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화
푸욱!
무수한 병력이 맞부딪치는 전장에서, 루반다이들은 그 무수함 속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으나 그럼에도 그들은 눈에 띄었다. 온통 한 가지 색으로 물든 전장에서 그들이 발하는 색은 홀로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루반다이들은 군인이며, 전사였으나 동시에 암살자였다. 적과 부딪친다기보다는 스며드는 듯한 그들의 전투 방식은 성벽 위에서 벌어지는 난전에서 빛을 발했다. 그들은 날렵했고, 강했다. 그들이 양 손에 쥔 짧은 기형의 칼은 그들의 전투 방식에 최적화 되어 있었다.
“막아!”
“뭉쳐라! 놈들이 파고들지 못하게 해!”그런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루반다이들이 셀마 군 병사들의 틈에 충분히 파고든 뒤였다.
“아아악!”
루반다이들이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남벽의 전세는 확연하게 기울고 있었다. 이제는 성벽 위에 올라 있는 병력의 삼분의 일 가량은 룬차이의 병사들이었다. 수의 이점마저 상당수 잃어버린 셀마 군은 그야말로 속절없이 밀려났다.
“물러서지 마라!”
세레온 우슈무르가 남쪽 성벽에 당도한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 그는 직접 칼을 빼들고 적병에게 달려들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터엉!
세레온 우슈무르는 방패를 앞세우고 달려들던 적병을 걷어차 날려버리고, 연달아 칼을 휘둘러 빈틈을 노려오던 적병의 목을 잘랐다.
“꺼져라! 너희는 내 상대가 못 된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지휘관이었으나 한 사람의 무인이기도 했다. 그는 고관이 된 후로도 일신의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솜씨에 대해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자부심은 결코 오만이 아니었다. 한창 때의 그는 칼 한 자루만으로 스물에 가까운 적을 벤 적도 있었고, 지금도 그때의 실력은 크게 녹슬지 않았다.
“루반다이건 뭐건, 결국 칼 맞으면 죽는 사람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성벽 위에 기어 올라온 놈들을 모조리 몰아내자!”와아아아!
세레온 우슈무르의 일갈은 병사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 뒤에 숨어 목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앞에서 칼에 피를 묻히고 하는 말이라서 그의 외침에는 더욱 힘이 있었다.
두려움을 접고 용기를 얻은 병사들이 기세를 올렸다. 일방적으로 기울어 가던 전세가 다시 팽팽하게 바뀌었다.
서걱!
세레온 유수무르는 여전히 선두에서 적과 부딪치고 있었다. 그의 주변은 친위대 병사들이 철저히 지켰기에 그는 정면의 적만 상대하면 되었다.
카앙!
눈에 보이는 모든 적을 거침없이 베어나가던 세레온 우슈무르가 손아귀의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기형의 칼 두 자루가 그의 칼을 막아서고 있었다. 힘주어 밀어내려 했지만 두 자루 칼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너 이놈…….”
“지휘관이 전투의 최전선까지 행차하다니.”구멍 뚫린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입은 우는지 웃는지 모르는 형태로 벌려져 있다. 금속으로 된 하얀 가면. 두 개의 뿔이 난 투구와 일체형으로 붙어 이어지는, 흔치 않은 모양이다.
“경솔하군.”
가면에 가려 표정은 보이지 않으나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명백히 조소하고 있었다.
“장군의 행사를 어찌 잡졸 따위가 헤아리겠느냐.”상대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안 세레온 우슈무르는 애써 상대를 밀어내려 하는 대신에 자신이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카앙!그러나 상대는 그런 그의 움직임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즉시 따라붙으며 연달아 두 개의 칼을 휘둘렀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반격 한 번 하지 못하고 수세에 몰려 연신 뒷걸음질을 쳤다. 그에 주변에 있던 친위대 병사들이 그를 돕기 위해 달려왔다.
“조심해라! 보통 놈이 아니다!”세레온 우슈무르의 경고는 늦은 감이 있었다. 이미 상대는 친위대 병사 두 명의 목을 치고 있었다. 춤을 추는 것 같은 몸놀림으로 병사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그는 전열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둘러싸서 상대하려 해도 그의 뒤를 받치는 또 다른 루반다이들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잘못 보셨군.”그 즈음. 세레온 우슈무르는 상대가 평범한 루반다이가 아님을 깨달았다. 루반다이들이 그의 주변으로 호위하듯 몰려드는 것을 보며 말이다.
“뭐라?”
“장군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잡졸도 아니오.”
“…그래. 그런 것 같군. 네놈은 뭐냐. 루반다이의 대장이더냐?”
“곧 죽을 사람이 알 필요 있겠소?”
“말을 잘못한 것이 아닌가? 곧 죽을 놈에 대해 알 필요가 없는 거겠지.”
“음?”
그 말에 루반다이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팽팽하던 전황은 어느새 셀마 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루반다이들이 세레온 우슈무르와 그의 친위대를 상대하기 위해 빠지자 원래부터 수가 많았던 셀마 군이 기세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흠.”
그가 다시 세레온 우슈무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의도한 거요?”
“전투에서 대장의 목을 노리는 것은 당연하지.”
“당연한 것을 예측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그거군.”
“기대했던 것보다는 잔챙이라서 아쉽지만…루반다이 대장의 목이라면 나쁘지는 않지.”
“자신만만하시군. 그 허수아비들을 믿는 건가?”
“허수아비인지 아닌지는 네 목이 떨어질 즈음 알게 될 것이다.”
“반대겠지. 이제 곧 그대의 목이 떨어지면, 그 녀석들이 허수아비였음을 알게 될 거외다.”
루반다이들이 쓴 가면의 눈구멍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일제히 안광을 뿌리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주시하고 있었음에도 곧바로 반응할 수 없을 만큼 쾌속한 움직임이었다.
“크아악!”
눈에서 흘러나온 광채는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과 투구로 옮겨갔다. 선을 그리듯 옮겨간 빛은 그들이 몸을 날릴 때마다 잔상으로 남아 허공에 선을 그렸다.
‘술법! 각인인가?’
세레온 우슈무르는 그들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한 순간에 더 빨라지고, 강해졌다.
“어깨를 맞대라! 틈을 주지 마!”
“자기 걱정이나 하시오!”
채앵!
세레온 우슈무르는 사각에서 날아온 칼을 가까스로 막아내고서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단 일합을 받아냈을 뿐이건만 숨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이 몸을 뒤흔들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그와 상대하던 그 동일인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분명 조금 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몸이 발하는 힘은 차원이 다르다.
‘어지간히도 강력한 술법인 모양이군.’
하기야 루반다이의 대장이나 되는 자가 아닌가. 그 정도 지위라면 군주 룬차이의 심복이라 할 만하니, 각인을 받아도 평범한 것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만큼 강한 능력이라면, 그 반동도 강하기 마련.’
그는 제국의 무장이다. 그것도 황제로부터 직접 서임을 받은 위장이다. 당연히 그 역시 각인을 비롯하여 무장들이 사용하는 각종 술법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런 부류의 술법들이 종류도 다양하고 시술을 하는 술사들에 따라 또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런 다양한 종류의 술법들은 모두 예외 없이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강한 힘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어떤 형식으로든지 간에 말이다.
‘원기(元氣)를 담보로 하는 건가?’
각인한 술법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기가 필요한데, 그 기를 조달하기 가장 쉬운 곳이 바로 사용자의 신체다. 때문에 달리 체력이라고도 부르는 원기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그렇기에 루반다이들의 힘 역시도 아마 그럴 것이다.
‘버티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으나, 세레온 우슈무르는 자신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안일한 것이었는지 곧바로 깨달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베어오는 칼날을 보면서 말이다.
카앙!
“우웃!”
칼을 쥔 팔이 튕겨나갔다. 훤히 열린 가슴에 또 하나의 칼날이 내리꽂혔다.
그 순간. 세레온 우슈무르는 그의 몸에 새겨진 힘을 일깨웠다.
우득!
‘어쩔 수 없다.’
최대한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각인의 힘이라는 것은 단기결전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무기지만, 긴 전투에서는 체력을 갉아먹는 애물단지에 불과하기에. 전투의 시작부터 끝까지 정신을 날카롭게 유지해야 하는 지휘관으로서는 체력을 뭉텅이로 날려버리는 힘을 사용하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당장 눈앞에 닥친 난관부터 돌파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드드득!
몸의 구조가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의 몸이지만 왠지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은 감각. 이런 이질감도 그가 이 각인의 힘을 사용하기 꺼려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런 기호와는 별개로, 이 각인의 힘은 탁월하다. 그 어떤 칼날도 이 힘을 뚫어내지는 못했…….
푸욱!
“크…허억!”
세레온 우슈무르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피가 흐르는 입을 쩍 벌리고 그의 몸에 칼을 박은 사내를 보았다.
그렇다. 튕겨나갈 것이라고 확신했던 적의 칼날은, 갑옷과 그의 피부를 뚫고 그의 몸 안에 파고들었다. 그것도 너무나 수월하게.
가면 사이로 조소 섞인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요철(妖鐵)이라고 하지. 들어는 보셨소?”
“크…으으…….”
“그대 같은 무장들은 상대하기가 쉬워. 다들 생각하는 게 뻔하거든. 비장의 수라고 하는 것들이 다 비슷비슷하단 말이지.”
그가 손목을 슬쩍 돌렸다. 파고든 칼날이 덩달아 옆으로 돌아가자 세레온 우슈무르는 눈을 까뒤집었다.
고작해야 몸에 박힌 쇠붙이 하나에 굴복할 그가 아니었지만, 루반다이 대장의 칼은 뭔가 달랐다. 그의 칼이 일으키는 고통은, 마치 몸속의 모든 급소를 동시에 찌르는 듯했다. 그야말로 항거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위장이니 뭐니 해봐야 결국 제 세상에 갇힌 얼간이에 불과하지. 그러니 너무 억울해 할 것 없소. 잘 가시오.”
그가 또 하나의 칼을 휘둘렀다. 무릎 꿇은 세레온 우슈무르의 목을 향해서였다.
크게 휜 칼날이 반쯤 떨어졌을 때.
콰앙!날아든 창이 칼날을 튕겨내고.
콰직!
거무튀튀한 주먹이 가면을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