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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32화 (432/1,064)

432화

셀마 성의 분위기는 좋았다. 병사들은 승전의, 생존의 기쁨을 마음껏 누렸다. 그들의 총사령관 세레온 우슈무르가 중태에 빠졌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잠깐 동안의 기쁨에 젖어있던 그들은 곧 허상에서 깨어났다. 적들은 아직 멀쩡히 성을 포위하고 있었고, 그들은 대장을 잃었다.

두려움은 병사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장교들에게서부터 퍼져나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과는 달리 장교들은 어느 정도 아는 것이 있었다. 지휘부의 분위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이 바로 장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분위기는 곧 병사들에게 미치니, 암울한 속사정에 대해서 병사들이 눈치 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군께서……."

"이제 어찌 되는 거지?"

병사들의 마음을 다잡아야 할 장교들도 우왕좌왕이었다. 세레온 우슈무르가 쓰러지면서 지휘부에도 혼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장군께서 의식을 찾지 못하고 계시니…장군께서 깨어나시기 전까지 잠시간이라도 그 공백을 메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총대장의 자리는 한 시도 비워둘 수 없다. 그렇기에 지휘부에 모인 모든 이들은 임시로라도 누군가 세레온 우슈무르의 자리를 대신하야 함에 대해 이견을 내지는 않았다. 다만, 그 누가 '누군가'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그렇지만 그것도 처음에만 그랬을 뿐. 어느 정도 회의가 진행되며 한 사람의 이름만이 남았다.

"장군. 이 버거운 중임을 맡을 수 있는 분은 장군 밖에 없습니다."

폴라릭 앤버는 눈을 감았다. 허나 계속 답을 미룰 수는 없었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방근 전의 말마따나, 지금 여기에서 이 버거운 짐을 짊어질 수 있는 것은 역시 자신뿐이었다.

"알겠소. 내게 주어진 책무를 피하지 않으리다. 부족한 몸이지만, 장군께서 깨어나실 때까지는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버텨보겠소."

그렇게 가장 급한 불은 꺼졌다. 허나 잡아야 할 불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나,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우선은…병사들의 동요를 막는 것이 급선무요."

적의 공세에 맞서 성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말하자면 승리를 거둔 것이다. 물론 그 승리가 실질적인 승리가 아니라는 것은 알 만한 자들은 다 알았지만, 어쨌거나 외관상으로는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런 승리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사기가 부러진 깃발처럼 꺾여버린 것은 총대장인 세레온 우슈무르가 쓰러졌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현명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바보도 아니다. 그들은 미묘한 분위기를 읽는 데 탁월하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쪽으로의 감각이 날카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장군께서 쓰러지신 것을 이제와 숨길 수는 없다. 그러니 장군께서 일선에서 적들과 얼마나 용맹하게 싸우셨는지를 널리 알리도록 하고……."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병사들에게는 지나간 용기가 아니라 현재의 희망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희망의 불씨는 딱히 의도하지 않아도 벌써 타오르고 있었다.

"병사들이 자네의 이름을 부르고 있네."

"사실이 아닙니다."

군터의 대답에 폴라릭 앤버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고 아니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병사들이 그렇게 믿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그리고…완전히 틀린 이야기도 아니지 않은가? 자네가 그때 그곳에 있었고, 장군의 목숨을 구한 것은 사실이지."

전투가 벌어지던 남쪽 성벽에서의 일은 입소문이 퍼진 덕에 이제 셀마의 모든 병사들이 다 알고 있었다. 속절없이 밀리던 전장에 세레온 우슈무르가 그의 친위대와 함께 뛰어든 순간부터 그가 루반다이 대장의 칼에 쓰러진 것. 그리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천부장 군터가 적을 막아서서 세레온 우슈무르의 목숨을 구한 것. 그리고 루반다이 대장을 패퇴시키고 뒤늦게 당도한 녹포 장군 가론드를 물러나게 한 것까지.

사실을 토대로 한 이야기는 몇 사람의 입을 건너며 살에 살이 붙어 이제는 당사자가 낯 뜨거워질 수준으로 부풀어 올라 병사들의 위안거리로 쓰이고 있었다.

그렇다. 위안거리다. 다른 말로는 희망.

"자네는 이미 병사들의 영웅이고, 셀마의 영웅이야."

"당치도 않습니다."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받아들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네. 말했듯, 병사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병사들이 자네를 보며 용기를 얻는다면, 자네는 그들의 영웅이 되어야 해."

"……."

"그런 면에서 볼 때, 천부장이라는 지위는 너무 낮아. 어차피 자네가 세운 공도 있고 하니까…내 재량으로 자네의 지위를 좀 올려준다 해도 문제 될 것은 없겠지."

"괜찮겠습니까."

공을 인정받는 것을 싫어하는 이는 없다. 군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제 고작 전투 한 번을 치렀을 뿐이며, 이렇게 빠른 승진은 다른 이들의 질시를 살 수 있다. 군터는 그런 것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총대장이라고 해도 임시에 불과한 폴라릭 앤버에게는 그것이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말했지만, 문제 될 것은 없네. 둘 뿐이니 하는 말이지만, 어차피 나 역시 떠밀려서 이 자리를 맡았어. 그런 상황이네. 중임을 맡는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뜻이고, 위험해진다는 것이지."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적을 앞둔 장수가 할 말이나, 보일 기색은 아니었지만 군터는 그를 속으로라도 비난하지 않았다. 그는 흔들리는 와중에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어쩌면 그마저도 넘어서서 끝끝내 피하지 않고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대에게 이천의 병사를 맡기겠다. 자네가 기병을 이끌고 있는 것은 알지만, 아마도 앞으로의 전투에서 말을 타고 활약할 기회는 없을 것이야."

"이해했습니다."

"쉽지 않을 걸세. 어쩌면 자네가 지게 될 짐이 내가 진 짐보다 더 클지도 몰라. 솔직히 고작해야 천부…아니, 이제는 아니군. 어쨌든 일개 장교에게 이렇게까지 기대야 하는 것이 한심스럽지만, 나로서는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군."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다면 잡는다. 아마도 그런 마음일 것이다.

한 개 성과 4만 병사의 목숨을 책임진 사내의 모습은 피폐해 보였다. 하지만 결코 초라하지는 않았다. 군터는 물러나라는 명령을 듣고 나서며, 그에게 깍듯이 군례를 취해 보였다.

*

"느껴지십니까? 딱 하루 만에 개눈깔들이 싹 사라졌습니다."

할렌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보통 할렌이 이럴 때면 살라스가 나서서 말리곤 했었는데 이번엔 그런 것도 없었다. 살라스 역시 할렌과 비슷한 마음이었다는 뜻이리라.

군터 역시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솔직히, 그 또한 부하라는 놈들의 의심 섞인 눈초리가 유쾌하지는 않았었으니까 말이다.

"분위기는 어떠냐."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주 좋습니다. 눈치도 설설 보고 말이지요."

"병사들은?"

"병사들은 더합니다. 모두가 대장님께서 지휘관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 할 겁니다."

세레온 우슈무르를 구했다. 군주 룬차이의 이름과 함께 회자되는 루반다이들을, 실상이야 어쨌든 격퇴했다. 살이 붙고 붙어 말도 안 되게 과장 된 그 광경을 직접 본 병사들이 적지 않았으니 병사들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리 없었다.

"할렌의 말대로 병사들의 분위기는 아주 좋습니다. 이럴 때 대장님께서 직접 병사들을 위무하신다면 사기는 더더욱 올라갈 겁니다."

"음."

약간의 발품을 팔아서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군터는 살라스의 권유대로 직접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새롭게 그의 휘하에 배속된 병사들도 함께 둘러보고, 장교들과도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봐야 앞으로 잘 따라주길 바란다는 형식적인 이야기에 불과했지만, 그것도 꽤 효과가 좋은 듯했다. 그를 처음 본 장교들 역시 병사들과 비슷한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영웅…이라.'

낯 간지럽다 못해 부담스럽기까지 한 눈빛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폴라릭 앤버가 했던 말이 새삼 떠올랐다.

'책무.'

들뜰 필요는 없다. 이것은 아주 무거운 짐이다. 보기 좋은 허울에 취해서 웃고 있을 여유는 없는 것이다.

"……."

장교들과의 면담을 마친 후. 군터는 그의 숙소를 나와 하늘을 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멍하니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밝은 별과 달이 떠 있어 아름다웠다. 하지만 신경을 집중하자 점점이 깔려 있던 빛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무미건조한 회색빛 하늘을 가리고 있는 거대한 눈만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피할 수 없다.'

거대한 눈은 셀마 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성에 있는 그 어떤 무엇도 저 시선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나는 지금 사선(死線)에 서 있는 것이다.'

한 번의 죽음을 겪고 새롭게 일어난 후. 단 한 번도 위기를 느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군터는 저 거대한 눈을 보면서 소름이 돋을 정도의 위협을 느꼈다.

성을 굽어보는 눈길은 그에게도 닿았다. 군터는 저 눈의 주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군터는 애써 담담함을 유지했다. 그는 하늘에 떠 있는 눈과 시선을 마주하는 대신에 창과 칼의 날을 갈았다.

*

"전하! 아니되옵니다!"

"전하! 부디 다시 한 번……."

절박한 외침이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 어떠한 간곡한 부르짖음도 그의 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전하!"

안 되겠다 싶었는지, 목소리만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몇몇 이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개중에는 대뜸 무릎부터 꿇고 보는 이들도 있었다.

"비켜라!"

그런 필사적인 노력에도 7황자, 자콥 엘 트라소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들고 있던 투구를 쓰고, 허리춤의 검을 검집 채 손에 쥐었다.

"참을 만큼 참았다! 장난은 여기까지다! 겁쟁이 놈이 제 집구석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겠다면, 내 이 손으로 직접 끌어내주겠다."

그날.

10만의 7황자군이 난공불락이라던 에크람 요새를 함락시켰다. 7황자 자콥 엘 트라소프가 직접 성벽을 넘었으며, 수십이 넘는 적을 베고 요새 지휘관의 수급을 취했다.

에크람을 포위한지 꼬박 엿새째가 되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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