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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26화 (426/1,064)

426화

"놈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건장한 사내보다 머리 세 개는 더 큰, 거인이라고 해도 어색함이 없는 사내가 셀마 성을 보며 말했다.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길어야 사흘이 아니겠습니까."

"글쎄."

"더 버티리라 보십니까?"

"두려워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항전을 하고 있지. 중요한 것은 그것이야."

"명만 내리신다면 당장이라도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어올 수 있습니다만."

농밀한 투기가 전사의 심장에서 실타래처럼 풀려 나왔다. 그는 허언을 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그는 명령만 내려진다면 정말로 당장이라도 군사를 이끌고 나가 성문을 돌파할 자신이 있었다. 그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그가 바라보고 있는 중년인도 알았다.

"가능하겠지. 허나 그 일은 헤바르에서도 할 수 있었던 일이다."

중년인. 검은색과 흰색이 섞여 회색처럼 보이는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세월을 머금은 주름이 한 겹 더 접히고,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거한에게 슬쩍 눈짓했다.

"……."

거한이 자리에 앉았다. 커다란 덩치가 비교적 작은 의자에 무게를 싣자 그의 몸에 가렸던 햇빛이 막사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모든 것이 전하께서 뜻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헌데 어찌하여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승리를 거머쥐지 않으십니까?"

중년인을 대하는 거한의 태도는 지극히 공손했다. 거인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한이 제 몸집의 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중년인에게 몸을 낮추는 것이 이상해 보일 법도 했지만, 중년인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누구도 이 광경을 이상하게 보지 않을 것이다.

룬차이.

제국의 위대한 군주 중 하나이자, 제국의 영광스런 역사와 함께 한 군신이 바로 그였으므로.

"연연하면 얽매이게 되고, 얽매이게 되면 그르치기 쉽다."

"으음."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처음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예."

"무엇이 그리 급하더냐. 이 전쟁은 나의 전쟁이 아니다."

피식 웃은 그가 내려놓았던 책을 다시 들었다. 겉은 광택이 나는 가죽이었으며, 안쪽은 부드러운 종이로 되어 있었다.

"같은 책을 몇 번이나 보십니까?"

"볼 때마다 새로우니 몇 번이고 다시 볼 수밖에."

거한은 마음을 비웠다. 그가 뭐라 한들, 그의 주인은 미동도 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메디레이 공께서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룬차이가 보고 있는 책의 겉표지 아래쪽에는 작은 글씨로 희미하게 '소노아 메디레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꼿꼿한 녀석이었지. 몸은 약한데 정신만은 여느 거친 무장들 못지않았고…줏대와 고집이 있어 한 번 아니다 싶은 것에는 목이 칼이 들어와도 말을 물리는 법이 없었다."

소노아 메디레이.

제국의 재상까지 역임했었으며, 제국의 기둥이라고까지 불렸던 이다. 그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특유의 성정으로 더 유명했는데, 룬차이가 말한 그대로였다.

좋게 말하면 소신이 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고집불통이었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어 한 번 주장을 하면 그것을 철회하는 일이 굉장히 드물었다. 하지만 그런 성미를 가지고도 재상의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그의 말과 주장이 거의 대부분 옳았기 때문이다.

아주 간혹 그가 틀리는 경우, 소노아 메디레이는 자신의 잘못 내지 실수를 인정하며 뜻을 꺾곤 했다. 그러니 말하자면, 그는 평범한 고집쟁이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뛰어난 안목이 있었던 셈이다.

그는 명재상이라 불렸다. 제국뿐 아니라 타국에서도 그의 이름을 흠모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던 명신(名臣)의 최후는 상당히 비극적이었다. 특유의 성미를 황제에게도 들이댄 것이 문제였다.

모종의 일로 황제의 진노를 산 그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죄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을 물리는 법이 없던 그의 목에 정말로 목에 칼이 들어오고 만 것이다.

정말 대단한 것은, 죽음을 코앞에서 마주하던 그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녀석이었지."

그가 유배지에서 숨을 거둔 것이 벌써 60년 전이다. 룬차이는 그가 숨을 거두기 반 년 전, 쇠약해진 그와 마주앉아 담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소노아 메디레이를 직접 찾아가 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이제 곧 말하지 못하게 될 그의 마지막 말을 종이에 써 남겨달라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룬차이는 소노아 메디레이의 남은 가족들을 돌봐주기로 했다.

'재미있어.'

소노아 메디레이의 마지막 말을 읽으며 매번 느끼는 것은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간 글귀 속에 묻은 그의 삶과 정신이다.

'찰나를 살면서 영원을 말한다.'

어불성설이다. 겨울의 눈보라 속에서 태어난 하루살이가 여름의 태양을 말하는 것과 같다. 미몽에 사로잡혀 스스로 도취라도 하였는가. 아니면.

'찰나 속에서 영원을 살았는가.'

당사자의 입으로 답을 들을 수는 없다. 땅에 묻힌 소노아 메디레이의 육신은 이미 다 썩고, 뼈마저 흙이 되었을 테니.

하지만 그렇더라도, 얼마든지 물을 수 있으며 답을 들을 수는 있다. 그의 삶은 그가 남긴 글 속에 담겨 있으므로, 물음에 대한 답 역시 글 속에 있다. 다만 그 답은 때때로 이러하며, 때때로 저러하다.

수십 년 동안 같은 물음을 던졌으나 그때마다 돌아오는 답은 매번 달랐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고, 그래서 룬차이는 아직도 이 닳고 닳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제국이라.'

매 장에 글씨가 빼곡하게 쓰여 있다. 죽음을 앞두고 있었던 메디레이는,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글을 쓰면 자신의 가족들에게 더 잘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들을 최대한 쏟아내고 싶었을까.

무엇이 되었든, 그의 글 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를 하나 꼽자면 그것은 '제국'이었다. 그의 평생이 제국과 함께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할지 몰라도, 그의 책 속에서 그는 제국과 지신을 거의 동일시 하고 있었다.

'모래로 쌓은 성이 무슨 의미가 있지? 바람이 불면 허물어지고, 물이 차면 쓰러질 허상에 불과하거늘.'

미련이었을까. 하여 얽매였던 것일까. 룬차이는 황제의 앞에 무릎 꿇고서도 당당히 제 목소리를 내던 꼿꼿한 노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그런 놈이 한 둘이 아니었지.'

제국의 역사는 짧지 않다. 격동의 세월이 수백 년간 이어졌으며, 그 시간 속에 무수한 자들이 피고 졌다. 이름을 남긴 이들이 부기지수였으며, 남기지 못한 이들은 모래사장의 모래와도 같았다. 제국과 황제에 대한 충정으로 몸을 불사르던 이들이 있었으며, 야망에 모든 것을 내던진 자들이 있었다.

당연히, 그 무수한 생명들 중에는 소노아 메디레이 같은 자들도 꽤 있었다. 그럼에도 유독 기억에 남는 이가 그인 이유는, 그렇게 뜨겁게 타오르던 마지막 불꽃이 그였기 때문이리라.

황제가 불씨를 꺼뜨린 그때부터, 따라서 타오르던 불꽃들도 모두 빛을 잃었다. 어쩌면 소노아 메디레이의 최후는 그 증명일지도 모른다.

'얽매여 있는 것은 녀석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르겠군.'

사실은 알고 있다. 어쩌면 그는 질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다 타 없어지고, 재마저 다 날아가 사라져버린 그는.

"…….

"탁!

룬차이가 책을 덮었다. 그리고 그것을 함에 넣었다.

"그만 읽으시렵니까?"

"그래. 왔다."

두서없는 말이었으나, 거한은 알아들었다. 이미 올 것을 알았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화가 있겠습니까?"

가라앉았던 목소리에 다시금 열기가 감돈다. 룬차이는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혈기왕성한 수하는 역시 군인보다는 무인에 어울렸다.

"글쎄. 두고 보면 알겠지."

몸을 일으킨 룬차이가 막사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검고 흰 머리를 흐트러뜨릴 때, 그는 조용히 북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

"이상하군요."

군터는 살라스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눈에 힘을 주어, 저 '이상한'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노력했다.

'남쪽과 동쪽, 서쪽의 포위는 단단하다.'

그러나 북쪽은 뻥 뚫려 있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북쪽에는 아무런 병력도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적군은 오직 삼방(三方)만을 둘러싼 채 투석기로 셀마 성에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덕분에 셀마 성으로의 진입은 어렵지 않겠습니다."

할렌의 말처럼 셀마 성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뻥 뚫린 길을 따라 달리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물론 적들이 막아설 수도 있겠으나, 동쪽과 서쪽에 포진한 병력이 움직여봐야 질주하는 2만 병력을 틀어막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수상하군.'

그 순간. 세레온 우슈무르도 군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놓고 길을 열어주다니. 어째서?'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포위라는 것은 빠져나갈 수 없게 둘러싸기에 포위다. 그런데 저것은 아예 빠져나가라고 등을 떠미는 모양새가 아닌가. 또한.

'성에 들어가라고 부추기는 것만 같군. 어쩌면…우리가 셀마에 진입하면 그 즉시 북쪽을 틀어막을지도 모르지.'

그리 되면 고립이다. 애초에 셀마의 군대와 합류하여 농성전을 펼치는 것을 염두에 두기는 했으나, 상대가 그것을 바라는 듯 나오니 마음이 흔들렸다.

'아니. 어차피 다른 수는 없다.'

세레온 우슈무르는 입술을 씹으며 마음 속 의심과 불안을 가라앉혔다.

"지금부터 최대한 빠르게 셀마에 진입한다! 필시 적이 막아서려 할 것인즉, 마음 단단히 먹도록!"

기병이 전방과 후방에 서고 보병이 중앙에 포진했다. 전장의 공기는 이미 모든 병사들의 코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둥! 둥! 둥!

고수(敲手)의 긴장이, 떨림이 북 소리에 묻어나는 듯했다. 물론 귀로 들어 그것을 분간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군터는 그렇게 느꼈다.

'뭐지?'

순간, 군터는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감각. 불쾌하면서도 섬뜩하고, 가슴 깊숙이 옥죄어오는 듯한.

"후우."

인상을 찌푸리며 크게 숨을 토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군터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목격했다. 이것이 현실인가 싶을 만큼 비현실적이고, 충격적인 광경을.

"……!"

맑게 흰 구름 몇 덩이만이 점점이 깔려 있던 하늘이 어느 순간 우중충하게 변해 있었다. 오직 어둠과, 빛바랜 회색만이 가득한 하늘에는 거대한 무언가가 떠올라 대지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것을 뭐라 정의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군터는 그것과 가장 비슷한 한 가지를 떠올렸다.

'눈?'

그가 눈이라 생각한 '그것'은, 이제 막 나아가는 군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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