리라.
'그렇다면, 술사들은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는 건가.'
셀마 성에는 지금 술사들이 여럿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늘에 떠 있는 눈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기에 군터는 그들에 대한 기대를 접었었다. 하지만 지금, 저 탑에 대해서는 다를지도 모른다. 일개 병사마저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성 밖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적들이 필시 무언가를 꾸미고 있습니다."
무장을 갖추고 지휘부로 향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몰려와 있었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이들이었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술사들이었다. 기대했던 대로, 그들은 잔뜩 흥분해서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필히 경계하셔야 합니다."
"아니, 대체 뭘 경계하란 말인가. 구체적인 뭔가가 있어야지. 온통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으면 대체 어쩌자는 것이야!"
그러나 흥분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둘러싸이다시피 한 폴라릭 앤버 역시 언성을 높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를 본 군터는 술사들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기는 했으나, 그 이상을 감지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긴, 나 역시 별 다르지 않군.'
탑의 형상을 보았다고는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에 대해서는 그역시 전혀 알지 못했다. 당장 폴라릭 앤버에게 보고를 한다 해도 할 수 있는 말은 저기 술사들이 반복하는 '대비해야 한다', '경계해야 한다' 정도 밖에 없을 것이다.
"군터. 자네는 어쩐 일인가?"
폴라릭 앤버는 난데없이 몰려온 술사들로 인해 머리를 부여잡고 있다가 군터를 보고 살짝 반색하며 물었다. 아마도 잠깐 숨이라도 돌리겠다 싶었던 모양이었다.
"다시 복귀하고자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벌써 말인가? 조금 더 쉬어도 괜찮네. 어차피 하루 이틀 정도 더 쉰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으니, 괜히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아."
"아닙니다. 소관의 몸은 소관이 잘 압니다. 더 쉬어봐야 몸만 굳을 겁니다."
"그렇다면야…자네 뜻대로 하게."
군터가 그렇게 대충 둘러대고 지휘부를 나서려던 순간.
와아아아아아-!
둥-! 둥-! 둥-!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함성. 사방에서 울리는 것 같은 웅장한 북 소리. 인상을 찌푸리고 앉아 있던 폴라릭 앤버가 벌떡 일어났고, 동시에 병사가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장군! 적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사방에서 적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군터는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투구를 머리에 눌러 쓰며 숨을 헐떡거리는 병사를 지나쳤다. 폴라릭 앤버는 군례를 취하지 않고 빠져나가는 군터를 책하지 않았다. 그에겐 그럴 겨를이 없었다.
"각 성벽에 병사들을 올려 보내고, 준비한 화살들을 성벽 아래로 옮겨라! 그리고 끓는 기름을 준비해!"
"옛!"
병사에게 명을 내린 폴라릭 앤버는 술사들을 보면서도 한 마디 했다.
"그대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나는 맞았군. 적이 뭔가 준비를 하긴 한 모양이오."
*
'무슨 수작이지.'
군터는 적이 셀마 성의 군량이 다 떨어지고, 끝내 성 밖으로 뛰쳐나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으리라 예상했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짐작이었다. 적진에 룬차이가 없는 이상 더더욱.
'룬차이는 없다.'
확실하다. 군터는 확신했다. 그렇게 확신함에도 보고하지 않았던 것은, 그 말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룬차이가 없는 상태에서 공격이라.'
설마하니 자신의 야습 때문에 자존심이라도 상한 것일까. 그런 단순한 이유라면 좋겠지만, 적장이 어지간히 바보일지라도 감정으로 군을 움직이지는 않을 터. 지금의 이 총공세에는 믿는 구석이 있음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저 탑이겠지.'
군터는 성벽위에 올라 새까맣게 몰려드는 적군을, 그리고 그 너머의 거대한 탑을 보았다.
쾅-!
곧바로 병사들을 갈아넣을 것처럼 기세를 올렸지만, 역시 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쪽의 기세를 죽이겠다는 듯, 몇 대의 투석기를 동원해 큼지막한 돌덩이를 쏘아댔다. 군터의 눈에는 돌덩이가 어디로 날아갈지 훤히 보였지만, 일반 병사들은 그러지 못해 불안에 잠겼다. 혹시나 저 돌덩이가 자신의 몸을 고깃덩어리로 다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
"자리를 지켜라! 투석기의 명중률은 형편없다! 저 돌덩이가 너희에게 닿을 확률은 지나가던 새가 너희의 머리 위에 똥을 갈길 확률보다 더 적다!"
장교들이 칼을 들고 돌아다니며 윽박을 질렀다.
그들의 말이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 확실히 투석기의 명중률이라는 것은 별로 기대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명중률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뭐할 만큼, 그냥 어디라도 가서 부딪치라는 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수백 개를 쏴대다 보면 간혹 한두 개 정도는 제대로 날아드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퍼억!
"억!"
군터가 옆에 있던 병사를 걷어찼다. 걷어차인 병사와 그 옆에 있던 병사들이 뒤엉켜 굴렀다. 그들이 신음을 흘리며 군터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려는 찰나.
콰앙!
그들이 있던 자리에 사람 몸통만한 돌덩이가 떨어져 박살났다. 돌로 된 바닥이 파이고, 떨어진 돌덩이가 깨져 날카로운 조각이 튀었다.
"으헉!"
군터는 다시 성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감사하다며 고개를 조아렸지만 쳐다도 보지 않았다.
'이제 다음인가.'
준비한 돌덩이가 다 떨어졌는지, 아니면 이만하면 됐다 생각했는지, 적이 다음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다리가 보였고, 충차가 보였다. 큼지막한 방패를 든 병사들이 전열(前列)에 서서 다가왔다.
"온다! 궁수 대기!"
"궁수 대기!"
군터가 선 곳은 북벽이었다. 그는 북벽의 모든 수비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전날의 공에 대한 보상이라면 보상이었다.
군터의 외침에 활을 든 병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방패병과 2인 1조를 맞추어 섰다. 그들은 군터의 명령을 기다리며 다가오는 적들을 눈에 담았다.
"내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 쏘지 마라!"
군터는 다가오는 적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전열에 선 방패병 뒤로 궁병이 숨어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대기!"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대기한다!"
장교들이 병사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목청을 높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군터는 활을 들었다.
"살라스."
"예."
"내가 쏘면, 곧바로 사격 명령을 내려라."
"예."
군터는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리고 천천히 당겼다.
비릿한 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언제지?'
거대한 벽이 밀려오는 듯했다. 틈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그야말로 철벽과 같은 군대.
하지만 아무리 단단하다고 한들, 벽으로는 상대를 쓰러뜨릴 수 없다.
'이제 곧.'
필요한 것은 단단함이 아닌 날카로움. 그러기 위해 적은 곧 모습을 바꾸리라.
그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군터는 날카롭게 뜬 눈을 감지 않았다.
정신을 칼날같이 예리하게 유지하며, 몇 번이나 숨을 내쉬었을까.
'지금!'
방패의 벽이 움찔거리는 순간. 군터는 한껏 잡아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슈웅!
한 대의 화살이 날아가고.
"쏴라!"
살라스가 있는 힘껏 외쳤다.
슈슈슈슈슝!
포물선을 그리는 화살 비가 적군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쏴라! 계속 쏴!"
적군도 지지 않고 응사했다. 그러나 아래에서 위로 쏘는 데다, 무엇보다 선수를 빼앗긴 탓에 그들의 대응은 느렸으며 위력적이지 않았다. 거기에 완벽히 허를 찔린 터라 벽과 같았던 진열도 약간의 흐트러짐을 보였다.
"살라스!"
"옛!"
"기름을 준비시켜라!"
"예! 올려 보내겠습니다!"
군터는 살라스를 통해 지시를 내리면서도 연신 활시위를 당겼다. 그의 발 옆에는 족히 백 대가 넘는 화살이 큼지막한 통에 담겨 놓여 있었다. 군터는 그 통이 금방 동이 날 정도로 빠르게 활시위를 당겼다. 보지도 않고 쏘는 수준의 속사였으나 그가 쏘는 화살은 모두 제대로 날아갔다. 비록 거의 다 방패의 벽에 막혔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와아아아아-!
어느덧 적은 성벽 앞까지 다다랐다. 적들이 눕혀서 가져온 사다리를 세우기 시작했다. 군터는 또 다시 손을 아래로 가져갔다가, 손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음을 깨달았다.
"살라스!"
"기름은 각 위치에 준비되었습니다!"
"불은?!"
"그 역시 준비되었습니다!"
어김없이 나오는 즉답에 군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덜너덜해진 활을 집어던지며 칼을 뽑아들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이제부터는 힘이 다할 때까지 싸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