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화
'뭐지?'
생소한 감각이었다.
루반다이를 이끄는 네 지휘관 중 하나로서 숱한 전투를 경험한 유마였다. 그런 그로서도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사술(邪術)인가.'
감각이 무뎌져, 아니 사라져간다. 순식간이었지만, 오직 그 과정만은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급작스러운 상실로 인한 무력감은 유마를 충분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의 몸이 그의 통제를 벗어나는,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끔찍한…….
쾅!그 와중에도 목을 향해 날아드는 창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본능 이상으로 각인된 무술의 형(形) 덕분이었다.
붕 떠올라 크게 밀려나면서, 유마는 자신의 몸이 아직까지 통제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치 팔다리가 잘려나간 것처럼 아무런 감각이 없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그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는 있었다. 문제는 형편없이 둔하고, 허약하다는 것이지만.
'온다.'
이제까지 한 번 떨쳐내면 다시 길을 열어갔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확실하게 끝장을 내겠다는 듯이 말머리를 돌렸다. 하긴,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신 역시 그러했으리라.
유마는 최후를 직감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져온 무운이 여기서 끝나게 될 줄은 몰랐으나, 아쉬움은 없었다. 본래 칼날 위를 걸친 삶이었기에 언제 끝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상대한 상대 역시 부족함이 없으니, 어찌 아쉬움이 있겠는가.
'위장은 했지만…어쩌면 그놈은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떠나기 전, 그의 주군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드물게도 확신을 하지 못하던 주군의 모습도.
'신을 품은 자.'
흥분이 치밀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흥이 차올라, 유마는 마갑(魔甲)의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너무나 급하게 무리하여 힘을 끌어올린 탓에 갑옷 안의 몸이 비명을 질렀으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는 지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므로.
쪼그라지는 몸도, 터질 듯 뛰는 심장의 고통도, 그 어떤 것도 그의 움직임을 제약하지 못했다. 그는 모든 힘을 실어 단 하나의 기억에 담았다. 수천, 수만 번도 더 반복했던 하나의 동작을 떠올렸다.
'닿는가.'
서걱!
귀에 들리지는 않았으나, 아마도 그런 소리가 났을 것이다. 유마는 잘려나가는 자신의 팔과 피가 묻은 창을 보았다. 상대의 볼에 작게 생겨난 혈선도.
'닿았…….'
그것을 확인한 유마는 환희에 젖었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
"허억……."
루반다이 대장의 목을 날려버린 직후, 군터는 거친 호흡을 가라앉히느라 애써야 했다.
진이 빠진 것처럼 몸이 무겁다.
사기(死氣)를 실전에서 쓰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때문에 힘 조절을 하지 못했다. 한 방울을 따르려다가 다 쏟아버린 격이다. 힘의 분출이 이렇게까지 수월할지를 몰랐기 때문이며, 상대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이런 방식은 비효율적이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힘을 쓰려면 이런 방법이 가장 낫다. 사령술이니 사기니 하는 것은 베이고르에서도 그랬지만, 제국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힘이다. 그러니 되도록 남의 눈에 띄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전투 중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며, 바로 붙어 뒤따르는 이들은 모두 그의 수족과 같은 수하들.
지금과 같은 때가 아니라면 또 언제 가능하겠는가.
"후욱."
텅 빈 것 같았던 그릇에 아주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랴!"
잠깐 동안 숨을 고르던 와중에도 그가 탄 말은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루반다이 대장의 목을 친 이후, 그의 일격을 버텨내는 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룬차이의 군대는 강군이었다. 장교들부터 병졸들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가 강했다. 군터는 계속해서 길을 열어갔지만, 그럴수록 그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늘어갔다. 그런 상처들이 좀 는다 해서 지금 당장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그가 탄 말 또한 상처를 입어간다는 것이 문제였다.
'슬슬 빠져나가야겠군.'
충분히 설쳤다. 적에게 한 방 먹여주었으면 족하다. 더 욕심을 내려면 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뼈를 묻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와아아아!
적들은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지금쯤 다른 쪽에서도 소란을 파악하고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포위가 더 두터워지기 전에 빠져나가야만 한다.
"대장님!"
살라스가 군터처럼 군기(軍氣)를 감지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군인인 만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부르는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있었다.
"적이 점점 더 몰려옵니다!"
"알고 있다!"
또 한 명의 몸을 반으로 가른 군터가 크게 외쳤다.
"빠져나간다!"
군터는 점점 좁혀오는 포위망 속에서 가장 기운이 약한 곳을 골라 길을 열었다. 포위망은 굳건했지만 한 점에 집중해 뚫고나가는 군터와 그의 병사들은 그보다도 더 강했다.
결국 힘겨운 사투 끝에, 군터와 병사들은 룬차이 군의 포위를 뚫고 셀마 성 쪽으로 달아났다. 곧바로 기병들이 그 뒤를 쫓았으나 셀마 성 부근에 이르러 성벽 위에서 날아드는 화살들 때문에 도로 말머리를 돌려야 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잠시 후. 엉망이 된 진지에 당도한 가론드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은 군데군데 불타고 있는 막사와 널브러진 시신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아니다. 전장에서 전투가 일어나는 것이야 새삼스러울 것이 있겠는가. 다만.
"고작해야 천 기 정도 아니었나."
이곳으로 말을 달려오던 중, 저 멀리 달아나는 적의 꽁무니를 보았다. 고작해야 수백 정도 밖에 안 되어 보이는 놈들을 그 몇 배나 되는 아군 기병이 쫓아가고 있었다.
전투를 치르며 수가 줄어들긴 했겠지만, 그렇다 해도 소수의 병력에 한 곳의 군영이 놀아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기껏 살렸더니, 결국은 이 꼴인가."
처참하게 망가진 진지를 걸으며 표정을 찌푸리던 가론드는 어느 시신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목 없는 시신이었다. 팔도 잘려나갔다. 제법 심한 꼴이었으나 입고 있는 갑옷 덕분에 시신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유마."
루반다이의 지휘관 유마. 오랜 세월 함께 전장을 누빈 전우가 싸늘하게 식어 누워 있었다. 시신의 몰골만 보아도 그가 마지막 순간에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누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도.
'그놈이군.'
성벽 위에서 마주쳤던 놈. 이름이 군터라 했던가. 실로 당돌한 놈이었다. 그때도 놈은 유마를 죽음의 코앞까지 몰아붙였었다. 그때는 자신이 나서서 구했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차라리 그때 내가 놈을 죽였더라면…….'
부질 없는 가정임을 안다. 이미 회군령이 내려진 상황이었다. 주군의 명을 거스르면서까지 버틸 이유가 없었다.
'빚은 내가 대신 받아주지. 편히 잠들게.'
오랜 세월 싸워온 전사가 마침내 안식을 얻었다. 기뻐할 일은 아니나, 그렇다고 슬퍼할 일 또한 아니다.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면 그뿐.
그러나 그럼에도 화가 나는 이유는, 전우를 잃어서가 아니라 전쟁에서 한 방을 먹었기 때문이다.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어이 쓰게 만드는군."
어쩐지 저 멀리 보이는 셀마 성이 조금 전보다 더 밝아진 것 같았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가론드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
"정말 해낼 줄이야……."
세레온 우슈무르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군터는 폴라릭 앤버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자신을 무시하고 나선 것이라 폴라릭 앤버의 입장에서는 군터가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는 군터에게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런 사감을 접어두고 감탄할 정도로 군터가 거둔 전공이 대단한 탓이었다.
고작 천 기의 기마를 이끌고 적진을 유린한 것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더 피부로 와 닿는 것은 군터가 가져온 전리품이었다.
"루반다이의 대장. 틀림없군."
루반다이의 가면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하지만, 군터가 가져온 수급이 쓰고 있는 투구(가면)는 그 중에서도 더 특별했다. 초전이 벌어지던 날 루반다이들을 직접 보았던 몇몇 장교들이 그 수급이 루반다이 대장의 것이 맞음을 증언했다.
물론 잡졸의 수급에다가 대장의 투구를 씌운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한들 대단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 대장의 투구를 벗겨왔다는 것만 해도 수급을 베어온 것과 다르지 않은 대단한 전공이다.
"그 수급을 장대에 꽂아 높이 걸어라. 성 안의 모든 병사들이 볼 수 있게 해라. 사령관께 위해를 가했던 적의 목을 베어왔노라고 목청껏 외쳐 모든 병사들이 알 수 있게 하라."
"옛!"
잠시 후 해가 뜨면 병사들의 사기는 한껏 올라갈 것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명령을 내리는 폴라릭 앤버의 목소리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래. 결국 해냈군. 해냈어."
"사령관께 심려를 끼쳐 송구할 따름입니다."
심려를 끼쳐? 송구하다?
폴라릭 앤버는 그 말을 들은 순간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자신을 무시하고 멋대로 날뛴 군터가 못마땅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무능한 상관과 유능한 부하라.'
흔한 이야기다. 군략을 배울 때에 몇 번이고 들으며, 나는 저런 지휘관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이 바로 그 무능한 상관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반대한 일을 밀어붙인 수하가 이렇게 결과를 가지고 돌아왔으니.
'이미 저지른 실수는 돌이킬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실수를 하지 않는 것뿐이겠지.'
"심려는 무슨. 그나저나 자네의 공을 어찌 치하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 말에 겸양하듯 살짝 고개를 숙이는 군터. 그 모습이 폴라릭 앤버의 눈에는 당당하게 빛나 보였다.
'영웅이라.'
병사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빛나고 있지 않은가.'
영웅이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저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범인이 따라가기 힘든, 그래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돌아가 쉬게. 부상도 적잖이 입은 것 같은데, 몸을 회복하는 데 최선을 다하게. 자네의 공에 대해서는, 사령관과 논의하여 다시 알려주도록 하지."
*
"되도록 길게 끌라 하셨습니다만…이렇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큼직한 손이 흙바닥을 긁었다.
깊게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세 개의 선을 그었다.
"받은 이상으로 갚아주겠습니다."
세 개의 선이 원의 중앙에서 만났다. 그 일점(一點)에 가론드는 문자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형상 하나를 새겼다.
"성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취하겠습니다."
그리고 난 후, 형상의 위에 자그마한 물체를 올려놓았다.
"그 생명."
그것은 조각이었다. 나무로 된, 그리 정교하지 않은 조각.
전체적으로 길쭉한 형태를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탑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 영(靈)까지도."
오오오오오오-
무수한 영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들을 수 있는 자들의 귀를 멀게 할 정도로 강렬한 외침. 고동. 절규.
육안으로는 감히 바라볼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대기의 거친 진동을 느끼며, 가론드는 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작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모조리 무너뜨려주마."
그의 가라앉은 두 눈이 저 멀리의 셀마 성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