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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27화 (427/1,064)

427화

무언가 잘못 됐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하늘 위에 저런 비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는데도 주변의 그 누구 하나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살라스.”

“예.”

“저게 보이지 않느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하늘 말이다.”

“예?”

살라스가 살짝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

군터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중충한 흑백의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눈은 아무래도 그의 눈에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군.’

꽤나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도 그는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역시 지금과 같았다.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환상처럼 느껴지지만 그건 분명히 실재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인외라.’

하늘의 눈은 틀림없이 그들을, 셀마로 움직이기 시작한 군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술법인가? 아니. 다르다.’

군중에는 술사들이 여럿 있다. 술법이었다면 그들이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다. 또한, 그의 감이 말하고 있다. 저것은 술법 같은 것이 아니라고. 그보다 더 신비로우며, 은밀한…….

“……!”

군터는 자신도 모르게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느 순간,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하늘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 *

“…….”

룬차이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부산하게 돌아가는 전장의 상황과는 달리, 푸른 하늘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평화로우며, 한적하다. 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지상의 광경은 참으로 부질없게 느껴질 것이다. 실제로 그러했다.

‘재미있는 놈이군.’

흰 종이에 찍힌 검은 점 하나가 눈길을 빼앗아가듯, 무미건조한 풍경에 섞인 이색적인 존재 하나가 그의 흥미를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안(天眼)을 봤다는 말이지.’

어쩌면 그저 감이 좋은 녀석일 수도 있다. 그런 특별한 감각을 지닌 자들이 아주 드물지만 간혹 있다. 하지만 룬차이는 자신과 눈을 마주친 녀석이 그 정도가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틀림없이…뚜렷하게 보고 있다.’

특출한 감각으로 천안의 존재를 느끼는 것과, 명확하게 바라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재주를 타고난 자가 수련을 쌓아 경지에 오르면 그것이 가능하겠으나, 척 보기에도 저 녀석은 그런 부류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어디서 저런 놈이 나타났지?’

흐릿하다. 뭔가 잡스러운 느낌이었고, 온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그럼에도 그것은 틀림없는 신(神)이었다. 인지하고 보고 있으니 의심이 확신이 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전하.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셀마 성으로 진입하려는 것 같습니다만, 어찌 하오리까. 기병대를 출진시킬지.”

“놔둬라.”

“예.”

이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판단은 최대한 힘을 써서 적이 성으로 들어가 기존 병력과 합류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을 상식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룬차이가 그런, 상식적이지 않은 결정을 내렸음에도 누구 하나 이의나 반문을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놈들이 셀마로 진입하고 나면 북쪽에도 군사를 포진시킨다. 그리고…….”

몇 가지를 명령을 내린 후. 룬차이는 화살 비를 뚫고 달리는 적의 원군을 바라보았다.

* * *

약간의 사상자가 나기는 했으나, 그래도 세레온 우슈무르가 이끄는 군대는 무사히 셀마 성에 들어설 수 있었다. 사실 ‘무사히’라고 말하는 것도 뭐한 것이, 적은 멀리서 화살만 쏘아댈 뿐 직접적으로 그들을 막아서려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들이 셀마 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치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것인지…….’

원하던 대로 셀마 성에 들어왔으나 세레온 우슈무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적의 의중을 읽을 수 없음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우슈무르 장군.”

“앤버 장군.”

무거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는 셀마 성의 공기였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그것을 성문을 지나 들어오면서부터 느꼈고, 그를 맞이하러 나온 폴라릭 앤버를 보며 더욱 실감했다.

‘패잔병들 같군.’

사실 패잔병이라 한다면 패잔병이 맞기는 하다. 이들은 이미 수차례 패하였으며, 얼마 전에는 헤바르까지 잃어버렸다. 기가 꺾여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허나 원군을 맞이하는 데도 이렇게 가라앉아 있단 말인가.

‘이래서야…….’

지휘관인 폴라릭 앤버부터가 이미 전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기가 꺾여 있었다. 원군에 대한 기대가 조금은 비치는 듯도 했으나, 그보다는 체념한 것 같은 느낌이 더 강했다. 그런 한심한 꼴을 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이 한심한 작자와 말도 섞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한숨을 속으로 갈무리하고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죽은 짐승 같은 눈을 한 폴라릭 앤버와 간략히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알아차리셨는지 모르겠지만, 전황이 좋지 않습니다. 아군은 수차례의 패배에 기세가 꺾였고, 적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적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셀마 성에 주둔한 군대가 두려움과 좌절에 감싸여 있다는 것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감시하고 있습니다만…탈영병들도 속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최악이군.”

“그나마 개전 이전부터 성내의 시민들을 후방으로 이동시킨 덕에 성내의 혼란이 번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부분이었다. 후방으로 빠진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셀마 성에 적을 둔 병사들이 탈영을 시도하거나, 창을 거꾸로 잡아드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곳에 있는 병사들은 셀마 출신 병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가족들 때문에 달아나지는 않는다 한들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냐 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부끄럽지만, 제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성문을 닫아걸고 버티기만 하면 된다 여겼으나, 그마저도 불가능했지요. 헤바르의 높은 성벽과 단단한 성문이 단 며칠 만에 돌파 당했습니다.”

패배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꼬리를 마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이 세레온 우슈무르의 가치관이었다. 그의 가치관은 지금 눈앞에서 주절거리는 비루먹은 자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그가 이곳의 사령관이기에, 그리고 앞으로 함께 어깨를 맞대고 싸워야 할 아군이기에 세레온 우슈무르는 근질거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구질구질하게 이어지는 하소연 내지는 변명을 계속 들어주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좋소. 이제까지의 일들은 지나간 것이고,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지. 적에 맞서 어찌 싸워나가야 할지를 논합시다.”

“예. 그러시지요. 일단…….”

“장군!”

드디어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차에 갑작스레 바깥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들어와서 말하라!”

폴라릭 앤버가 입을 떼기도 전에 세레온 우슈무르가 성난 고함으로 답했다. 그러자 숨을 헐떡거리는 무관이 들어와 군례를 취하며 말했다.

“저, 적군이 북쪽에 포진했습니다! 이제 적이 사방을 포위했습니다!”

폴라릭 앤버가 눈을 감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 적이 우리의 마지막 숨통을 조이려 하는 것 같습니다.”

“뭐 그럴지도 모르지만…차라리 잘 된 일이 아니오?”

“예?”

폴라릭 앤버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세레온 우슈무르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이 한심한 분위기에 장단을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적이 사방을 막았으니 더 이상은 빠져나갈 길이 없지. 그러니 이제는 싸움에만 전념할 수 있지 않겠소?”

“…하, 하하하. 하하하.”

허탈함. 내지는 다른 어떤 감정. 확실한 것은, 결코 즐거워서 나오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도 그렇군요.”

하지만 그렇게 웃은 뒤. 빛이 꺼져 있던 폴라릭 앤버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허면 이제, 저 룬차이를 상대로 어떻게 싸우면 될지를 논하면 되는 것입니까?”

“처음부터 우리가 할 일은 그 외에는 없었소.”

“좋습니다. 허면, 한 번 해보지요.”

* * *

성벽은 군데군데 부서진 곳이 얼핏 보였고, 거리에는 신음을 흘리고 있거나, 곧 죽을 것처럼 보이는 부상병들이 건물과 거리마다 널브러져 있었다. 종군 의사로 보이는 이들이 바쁘게 움직이고는 있었으나 손에 비해 부상병들의 수가 너무 많아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빌어먹을.”

할렌이 욕지거리를 뱉었다. 옆에 있던 살라스가 쳐다보자 할렌이 턱짓으로 성벽 아래쪽을 가리켰다.

“저놈들의 몰골을 보십시오. 눈이 다 죽어있습니다.”

“음…….”

“전장에 나와 있는 군인인지, 도살장에 끌려간 소인지 모르겠습니다.”

할렌의 말이 험하긴 해도, 틀리지는 않았다. 비단 지금 눈에 보이는 병사들만이 아니라, 이 성자체가 짙은 패배감으로 물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의는 찾아볼 수가 없고, 언제 닥칠지 모를 마지막 순간에 대한 두려움만이 존재했다.

‘심각하군.’

성내를 둘러보기만 해도 속이 답답해졌다. 살라스는 곧장 그들에게 배정된 막사로 향했다. 그리고 지휘관 회의를 마치고 막 돌아온 군터에게 직접 보고 느낀 성내의 상황과 분위기를 전했다.

“위험한 수준입니다. 아군이 합류했다고는 하지만, 성내의 분위기가 이래서는…전투 한 번 치르기 전에 군심이 꺾여버릴지도 모릅니다.”

살라스의 이야기를 들은 군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그리 생각한다. 병사들뿐만이 아니다. 지휘관들부터가 눈이 죽어있더군. 이제껏 함락당하지 않고 버틴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군터가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작게 뚫린 구멍 사이로 저물어가는 하늘이 보였다. 노을의 색을 받은 하늘은, 조금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자 단숨에 잿빛으로 물들었다. 거대한 눈은 여전히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그 눈길은 이 셀마 성을 향해 있었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이런 한심한 꼴을 하고서 어떻게 여태 버텼는지 모르겠습니다.”

할렌이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마음이 할렌의 한 마디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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