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화
"군터 대장! 이게 무슨……."
낯이 익은 장교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말안장에 활과 무구를 걸던 군터는 그를 흘깃 보고는 무심히 대꾸했다.
"보면 모르나. 출전 준비 중이지."
"그러니까 하는 말이오! 대체 누구의 허락을 받고……."
"사령관의 허락을 받았지 누구의 허락을 받았겠나."
"사령관? 그럴 리가. 오늘 아침에만 해도 자중해야 한다 그리도 신신당부를 하셨건만."
알고 있다. 그 자리에는 군터도 있었으니까. 자중해야한다는 그 말이 자신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것도 잘 알았고.
"폴라릭 앤버 장군은 사령관이 아니야. 그 분은 임시지. 진짜 사령관은 따로 계시지 않나."
"뭐요? 설마……."
군터는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안장에 무구를 다 걸고 훌쩍 뛰어올랐다. 간만에 말에 오르니 감회가 다 새로울 지경이었다.
"잠깐 기다리시오! 나는 아직 전해들은 바가 없소!"
"그렇다면 사령관께 가서 여쭙고 오도록 하시게. 성문은 열어주고."
군터가 품에서 작은 종이 하나를 꺼내어 던졌다. 사령관 세레온 우슈무르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를 본 장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군터는 얼굴이 재미있게 변한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쳤다.
그와 그의 병사들이 성문을 향해 움직이는 동안 그들을 제지하는 이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조금 전 군터가 던졌던 명령서는 가짜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정말로 세레온 우슈무르에게서 허락을 얻었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혼자서 일어나기는커녕, 의식을 유지하는 것조차도 버거운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는 자신을 찾아온 군터를, 그가 하려는 말을 명확하게 인지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쓰러진 후에 어떻게 일이 흘러갔는지를 알고 있었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와중에도 어떻게든 전황을 살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군터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는 힘겹게 올린 손으로 군터의 손을 잡기도 했다. 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사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위험천만한 전장에 뛰어들겠다는 군터에게 약간의 감동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살아서…다시 보세."
"서둘러 쾌차하십시오. 폴라릭 앤버 장군보다는 장군이 더 낫더군요."
상관에 대한 지대한 불경이었으나 세레온 우슈무르는 그저 가래 끓는 목소리로 클클 웃으며 그러겠노라 답했다.
지금쯤이면 폴라릭 앤버도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누워 있는 세레온 우슈무르에게 갔을 수도 있고.
"후우."
"긴장 되느냐?"
한숨은 할렌의 것이었다. 군터는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렌은 이제껏 자신과 함께 숱한 전장을 누볐다. 그중에는 지금보다 더 위험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할렌은 담담했다. 그가 타고난 대담함은 죽음 앞에서조차 움츠려들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 출전을 앞에 두고 내쉬는 한숨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긴장……. 뭐, 긴장이라면 긴장이겠습니다."
"새삼스럽구나."
"하하. 그도 그렇지요. 대장님을 따라 사지(死地)를 주파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실은, 저도 이런 제가 낯섭니다."
"……."
"음. 그때와는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자식 놈들이 커가는 것을 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점점 마음이 쓰이더군요. 머리통이 몸뚱이만 했던 때보다도 더 말입니다. 희한하지요?"
끼기기긱-
성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럴 수도 있지."
"아무튼 그래서 말입니다. 이 목숨이라는 것에 미련이 생겼습니다. 전에는 싸우다 죽으면 어쩔 수 없었다, 였다면 지금은…살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겁쟁이가 된 것일까요?"
"아니."
군터는 즉답했다. 그는 할렌에게 답했고,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던 다른 휘하 병사들에게 답했다.
"당연한 것이다. 살고 싶은 것은 생명의 본성이지."
쿵!
성문이 열렸다. 군터는 선두로 성문을 넘었다.
"죽지 않는다. 어렵지 않은 일이지. 언제나처럼 내 뒤를 따라라. 그러면 된다."
"예. 언제나처럼 바짝 붙어 따르겠습니다."
할렌이 웃었고, 살라스가 웃었다. 그 외에 그와 함께 전장을 누볐던 경험 많은 병사들이 따라 웃었다.
두두두!
어두운 밤. 그들은 힘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성문을 넘었다.
*
천 기 기마를 이끌고 적을 치겠다고 한 것은 막다른 길에서 꺼낸 어쩔 수 없는 한 수였으나, 단지 그 뿐만은 아니었다. 폴라릭 앤버를 찾아가 강하게 주장하고, 그게 안 되자 세레온 우슈무르까지 찾아가 어떻게든 허락을 얻은 이유는 요 며칠 전부터 느껴지는 변화 때문이었다.
'역시.'
저 하늘의 눈. 저 거대한 눈에게서 느껴지는 변화였다.
겉으로 보기에 거대한 눈은 여전히 하늘을 가리고 있었고, 그 눈은 셀마 성을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군터는 느낄 수 있었다. 눈은 여전히 성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 특유의 시선이, 마치 발가벗겨져버린 것 같은…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보지 않는다.'
일전에 이천 결사대가 움직였을 때는 하늘의 눈이 반응을 했었다. 마치 거대한 산이 움직이듯, 하늘을 뒤덮은 눈이 동공을 확대하는 그 모습은 전율이 일고, 경이와 공포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반응이 없었다. 군터는 다시 한 번 확신했다.
견고한 적에게 창이라도 한 번 찔러 넣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성문을 나와 어느 정도 말을 달렸을 때 적진에서 소요가 일었다. 군중 여기저기서 불이 밝혀지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고, 그보다 먼저 움직이는 일단의 병력 또한 보였다.
아직 적진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건만, 실로 기민한 반응이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는 느리다. 저 하늘의 눈으로 미리 보았다면 지금에서야 대응을 할 리가 없다. 미리 준비를 마쳐놓고 함정을 파두던가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는 건, 저 '눈'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
'기회다. 지금 뿐이야.'
창을 고쳐 쥐었다. 깊게 들이마신 공기가 가슴을 채웠다. 어두컴컴한 들판의 모습이 대낮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그 위를 움직이고 있는 일단의 병력 또한.
적진에서도 기마가 움직이고 있었다. 수는 대략 천 가량. 반응속도를 볼 때 아마도 정예일 것이다.
'굳이 부딪칠 필요는 없다..'
꺼진 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는 불씨가 필요하고, 작은 불씨를 크게 키우기 위해서는 장작이 필요한 법.
무리할 필요는 없다. 적의 의도에 따라줄 이유도 없다.
"대장님! 전방에 적이!"
"알고 있다! 따르라!"
군터는 방향을 틀었다. 다가오는 적을 회피하며 적진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적에게 꼬리를 물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대로 적진으로 돌격한다면 자칫하면 앞뒤로 적에게 둘러싸이는 싸이게 되는 것이었지만 군터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슈슈슝!
"더 빨리!"
다급히 말을 재촉하여 지나친 땅에 화살비가 내리꽂혔다. 군터는 한 번 가속한 것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적진으로 돌입했다. 벌써 방패를 벽처럼 세우고, 틈새 사이로 가시처럼 창을 내민 적군이 전면에 대기하고 있었다.
으득!
눈이 붉게 물들었다. 오른팔이 부풀어 오르고 팔을 단단히 조이던 갑옷이 비명을 지르며 뜯어졌다.
슈욱!
군터는 창대의 끄트머리를 잡은 채, 힘껏 내질렀다. 두텁게 쌓인 방패의 벽을 찌르는 가느다란 창은 그대로 꺾여 부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하지만.
쾅!
"크악!"
화살처럼 날아간 창끝은 방패의 벽을 단번에 박살냈다. 창 역시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으나, 그에 부딪친 방패와 그 뒤의 병사들 또한 무사하지 못하고 크게 튕겨 나갔다.
결코 뚫리지 않을 것 같이 보였던 벽에 큼지막한 구멍이 생겼다. 군터는 그 구멍으로 들어서며 바로 옆에 툭 튀어나온 창 한 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으헉?!"
병사 두 명이 붙들고 있던 창이 가볍게 그의 손에 들어왔다. 평소 그가 휘두르는 것의 두 배는 됨직한 장창이었지만 군터는 손에 쥔 그 순간부터 그것을 오랫동안 사용해온 것처럼 능숙히 다뤘다.
촤악!긴 혈선이 허공에 그어졌다. 군터와 그를 태운 말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은 달렸고, 천 기의 기마가 그 뒤를 따랐다.
"막아!"
군주의 군대는 과연 용맹했다. 이제껏 겪은 전투에서는 이 정도 기세가 붙었을 때는 어려움을 겪는 일이 없었다. 흐름을 탄 기병의 돌격은 어지간해서는 막아설 수 없는 데다, 군터가 직접 선봉에서 적을 상대하면 막아서는 적을 뚫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뚫었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길이 막혔다. 좌우에서 날아드는 창칼도 상당히 매서웠다. 분명히 말을 달리고 있음에도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길 속에 갇힌 것처럼 연신 후끈했다.
낯선 경험이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별로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 눈은 진한 흥분을 띠었다.
"비켜라!"열기에 잠식된 몸을 난폭하게 움직이던 중, 날카로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은 정수리에 닿는 섬뜩함을 느낌과 동시였다.
군중(軍中)의 벽이 갑작스레 열리며 한 기의 기마가 뛰쳐나왔다.
카앙!
조금만 반응이 늦었다면 미간부터 시작해 머리가 반으로 쪼개졌을 것이나, 눈앞에서 칼을 막은 군터의 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붉은 눈은 침착하게 가라앉아 정면의 적을 보았다.
익숙한 기운에, 외관이다. 가면을 쓴 적. 며칠 전 성벽 위에서 상대했었던 자. 루반다이의 대장이라 했던가.
"흥!"
군터는 힘을 주어 상대를 밀어냈다. 거의 튕겨내듯 떨쳐내고 다시 말을 달렸다. 상대 못할 것은 없으나 지금은 한 명에게 발을 묶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나중을 기약하려는데, 상대는 그와 생각이 달랐는지 떨쳐내자마자 바로 쫓아왔다. 단 둘이었다면 따라붙지 못했겠지만, 군터는 몰려드는 적병을 상대하면서 길을 열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떨쳐냈던 상대가 다시 따라붙는 것은 금방이었다.
채채챙!순식간에 세 번. 허공에서 불똥이 튀었다.
"놓칠 것 같으냐!"
거친 목소리. 아무래도 성벽 위에서의 일이 그에게는 수치로 남은 모양이었다.
군터는 그에 대해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평정심이 흐트러진 것 같은 상대에게 한 가지 물을 것이 있었다.
"룬차이는 없는 모양이군."
눈 한 번 깜빡이는 것보다 더 짧은 한 순간이었지만, 군터는 가면 사이로 번뜩이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카앙!
창과 칼이 부딪쳤다. 성벽 위에서 사용하던 기형의 칼은 아니었다. 하긴, 마상에서 그런 무기를 사용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랬군. 그래서 반응이 느렸던 거였어."
"흥! 무슨 헛소리냐!"
"볼 일은 다 봤다."
군터의 몸에서 흐릿한 그림자가 일어섰다.
착각이었을까. 아니. 아니다.
가면 속의 눈이 부릅 뜨였다.
그것은 그림자 같기도, 연기 같기도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희끄무레한 것에서는 짙은 죽음의 냄새가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흘러나왔다고 생각한 순간 그것은 그의 몸에 닿았다.
"이제 꺼져라."
차가운 한 마디는 그 어떤 위협보다도 더 섬뜩한 선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