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우을 지워버릴 때가 되었다.]
한 마디 말로 수십만의 목숨을 앗아갈 대전(大戰)이 시작되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된다는 것 외에 중요한 것은 없었다.
[룬차이. 네게 맡기겠다.]
[명을 받들겠소이다.]
제국의 역사는 그의 손에서 쓰였다. 그는 땅에 발을 딛고 선 시간보다 말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무수한 전장을 지났고, 무수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직접 왕도(王都)를 무너뜨리고 불태운 횟수는 두 손으로도 다 헤아리지 못한다.
승리. 승리. 승리.
불패의 기록을 더해가며 제국의 신민들에게 군신이라 칭송받을 즈음. 그는 점차 전장의 열기에 무감각해져갔다.
진부하고, 또 진부하다. 하늘에 걸려 땅을 굽어보는 그의 눈에 비치는 세상이란 어느덧 하찮기만 했다.
식어가는 그에게 있어 단 한 가지 위안은 그가 피로써 쌓아온 제국의 역사뿐이었다. 저 거대한 제국의 기둥을 직접 세웠노라 자부하는 성취감.
누군가는 유치하다 말했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마저 부정하고 나면, 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
결코 감기지 않는 영(靈)의 눈이 적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것을 감지한 순간. 그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신의 눈을 떴다.
"전하."
"녀석들이 몸부림을 치는군. 맞을 준비를 하라."
룬차이는 짤막하게 명령을 내리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달과 별이 구름에 가려 흐려진 하늘. 암행을 시도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하지만, 하늘에 둔 그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
다시 한 번, 부질없는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
이천의 병력이 야음을 틈타 성문을 나선지 벌써 사흘째. 군터는 매일같이 동서남북의 성벽을 올라 적진을 살폈다. 혹시나 적진에 무언가 변화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기대라기보다는 희망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자들이, 무언가 해내주기를 바라는.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면서 군터는 그것이 헛된 희망이었음을 확인했다.
적진은 변함이 없었다. 날카롭게 갈린 기세하며, 굳건함은 첫날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뭐가 좀 보이는가?"
"장군."
폴라릭 앤버가 뒤에서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군터는 그가 부르고서야 몸을 돌려 군례를 취했다.
"부지런하군. 매일 이렇게 일찍 성벽을 오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인데."
"달리 할 일도 없습니다."
"그것도 그렇군."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저 멀리 보이는 적의 진영을 눈에 담았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그러고 있었다. 속에 쌓인 답답함이 조금이라도 가시기를 바라면서.
"성공했을까?"
"……."
"둘뿐이네. 뭐라 해도 책하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말해보게."
"실패했을 겁니다."
"…그렇군."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암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저 일상적인 말을 주고받은 것처럼, 별다를 것 없었다.
"실은, 나 또한 그리 생각하네."
"그렇습니까."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처음부터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했지.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었을 뿐."
달리 방도가 없었다. 내부의 불만은 점점 차오르는데, 그것을 해소할 방도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대로 억지로 눌렀다면 적과 최후의 일전을 치르기도 전에 내부에서 일이 터졌을지도 모른다.
군터는 그런 폴라릭 앤버의 변명, 내지 핑계에 공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다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했다. 물론 그가 폴라릭 앤버의 위치에 있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했겠지만.
"이제 바랄 수 있는 것은 올지 안 올지 모를 원군뿐이군."
"……."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는가?"
"…장군께서는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그렇지. 최선……. 고작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네. 이번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난 내가 이렇게 무력해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네. 전공을 세우고, 보다 높이 올라갈 것만을 꿈꿨지.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정말……."
중얼거리던 그가 몸을 돌렸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 그는 군터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미안하군. 총지휘관이라는 자가 수하에게 신세한탄이나 하다니."
"아닙니다."
"자네는 다른 이들과 달라. 이상하게도…일개 장교에 불과한데 어쩐지 든든하단 말이지. 말해보게 군터. 자네가 나였다면, 자네는 어찌했겠나?"
"소관이었다면…전군을 이끌고 나가 적과 일전을 치렀을 것입니다."
군터의 대답에 폴라릭 앤버는 처음으로 시원하게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전군을 이끌고 일전이라. 저 룬차이를 상대로 말이지? 하하하하."
당돌한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폴라릭 앤버는 그저 한 번 시원하게 웃고서 계단을 내려갔다. 군터는 그가 성벽을 내려가자 다시 성 밖의 적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긍정인가, 부정인가.
무엇이든 간에, 그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끝까지 간다면 결국 내릴 수 있는 결정은 한 가지 밖에 없다는 것을.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콜록콜록!"
"……."
변함없는 적진을 오래도록 응시하던 군터는, 문득 들린 기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가 선 자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병사가 보였다.
나이는 고작해야 스물이 좀 넘었을까.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에 초췌한 몰골을 한 청년 병사는 멍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서 성벽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
주변의 다른 병사들에게 시선을 돌리니, 그들 역시 저 어린 병사와 비슷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두려움. 그것마저 넘어선 체념.
'더 이상 끌면 늦는다. 아니…이미 늦어버린 건가?'
땅 밑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공포라는 이름의 불청객이 손아귀를 뻗었다. 이미 많은, 어쩌면 거의 모든 병사들이 그 불청객에게 사로잡혀버렸다.
*
"직접 칼을 뽑아들고 싸울 배짱도 없는 놈이 황좌? 가당치도 않다! 눈이 있는 자들은 볼 것이고, 귀가 있는 자들은 들을 것이다! 병사들을 전장에 몰아넣고 죽음을 강요하는 자가 자신은 안전한 후방에 숨어 매일을 술과 계집으로 보내고 있다면, 누가 그를 위해 목숨을 걸겠는가!"
에크람을 함락시킨 후. 7황자 자콥 엘 트라소프는 일갈했다. 그의 사나운 외침은 전장을 흔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 전역에 퍼졌으며, 또 얼마 후에는 판니른에까지 닿았다.
"시건방진 망나니 놈이!"
2황자 바란무르 엘 트라소프는 격노했다. 에크람이 함락당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화가 났지만, 그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벌써부터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7황자의 무용담이었다. 자신에 대한 비방, 혹은 도발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주제도 모르고 설쳐대는구나!"
자신보다 아래라고 여겼고, 오래 전부터 경시했던 상대였기에 그 분노는 더욱 진했다. 황도에 있을 때, 7황자는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도 불쾌할 정도로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런 놈이 감히 자신에게 이런 모욕을 주니,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도무지 믿을 놈이 없구나!"
일선의 지휘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믿었던 룬차이마저 변변찮은 성에 발이 묶였다. 전쟁이 시작됐을 때만 해도 단숨에 북쪽으로 치고 올라갈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황도와 남방의 건방진 놈들이 얼마나 자신을 비웃고 있을 것인가.
"안 되겠다! 내가 직접 나서야겠다! 내 손으로 그 망나니 놈의 목을 베어주리라!"
"전하. 천박한 도발일 뿐입니다. 넘어가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시끄럽다!"
그는 만류하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즉각 1만 군사를 꾸려 주도를 나섰다.
그렇게 2황자와 그의 군세가 북쪽으로 출정을 하던 날 밤.
어둠이 드리운 첨탑의 창문 밖으로, 한 마리 새가 높이 날아올랐다.
*
성벽 위에서 폴라릭 앤버와 이야기를 나누고서 닷새가 흘렀다. 그 후로도 매일같이 성벽에 오르고, 성내를 순찰한 군터는 나날이 힘이 빠지는 병사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점점 굳어져갔다.
"장군."
생각을 굳힌 군터는 즉시 지휘부로 향했다. 그리고 폴라릭 앤버와의 독대를 청했다. 그런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군터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폴라릭 앤버에게 그의 뜻을 전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무슨 말인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매일매일 아군은 약해지고 있습니다. 굶주리지 않는다고 해서, 상처입지 않았다고 해서 전력이 보존되는 것은 아닙니다. 병사들의 정신은 이미 꺾였고, 이제는 완전히 부러지려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룬차이가 의도했던 것이 이것일지도 모른다. 굶겨서 죽이는 것보다, 이렇게 정신이 꺾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그래서…어찌하란 말인가."
폴라릭 앤버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 역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포기하고 있었을 뿐.
"기병 이천…아니, 천 기만 내어주십시오. 허면 성문을 열고 나가 적과 일전을 벌이고 돌아오겠습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적의 보급선을 교란하겠다는 것보다 더 터무니없군."
"대단한 것을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허락할 수 없네."
"장군."
"두 번 말하지 않을 것이야."
"……."
"이만 물러가게."
폴라릭 앤버는 단호했다. 이제껏 본 그의 모습 중 가장 망설임이 없었다. 더 버텨봐야 언성만 높아질 것 같아, 군터는 그대로 물러났다. 하지만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대로면 가망이 없다.'
하다못해 꿈틀거리지도 못하고 밟혀 죽을 판이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살라스."
"예."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이 깨어났다고 했지."
"예. 허나 잠시였을 뿐, 곧 다시 의식을 잃으셨다 합니다."
"……."
잠시 생각에 잠겼던 군터가 나직이 말했다.
"병사들을 준비시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