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화
"판니른(제국의 주-2황자 바란무르 엘 트라소프의 본거지)에 계신 전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승전보를 받아보시기만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2황자가 보낸 사자가 고개 숙인 채 말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꽤 뚜렷하게 나왔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조그맣게 죽어 들어갔다.
툭!
포도 씨가 접시 위에 떨어졌다. 씨가 접시에 부딪칠 때마다 사자의 어깨가 조금씩 움츠려들었다.
"녀석은 여전히 판니른에 머물고 있는 모양이구나."
"예, 예. 그러하옵니다."
"앉은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하니 자꾸 오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판…이라 하심은."
"날 속이려 들 셈이냐."
"아, 아니옵니다! 제가 어찌 감히……."
"발등에 불똥이 떨어지지 않았던들, 녀석이 너를 보냈겠느냐. 나를 재촉했겠느냔 말이다."
"……."
사자가 대꾸 없이 고개를 숙이자 룬차이는 흐릿하게 웃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손은 또 다른 포도 알갱이를 잡아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저 성에 있는 병력이 얼마인 줄 아느냐?"
"그것이……."
"4만이다. 허면 내 군영에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는 줄은 아느냐?"
"전하."
"3만이다. 정확히는 3만이 조금 안 되지."
"……."
"전쟁이라는 것이 단순한 숫자놀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숫자를 무시할 수도 없지. 그렇지 않나?"
"전하."
"바란무르에게 전하거라. 내게 말을 전하려거든, 이곳으로 직접 와서 하라고 말이다."
"저, 전……."
사자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입을 떼었다. 그러나 그는 채 한 마디를 내뱉기도 전에 제지를 당했다. 대화가 이어지던 내내 묵묵히 서 있던 가론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선 것이다.
"전하께서 말씀하셨다. 네놈은 그저 지금 한 그대로,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룬차이와는 달리, 가론드는 험악한 기세로 사자를 압박했다.
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사자가 도로 고개를 숙이고 덜덜 몸을 떨었다.
툭!
포도 씨가 접시를 때리고, 가론드가 도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사자를 압박하던 거친 기세도 깨끗이 사라졌다. 질식할 것처럼 질렸던 사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숙였다.
"사자는 돌아가서 내가 한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바란무르에게 그대로 전하거라."
"예, 예. 그리하겠사옵니다."
사자가 도망치듯 자리를 나가고, 가론드가 못마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 돼지 자식이 실성을 했나 봅니다. 감히 전하께 이래라저래라 하다니요."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예?"
"내가 녀석의 뜻대로 이곳에 오지 않았더냐. 한 번 나를 제 뜻대로 움직였으니, 두 번인들 못하겠느냐 이 말이다."
"하! 제 분수도 모르는 놈이 감히……."
가론드가 바득 이를 갈며 살기를 피워 올렸다.
툭!
"녀석도 지금쯤 심사가 꽤나 불편할 것이다. 그러니 사자까지 보내 재촉을 하는 게지."
"동부의 전황이 썩 좋지 않을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흐음."
룬차이가 씩 웃으며 붉은 포도를 입으로 가져갔다.
"자콥 녀석이 보통내기는 아니거든."
"망나니로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과거의 행실이야 칭찬할 것이 없지만, 재능만은 출중했지. 어찌 보면 그 행실 때문에 재능이 가렸다고 할까."
"의외로군요."
툭!
"바란무르는 모든 면에서 자콥 녀석에게 못 미친다. 특히 군재에 있어서는…상대가 되지 않지."
"어차피 전투를 지휘하는 것은 다른 놈들이 아닙니까. 그 돼지 놈은 제 집에 처박혀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전부일 테고."
"그게 문제지. 대국(大局)의 판을 짜고 움직이는 머리가 그놈이 아니냐. 전투는 몰라도, 전쟁에서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툭!
마지막 씨를 뱉은 룬차이가 가죽 침상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전투에서도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다. 녀석은 제 아비의 피를 제법 진하게 물려받았거든."
"호오. 그정도입니까? 안타깝군요. 직접 군을 이끌고 이곳에 왔더라면 제법 좋은 구경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녀석이 나와 겨룰 이유가 없으니."
"하긴, 아무리 재주에 자신이 있다 한들 감히 전하께 대적하려 할 리 없지요."
가론드의 말에 룬차이는 가볍게 웃었다.
툭!
수북이 쌓인 씨 위로 또 하나의 씨가 올라갔다.
*
"길면 한 달입니다."
"보급을 줄여서는 아니 되오."
"하오나 장군. 지금처럼 계속 간다면 보름도 위태롭습니다."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소. 밥심이라도 없다면 우리가 어찌 적에 맞설 수 있겠는가."
초전을 치르고 난 후 벌써 엿새가 흘렀다. 금방 다시 쳐들어올 것만 같았던 적이 잠잠하게 있어주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적의 창칼이 조용하니 다른 것이 셀마 군의 숨통을 조여 왔다. 넉넉지 못한 식량 사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장군."
"'보름 밖에'가 아니네. '보름이나' 견딜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저 룬차이의 발을 그 만큼만 묶을 수 있다면, 우리가 할 일은 다 한 것이 아니겠는가."
셀마 성에 비축되어 있는 군량은 제법 많은 편이었다. 거기에 세레온 우슈무르의 원군이 가지고 온 군량 역시 넉넉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식량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은, 본래 4만에 달하는 대군이 셀마에 틀어박히게 될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쟁을 준비하며 전선이 될 성들에 미리 물자를 비축해두었으나, 그 모든 안배는 룬차이가참전하면서 어그러졌다. 느닷없는 군주의 참전은 그들의 계획에 없던, 그야말로 '느닷없는' 일이었다.
당초의 계획대로였다면 전선에 위치한 성들을 중심으로 전선을 유지하면서 기회를 틈타 밀고 내려간다는 것이 전략의 초안이었다. 그런데 룬차이가 나타나면서 그 모든 것이 틀어졌다. 순식간에 몇 개의 성을 잃고, 간신히 보존한 병력을 한 곳에 집결시켰다. 본래였다면 많아야 오천 가량이 주둔할 성에 2만에 가까운 병력이 주둔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다시 2만이 더해졌으니, 아무리 넉넉하게 물자를 준비했더라도 부족할 수밖에 없게 됐다.
"적의 생각이 바로 그것일지도 모릅니다. 만일 전투 한 번 없이 우리를 고사시키려는 것이라면, 그대로 당해줘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폴라릭 앤버는 '그렇다 한들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은 그런 대답을 바라거나,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적은 인근의 성들에서 수거한 군량에 더해 안정적인 보급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옴짝달싹 못하게 갇혀서 목이 떨어질 날만을 기다리고 있지요."
"적의 보급선을 교란하거나, 물자를 약탈해오자는 말인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런 시도를 안 해본 줄 아는가? 그대들이 당도하기 전에 이미 수차례 시도했던 일이네. 모조리 실패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애꿎은 병력만 잃었을 뿐이네."
"저희가 당도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지요."
자신들이라면 다르다는 말인가? 그 오만한 언행에 폴라릭 앤버는 순간 불쾌함을 느꼈으나, 곧 그런 감정을 억눌렀다. 그의 말에 자신을 모욕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들을 이렇게까지 하게끔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절박함이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패하는 것이 죽음보다 더 두렵기 때문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은 그보다 더 어렵습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는다면 이 난국을 어찌 풀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아……."
이들의 말이 맞다. 어쩌면 신중히 한다는 핑계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한 것은 자신일지도 모른다. 폴라릭 앤버는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기력해져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자네의 말이 옳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 죽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보는 것이 낫겠지."
"허면."
"병력은 얼마나 필요하겠나."
"많이 움직인다면 적의 눈길을 끌게되겠지요. 정병 2천이면 족합니다."
*
지휘부에서 말이 나오고,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된 은밀한 계획.
"어찌 보십니까?"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군터는 그 계획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차라리 전군을 이끌고 적을 공격한다면 모를까, 야음을 틈타 적의 눈을 피해 소수의 병력을 운용한다는 것은…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희망적게 보이지는 않았다.
"어째서입니까?"군터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즉답을 하자 살라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적이, 룬차이가 바보가 아니지 않느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정해져 있는데, 그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군터는 그의 물음에 제대로 된 답을 해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두루뭉술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저 하늘의 거대한 눈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셔서 나서지 않으신 겁니까?"
"아니. 애초에 내게는 기회조차 없었다."
이번 일은 폴라릭 앤버를 압박한 자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까지 순서가 돌아왔던들, 군터는 자신이 과연 나섰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만큼 그는 이 위험한 작전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반대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한 번의 전투로 이름값이 높아졌다 한들 홀로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또, 제대로 불이 붙은 이들을 상대로 괜히 사기를 꺾고 싶지도 않았고.
'보름인가.'
넉넉잡아 보름이라 했다. 이제 곧 높은 확률로 이천 개의 입이 줄게 될 테니 그보다 조금 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대충 그 정도가 한계라고 보면 될 것이다.
'적이 정말 우리를 고사시키려 한다면, 그 즈음에는 일전을 치르게 되겠군.'
폴라릭 앤버도 설마하니 가만히 앉아서 죽을 생각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신중론자라 하더라도 그 즈음이 되면 마지막으로 한바탕 발버둥을 쳐보려 할 터.
"그래도 오늘은 하늘에 구름이 많군요. 다행스럽게도 말입니다."
할렌의 말처럼 하늘에는 구름이 많았다. 이대로 날이 저문다면 저 구름들이 달과 별을 어느 정도 가려줄지도 모른다.
"……."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다른 잿빛하늘에는 오직 소름끼치는 거대한 눈만이 하늘을 점하고 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