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군터는 대동한 수하 장교들에게 무리하지 말라 했지만, 정작 자신은 칼을 빼들고 전투에 뛰어들었다. 아니, 뛰어들었다기보다는 그가 있는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기어이 성벽에다 사다리를 건 적군이 성벽 위로 들이닥쳤고, 군터는 눈앞에 나타난 적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번 칼을 빼드니 계속에서 칼날에 피가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죽여!”
“밀어버려라!”
적은 강했다. 과연 군주의 군대라는 것인지, 병졸 하나하나의 기세부터 남달랐다. 처음 성벽 위로 올라온 적병은 수십 배의 아군과 맞닥뜨렸음에도 몸뚱이에 창날이 박힐 때까지 전의를 꺼뜨리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병사 하나만이 아니었다. 성벽을 올라오는 모든 적병들이 그러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모든 병사들이 이런 독기를 품을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촤악!
하지만 놀라운 것은 놀라운 것이고 전투는 전투. 군터는 그의 사정권에 들어오는 적을 가차 없이 베어 넘겼다. 성벽 위의 협소한 공간은 그에게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칠게 살기를 뿜어대는 그의 주변에는 아군 병사들이 얼씬거리지 않았다. 적과 뒤엉켜 있던 아군 병사의 몸이 적병과 함께 두 동강이 난 뒤부터였을 것이다.
“대장님! 이제 그만 물러나심이 어떻겠습니까!”
할렌이 외쳤다.
“이 이상 있다가는 발을 빼기 힘들 정도로 말려들게 될 겁니다!”
성벽으로 올라오는 적병의 수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성벽 위의 전황은 이제 완전한 혼전 상태로 접어 들어갔다.
“…….”
군터는 또 한 명의 적병을 찌르고, 걷어차 성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전황을 살폈다.
확실히 적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군터는 이러한 강군(强軍)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 맞서는 아군의 병사들도 마냥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기존 셀마 성의 병사들이야 단지 죽기 싫어서 악에 받쳐 싸우는 느낌이었지만, 세레온 우슈무르가 이끌고 온 병사들은 달랐다. 그들은 두려움에 먹히지 않았다. 제대로 된 정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록 병력의 질 자체는 룬차이의 군대에 비해 떨어질지언정, 성벽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가며 적들에 맞서 싸웠다. 물론 거기에는 세레온 우슈무르 휘하 장교들의 활약도 컸다.
‘이 정도면… 쉽게 밀리지는 않는다.’
어려운 싸움이지만 그리 비관적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의 전황만 놓고 본다면 말이다.
“물러난다.”
있지 않아도 될 자리에서 굳이 버틴 것은 적을 한 번 직접 겪기 위해서였다. 이제 충분히 알았으니 발을 뺄 때가 되었다. 전투는 이제 막 시작됐고, 기운을 빼기에는 너무 이르다.
“…….”
성벽을 내려가기 전. 군터는 슬쩍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의 눈에 비치는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은 괴이한 하늘에, 움직이는 것은 거대한 눈의 형체뿐이었다.
* * *
“저항이 제법 매섭군요.”
수하의 말에 룬차이는 피식 웃었다.
“네 눈에도 보이느냐?”
룬차이는 그의 천안으로 셀마 성 전역을 보고 있었다. 고함치는 이들과, 피 흘리며 죽어가는 자들, 모든 것이 그의 눈에는 보였다. 그러니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수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 텐데도 다 안다는 듯 말한다.
“보지 못해도 알 수 있습니다. 느낄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 너 또한 전장에서 잔뼈가 굵었지.”
이번에는 거한, 가론드가 씩 웃었다. 은은한 녹색의 기품 있는 망토가 바람에 펄럭였다.
“시작하시렵니까?”
“네 놈이 이제는 내 용병까지 꿰뚫는구나.”
“제가 전하를 곁에서 모신 세월이 수십 년입니다. 이 정도 눈치는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가론드의 너스레에 룬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슬슬 시작해야겠다.”
본래는 조금 더 끌 생각이었으나 생각보다 적의 저항이 완강하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병력의 피해가 커질 테고, 그것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고작 이런 곳에서 소모하기 위해 조련한 병사들이 아니었으니까.
“루반다이를 투입해라.”
“예.”
룬차이의 명령이 떨어지고, 잠잠하던 군영에서 일단의 병력이 진지를 벗어났다. 말을 타지 않고 전신을 가리는 갑옷을 입었음에도 그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셀마 성에 접근해 들어갔다. 그들이 사다리를 타고 성벽에 올라설 때까지, 그런 그들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자는 없었다.
푸욱!
가장 먼저 그들을 발견한 병사가 미처 소리치기도 전에 그의 목이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갔다. 날이 초승달처럼 휜, 얼핏 보면 낫처럼 생긴 기형적인 칼은 두꺼운 목뼈를 간단히 끊어놓았다.
“뭐, 뭐야!”
성벽 위로 올라서기 시작한 ‘그들’을 본 병사들이 몸을 떨었다. ‘그들’이 풍기는 서늘한 기운도 기운이었으나, 그보다는 그들의 외관부터가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거무튀튀한 전신 갑옷은 일반적인 갑옷과 달리 몸에 착 달라붙은 듯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기괴하게 생긴 두 자루 칼은 일반적인 칼에 비해 그 길이가 반 정도에 불과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괴상한 모습이건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들의 투구. 얼굴을 가리는 가면이 달린 투구에는 두 개의 뿔이 솟아 있었다. 이렇듯 기괴한 모습에다 왠지 모를 서늘한 기운까지 더해지니 그들은 그야말로 괴물처럼 보였다.
“겁먹지 마라! 차림새만 요란한 광대들에 불과하다!”
동요하는 병사들을 장교들이 진정시켰다. 아니, 그러려 했다.
장교들이 목소리를 내기가 무섭게, ‘그들’이 달려들었다. 막아서는 병사들이 보이지 않는지, 그들은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갔다. 당황한 병사들이 내지른 창칼은 그들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번들거리는 그들의 갑옷은 대부분의 공격을 막아냈고, 그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커억!”
그리 무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하나, 그래도 전신갑옷이었다. 그런 것을 입고서도 그들은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처럼 날렵하게 움직였다. 개중에는 아예 높게 뛰어올라, 가로막는 병사들의 어깨를 밟고 파고드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의 칼날에 장교들은 쓰러져갔다.
그들은 마치 암살자 같았다. 동시에 뛰어난 무인이기도 했다. 그들은 목표로 한 장교들을 해치운 뒤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적에게 칼을 휘둘렀다. 너덧 명의 병사가 그들 하나를 당해내지 못했고, 그들이 뭉치면 몇 배의 병력도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와아아아아!
루반다이다!
정체 모를 사신(死神)들에 셀마 군은 위축되었고, 룬차이의 병사들은 용기백배했다. 그들은 ‘루반다이’를 외치며 더욱 맹렬히 싸우기 시작했다.
전장의 공기가 급변했다.
성내 지휘부에서 지휘를 하던 세레온 우슈무르도 그런 변화를 알아차렸다.
“장군! 큰일입니다! 남벽에 정체불명의 적이 출현했습니다!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대로는…….”
“조용하라!”
세레온 우슈무르는 숨이 넘어갈 듯 다급히 고하는 수하에게 버럭 성을 내고서 사납게 이를 갈았다.
이미 알고 있다. 어찌나 쩌렁쩌렁하게 외쳐대는지,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적병의 고함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루반다이라.’
들어본 적이 있다.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는 룬차이의 위대한 승리에는 종종 그들의 이름이 함께 불리곤 했으니. 그들의 이름은 제국군에게 있어서는 전설이었으며,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이름이 적으로 등장했다. 이미 룬차이를 적으로 마주하게 되었을 때부터 정해진 일이었기에 새삼 두렵지도,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벌써 놈들을 투입했다고? 길게 끌 생각은 없다는 건가?’
원군이 합류한 후로 첫 전투다. 어느 정도 전초전도 치르면서 간을 볼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적의 공세에 그런 신중함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오늘 바로 셀마 성을 함락시키겠다는 듯, 총력을 퍼붓고 있지 않은가.
‘내가 그리도 우습게 보였나?’
각오를 단단히 세웠던 만큼, 어느 정도 기대도 있었다. 제국의 군주와 싸우게 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와 적으로 맞서게 되었을 때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었다.
하지만 그런 갖가지 생각과 감정들 중 두려움을 비롯한 모든 것을 걷어내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기대감이었다. 무인으로서, 군인으로서 후회 없는 일전을 치르리라 다짐도 했었다.
‘이런 식은 아니다.’
그가 그렸던 싸움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얕잡아 보이고, 허무하게 끝날 수는 없다.
“장군?”
그가 몸을 일으키자 폴라릭 앤버가 덩달아 일어섰다.
“남쪽의 전세가 급박하니, 아무래도 내가 가봐야겠소.”
“안 됩니다! 주장이 직접 위태로운 전장에 나가다니요!”
“루반다이까지 나섰다면 룬차이는 전력을 동원한 것이오. 놈들이 이대로 날뛰게 둔다면 상황은 더욱 걷잡을 수 없게 흘러갈 것이니, 내가 직접 나서야겠소. 장군은 이곳에서 내 대신 지휘를 맡아주시오.”
“장군!”
폴라릭 앤버는 어떻게든 만류하려 했지만 세레온 우슈무르의 뜻은 굳건했다.
“내 친위병을 이끌고 가겠소. 내가 없는 동안에 잘 부탁하오.”
그렇게 세레온 우슈무르는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지휘부를 나섰다. 몇몇 병사들이 높이 치켜든 대장기는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고, 자연히 군터의 눈에도 들어왔다.
‘대장이 움직인다. 남쪽인가?’
과감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해는 갔다. 그가 대장이었더라도 세레온 우슈무르와 똑같이 행동했을 테니까 말이다. 다만.
‘기세가 심상치 않다.’
군터는 멀리 떨어진 남쪽 성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저곳의 기운은 강렬하다. 그 기운이 아군에게서 비롯된 것이었으면 좋았겠으나, 안타깝게도 반대다. 적의 기세가 강하니, 남쪽의 전황이 어떨지는 직접 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대장이 직접 간다면 상황이 나아지기는 하겠지만…….’
지휘관이 직접 전투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 하나가 더해지는 것이 아니다. 전군의 우두머리가 자신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직접 목숨을 바쳐 싸우는 병사들에게는 더 없는 위안이자 용기가 된다.
세레온 우슈무르의 참전은 밀리고 있는 전세를 뒤바꿔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장의 참전이라는 것이 이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당해버린다면.’
최악의 가정이다. 하지만 군터는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저 감에 불과하지만, 숱한 생사의 고비를 넘겨온 군터는 이성적인 판단보다 그의 본능이 알려주는 감을 더 신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