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화
와아아아아!
찬 공기가 가시지 않은 새벽녘. 사방에서 들려오는 거친 함성에 셀마 성의 군졸들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적의 공격이다! 모두 성벽 위로 올라가!”
장교들이 병사들을 닦달했다. 병사들은 우거지상을 하거나, 체념한 것 같은 얼굴로 무기를 들고서 성벽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다.
성벽 위에 올랐으나 아직 어둠이 다 가시지 않은 터라 밀려오는 적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궁수!”
그때 화살통을 등에 진 궁병들이 기름 먹인 화살을 횃불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성벽 바깥, 어두운 하늘을 향해 쏴 보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불화살이 시야를 밝혔다. 붉은 궤적이 비춘 곳으로 커다란 방패를 벽처럼 세운 채 걸음을 맞춰 다가오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수백이 한 사람인 것처럼 절도 있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기계 같았다.
“으으…….”
여기저기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얼굴에 짙은 피로가 묻어 있는, 이미 수차례 ‘저들’과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는 병사들이었다.
“틀렸어…이제 우리 모두……컥!”
벌벌 떨며 창을 내리던 병사의 몸이 번쩍 들렸다. 숨이 막혀 켁켁대는 병사를 할렌이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게 전장에 나온 군인이 할 소리더냐? 적을 앞에 둔 상황에 군심을 어지르는 그 어떠한 말도 용납할 수 없다!”
“저, 저런…….”
자신의 수하가 멱살을 잡힌 것을 본 한 장교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그의 머리 앞을 가로막은 두꺼운 팔에 의해 제지당했다.
“수하의 과격한 행동을 사과하지.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나서려는 장교를 막은 것은 군터였다. 그는 황망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장교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적을 앞에 두고서 울 생각만 하는 자는 군인이라 할 수 없지. 그렇지 않나?”
“하, 하지만…….”
장교는 백부장이었고 군터는 천부장이었다. 그러나 지위의 차이가 있다 해도 둘은 엄연히 소속이 달랐다. 직접적으로 명령을 내리거나, 잘못을 범해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관계는 아닌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장교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심하게 자신을 내려 보는 눈길에 압도당한 것이다. 자신 없게 내뱉는 ‘하지만’이라는 말조차 단 한 번 중얼거린 것이 다였다.
“창을 들어라 얼간이! 싸우지 못하겠다면 당장 저 아래로 집어던져주겠다!”
자신의 수하에게 고래고래 소리치는, 되먹지 못한 자를 보면서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이 곤란한 상황이 빨리 자나가기만을 바랐다.
그런 그의 바람은, 성 밖에서 이루어졌다.
“활을 쏜다!”
“응사하라!”
성 밖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방패의 벽 사이, 너머에서 쏜 화살은 높은 성벽을 넘어 날아들었다.
“방패! 방패 들어!”
어둠에 숨어 날아오는 화살을 막기는 쉽지 않았다. 뒤늦게 방패를 들고 쏟아지는 화살을 막았지만, 병사들은 이미 혼란에 빠진 뒤였다.
“사다리다!”
“막아!”
그런 와중에 적이 사다리를 들었다. 이번만은 이쪽도 빠르게 반응했다.
“사다리가 걸리면 즉각 밀어버려라!”
장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의 지시대로, 병사들은 성벽에 사다리가 걸리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가 사다리에 손을 가져갔다.
“아악!”
가장 먼저 사다리를 잡은 병사가 손을 움켜쥐고 뒷걸음을 쳤다. 뒤따라 달리던 병사들이 흠칫하며 사다리의 윗부분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흉측한, 가시 같은 모양의 쇠붙이들이 박혀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이런! 사다리에 손을 대지 마라! 창으로 밀어버려!”
대처는 늦지 않았으나 빠르지도 않았다. 병사들이 다시금 사다리를 밀어내려 다가갔을 때, 다시 한 번 성벽 아래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성벽에 걸린 사다리의 윗부분을 향해서였다.
사다리를 밀기 위해 다가서던 병사들이 화살을 맞고 나뒹굴었다. 병사들의 비명과 장교들의 고함이 동시에 커져갔다.
* * *
군터는 밀려오는 적군을 응시했다. 간간이 그가 있는 쪽으로도 눈 먼 화살이 날아들었지만 한 대도 그의 몸에 닿는 것은 없었다. 어쩌다 근처로 날아드는 것이 있으면 가볍게 몸을 틀거나 검을 칼집 채 휘둘러 쳐내버렸다.
성벽 위에 있으나, 그가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병사들은 성벽에서 조금 떨어진 성 안쪽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의 부대는 기병대이기에 이런 전투에 투입되지 않는다. 성벽 위에서 싸우는 것은 보병대의 역할인 것이다. 물론 상황이 급박해진다면 말에 타지 않은 기병도 전투에 투입이 되겠지만, 아직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살라스의 말에 군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칼 같이 간격을 맞추며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이는 적군은 결코 만만치 않아 보였다. 한 눈에 보아도 최정예라는 느낌이었다. 그들이 세운 방패의 벽은 견고했고, 틈이 날 때마다 고개를 들고 활을 쏘는 궁병들은 하나하나가 솜씨 좋은 사수들이었다.
고도로 훈련되고, 숱한 실전을 겪어보았을 것 같은 정예병들이다. 그들이 뿜어내는 군기는 차분하면서도 강렬했다. 수백, 수천의 병사가 한 덩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두려움에 젖은 이쪽의 병사들과는 비교하는 것조차 실례일 정도.
‘질만하군.’
연이어 패했다고 하더니, 이유가 있었다. 군주니 뭐니 말하기 전에 기본적인 군사의 질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성벽이 없었다면 저런 군대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 것은 바보짓이었을 거다.
“사다리를 밀어내!”
“공성추다!”
적군이 성벽 가까이 붙으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피비린내 나는 고함과 절규가 귀를 울렸다.
“계속 계실 겁니까?”
휘하 백부장 한 명이 물었다. 이만 내려가자는 투였다. 이곳의 싸움은 그들의 일이 아니니 이만 남의 싸움에서 몸을 빼자는 뜻이리라.
군터는 활을 들며 그에게 답했다.
“적을 조금 더 보고 싶군. 지금이 아니면 성문이 뚫렸을 때나 볼 수 있지 않겠나.”
말을 하는 중간에 화살 한 대를 쏘았다. 막 사다리를 오르려던 적병이 눈에 화살을 맞고 뒤로 넘어갔다.
“무리하지는 않겠다. 너희도 적당히 몸을 사리면서 위험할 것 같으면 뒤로 빠지도록.”
“예.”
어쩐지 말만 그럴 것 같다고 느꼈지만 군터가 못을 박으니 더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상관을 따라 성벽에 올라온 몇몇 장교들은 졸지에 부하도 없이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 * *
“장군! 서벽이 위태롭습니다!”
“즉시 예비대 2천을 보내라!”
7황자군의 지휘관은 공식적으로는 폴라릭 앤버였다. 셀마의 군대를 통솔하는 그가 주장이고, 세레온 우슈무르는 원군의 대장으로서 그와 협력하는 관계였다.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세레온 우슈무르가 주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가 적포장군으로서 무위장인 폴라릭 앤버보다 지위가 높기도 하거니와, 폴라릭 앤버가 먼저 스스로 그에게 군을 이끌어줄 것을 청했기 때문이다. 폴라릭 앤버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았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룬차이에 대적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세레온 우슈무르에게 지휘권을 양보했다. 물론 그가 룬차이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그렇다 해도 자신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지금. 그런 연유로 세레온 우슈무르는 매순간 급박하게 날아드는 보고에 답하느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기름이고 화살이고, 모두 아낌없이 쏟아 부어라! 성벽을 잃으면 어차피 내일은 없다!”
“옛!”
어두컴컴한 전황에서 그나마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물자가 넉넉하다는 것이었다. 7황자의 명에 따라 전쟁을 대비하여 일찍부터 전선에 가까운 주요 거점에는 풍족하게 물자를 비축해놓았었는데, 그 준비가 지금 빛을 발했다.
“장군.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룬차이의 용병은 매번 허를 찔러옵니다. 서벽에 전력을 두텁게 한다면 그는 필시 허술해진 쪽에 전력을 쏟아 부어 단번에 성벽을 돌파할 것입니다.”
폴라릭 앤버가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했다. 바로 얼마전 헤바르에서 그렇게 당한 적이 있는 그였다. 그때는 정말이지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게 당해버렸지만, 패배하고 나서 그때의 전투를 곱씹으며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그것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룬차이의 의도대로 놀아나다가 허점을 노출한 것이다. 룬차이는 바로 그것을 정확하게 찔러왔고.
“조언 고맙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응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서벽이든 동벽이든, 어디든 간에 한 곳에 구멍이 뚫리게 된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다른 쪽을 찔릴까 두려워서 서벽의 전황이 좋지 않은데도 지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적이 언제든 다른 쪽에 비수를 꽂을 수 있음을 항시 유의하셔야 합니다.”
“알겠소. 그리 하리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폴라릭 앤버의 조언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처음에 봤을 때는 패배감에 절은 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다시금 기운을 내기 시작한 그는 패장일지언정 제법 괜찮은 군인이었다. 특히 그가 앞서 룬차이와 겨루며 쌓은 경험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인 만큼, 세레온 우슈무르는 그의 조언에 충실히 귀를 기울일 생각이었다.
‘버겁군.’
전투는 이제 막 시작됐다. 그러나 벌써부터 급박한 상황을 알리는 보고가 사방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제국 제일의 군대라더니.’
여섯 군주의 이름이야 제국 넘어서까지 널리 떨쳐 울리는 것이나, 그 중 가장 혁혁한 전과를 올린 이름을 하나 대자면 열에 일곱 정도는 룬차이를 말한다. 거기에는 분명 무패를 자랑하는 그의 용병술이 크게 작용했겠으나, 그가 부리는 막강한 군대의 힘도 단단히 한 몫 했음이 당연하다.
군주 룬차이가 직접 조련한다는, 두려움을 모르는 군대는 그 어떠한 전장에서도 활약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봐야 같은 사람이고, 같은 병사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이를 깨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오지 않았던가. 패할 때 패하더라도, 죽을 때 죽더라도 결코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