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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31화 (431/1,064)

431화

'그새 틀었군.'

주먹에 느껴지는 감각이 가벼웠다. 마지막 순간에 고개를 튼 것이다. 제대로 찌른 기습이었는데도 반응을 했다는 건 상대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뜻한다.

"참 절묘한 순간에 훼방을 놓는군."

뭐…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거칠게 풀어져 나오는 섬뜩한 살기만 보아도 상대가 호락호락한 자가 아님은 알 수 있었지만 말이다.

"으…크으으……."

세레온 우슈무르가 끓는 것 같은 신음을 냈다. 그의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가슴팍에 박힌 칼 한 자루 때문에 그렇게 다 죽어간다는 것이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만 저 기괴하게 생긴 칼에서 알 수 없는 꺼림칙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과 무언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장군을 모셔라."

"예, 옛!"

군터의 말에 친위대의 병사들이 조심스럽게 세레온 우슈무르를 부축했다.

"곱게 보내줄 것 같은가."

가면을 쓴 적이 달려들었다. 그 움직임이 실로 쾌속하여 눈으로 쫓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를 보고 있던 이들의 눈에는 그저 빛이 번쩍 거리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직 군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카앙!

낫처럼 생긴 칼이 창날에 튕겨 나갔다.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던 빛도 덩달아 뒤로 밀려났다.

'빠르고, 강하다.'

거기에 더해 움직임은 은밀한 구석이 있었다. 전사의 방식보다는 암살자의 방식에 더 가까운 움직임이다.

'안 좋은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가 나는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저 움직임도, 단 두 번 부딪쳤을 뿐인데 벌써부터 날이 상한 자신의 창도.

'저 칼. 뭔가 있다.'

칸젤에 비할 수는 없지만, 지금 그가 쓰고 있는 창도 썩 괜찮은 것이었다. 명품이라 할 수는 없으나 어디에 내놔도 처지지 않는 상품(上品)이다. 두 번 부딪쳤다고 해서 날이 나갈 정도는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도 날이 상했다는 것은, 적이 휘두르는 저 칼이 예사물건이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되도록 피하고, 흘리는 것이 좋겠군.'

여력을 둘 수 없는 강적을 상대로 한다면 이런 생각은 사치일 것이다. 허나 처음 세레온 우슈무르를 향하던 칼날을 걷어내고, 방금 한 번 더 부딪치면서 군터는 확신했다.

"대장의 목을 노린 대가는 크다."

눈앞의 적은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저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자만하고 있는 것인가 자문해 보았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오만한 놈이군."

적은 신중했다. 혹 자신이 느낀 것처럼, 적 역시도 무언가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군터는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동시에 창을 쭉 뻗으며 적의 목을 노렸다.

휘익!

흔하디흔한 철성은 없었다.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이 그들의 싸움에서 나는 전부였다. 셀마의 병사들도, 루반다이들도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잔상만이 휘몰아치는 싸움터에서 멀찍이 물러났다.

부웅!

또 한 번, 아슬아슬하게 창끝이 투구의 뿔 위를 베었다.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마자 군터는 몸을 돌리며 창을 잡아당겼다. 어느새 쭉 뻗어온 칼날이 눈앞을 지나가고, 군터의 발끝이 상대의 옆머리를 후려쳤다.

'얕아.'

발이 투구를 차기 직전에 손을 끼워 넣어 받아냈다. 그러나 얕았다 뿐이지 느낌은 있었다. 역시나 나가떨어진 상대가 몸을 일으키며 살짝 휘청거리는 것이 보였다. 군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달려들었다.

"크윽!"

한 번 승기를 잡은 군터는 거칠게 밀어붙였고, 상대는 이제 반격도 하지 못한 채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콰직!

창대 끝이 정강리를 후려치자 상대의 무릎이 꺾였다. 창대도 박살이 났지만, 부러진 창이라도 창날은 멀쩡했다. 군터는 단창이 되어버린 것을 그대로 찔렀다. 가면 아래 살짝 드러난 목을 향해서였다.

퍼억!그러나 창극이 목을 찌르기 직전. 갑작스레 날아든 검은 형체에 군터는 내지르던 창을 회수하여 그것을 쳐냈다. 콰직! 소리와 함께 튀는 희고 붉은 액체를 맞으며, 군터는 그것이 수급임을 알았다.

"위험했군. 아슬아슬했어."

"……."

수급을 날려 보낸 자.

거한이었다. 키도 그렇고, 덩치도 컸다. 군터는 이제껏 저렇게 큰 자를 본 적이 없었다.

치장이 된 갑옷은 화려했으나 실속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바람을 맞아 펄럭이는 은은한 녹색 망토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외관도 외관이지만, 군터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그가 발하는 기운이었다. 거대한 바위, 혹은 산 같은 위압감. 그의 덩치와 어울리는 인상적인 기세였다.

"녹포?"

군터가 휘날리는 망토를 보고 바로 알아차린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아그니스 체스퍼와 함께 하며 그의 흑포를 수 없이 봤었고, 당장 이번에도 세레온 우슈무르가 애지중지하던 그의 적포를 봤었다. 그런 그가 거한의 어깨와 등 뒤로 휘날리는 녹포를 보며 떠올릴 것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장군."

"유마. 물러나게."

"아니. 세레온 우슈무르는 놓쳤지만, 이놈만은 제가……."

"전하의 명이네. 오늘은 여기까지야."

"……."

무릎 꿇었던 자. 유마라는 이름의 가면 쓴 적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가 '전하'라는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얌전히, 거한이 말한 것처럼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가면의 눈구멍에서는 섬뜩한 살기가 뻗어 나왔고, 당연히 그 시선이 향하는 대상은 군터였다.

"내가 당신을 그냥 보내줘야 할 까닭은?"

그러나 군터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거한에게 쏠려 있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 후로, 그의 존재감은 남쪽 성벽을 통째로 지배하고 있었다. 적어도 군터는 그렇게 느꼈다.

"보내준다?"

군터의 말에 거한이 피식 웃었다. 딱히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그는 그것을 도발로 받아들인 듯했다. 묵직한 투기가 군터를 압박해왔다.

"내 목을 가져갈 자신은 있나?"

"물론."

군터도 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투기가 서로 얽혀 부딪치니, 그들의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안색이 창백해져 뒷걸음질 치기 바빴다.

둥! 둥! 둥!

두 사람이 금방이라도 부딪칠 것 같던 그때. 성 밖 멀리서 북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들은 거한이 기운을 거두며 입매를 비틀었다.

"안타깝군. 세상모르는 애송이에게 가르침을 주려 했거늘."

"그대의 목이 잘렸을 거다."

"흥! 그 부러진 창으로 말인가?"

직접 무기를 부딪치지도 않고 짧게 기 싸움을 벌였을 뿐이나,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서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그들은 무인으로서의 호승심보다는 군인으로서 현 상황에 순응해야 함을 알았다. 거한은 회군령에 따라야 했고, 군터는 총사령관이 중상을 입어 지휘체계가 흔들리고 있는 시점에서 무리하게 싸움을 끄는 것이 좋지 않음을 인지했다.

서로가 납득했고, 그리하여 그들은 조용히 무기를 거뒀다.

"가론드라 한다."

"군터요."

"기다리고 있거라. 이후에 보게 되면 그 목을 거둬주마."

"그 날이 당신의 마지막 날이 되겠군."

"흐흐. 좋군. 나는 네놈 같이 건방진 놈들이 좋다. 너 같은 놈들일수록 마지막 순간에 가장 큰 비명을 지르곤 하니까."

살기가 뚝뚝 묻어나는 흉측한 웃음을 보며, 군터는 이 가론드라는 거한에 대해 좀 알 것 같았다. 이전에도 이런 이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호전적인 것을 넘어, 일종의 광증에 가까운 살욕(殺慾)을 가지고 있는 이들. 이런 이들이 평범한 삶을 산다면 범죄자가 될 것이나, 전장에 들어선다면 용맹한 군인이 된다. 전장에서 이런 이들의 기질은 큰 힘이 되는 법이니.

그러나 그런 기질을 가진 자가 녹포 장군씩이나 되는 위치에 올랐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욕구를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그런 자리에…….

'아. 그렇군.'

비릿한 웃음 뒤에 보이는 칼 한자루를 보며, 군터는 알아차렸다.

가론드라는 사내는 단순히 살욕에 물든 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줄 아는 자였다. 자신의 기질을 필요할 때 마음대로 꺼내놓을 수 있는 자.

'영리한 맹수.'

군터는 가론드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그는 매우 위험한 자였다. 그의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와는 상관없이, 그라는 사람 자체부터가 얕볼 수 없다.

"물러난다!"

그가 병사들을 지휘하여 물러날 때까지, 셀마 군은 제대로 된 공격도 하지 못했다. 적군은 몰려올 때 그랬듯, 물러날 때도 정예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흔히 퇴각하는 적을 추격할 때 가장 쉽게 전과를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적군은 물러나면서도 날카로운 창을 놓지 않았다. 섣불리 추격을 하거나 그들의 꼬리를 무는 순간, 그 날카로운 창이 날아들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추격이나 공격을 명할 지휘관이 없었다. 현장에서 그것이 가능했던 유일한 지휘관은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이송됐고, 성내 지휘부에서 반응하기에는 물러나는 적의 움직임이 너무도 신속했다.

"이, 이겼다!"

"적이 물러난다!"

속사정을 모르는 병사들은 매섭게 공격을 가하던 적군이 물러나고 있었기에 승리를 외치며 기뻐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사정을 아는 자들은 밝은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군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

"그대로 밀어붙여도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습니다만……."

가론드가 아쉬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스럽게 조용조용히 중얼거리는 투였다. 그가 할 수 있는 나름 최대한의 의사표현이었다.

"그랬겠지."

어렵게 한 말에 룬차이가 긍정하자 가론드가 자신감을 얻었는지 조금 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전하께서 내리신 결정에 토를 달 마음은 없습니다만, 어리석은 소관을 깨우쳐주신다면……."

"첫째. 그대로 밀어붙였다 해도 그리 쉽게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을 거다. 꽤나 피해를 입었겠지."

"……."

"둘째. 셀마까지 함락시킨다면 자콥 녀석이 너무 불리해진다."

"예?"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가론드가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기존에 셀마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에 막 당도한 원군을 합하면 대략 4만 가량이다. 사주를 손에 쥐고 있다 해도 그 정도 병력을 잃는다면 큰 손해지. 그리 되면 균형이 깨진다."

"그 말씀은……."

"말했지 않느냐."

룬차이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이제 막 중천에 걸린 해가 땅 위로 따스함을 전했다.

"이 전쟁은 내 전쟁이 아니니라."

주름진 입가에 흐릿한 웃음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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