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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25화 (425/1,064)

425화

2만의 군대가 모두 집결한 그날 밤. 군터는 세레온 우슈무르의 부름을 받고 그의 막사로 향했다.

막사 밖을 지키고 있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막사 안에는 세레온 우슈무르가 홀로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부장 군터.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앉지."

세레온 우슈무르는 차분해 보였다. 내일이면 전장으로 향해야 하는 장수 같아 보이지 않았다. 떨림도, 긴장도 그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2만이나 되는 군사를 맡길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군터는 세레온 우슈무르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그가 제국의 위장이며, 파헨델의 사령관이었다는 것 정도? 그러나 파헨델이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그에게 일임했다는 것만으로도 세레온 우슈무르가 능력 없는 이는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출전을 앞둔 그는 한 자루 검처럼 잘 벼려졌다. 다만 그 예기가 밖으로 새지 않는 까닭은, 검이 아직 칼집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병사들은 어떤가."

"무슨 말씀이신지."

"그들을 이해하게. 그들 중에는 직접 바크렌의 전쟁에 참전했거나, 지인을 잃은 이들이 있을 것이야. 본래부터 초원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데다 그런 경험까지 하고 나면 적개심이 안 생기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정답이겠지. 믿고 따를 만한 대장이라는 것을 보여주면 병사들은 자연스럽게 복종할 것이야."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보였던 적의는 이제 없었다. 그러나 완전히 태도가 누그러진 것은 아니었다.

"자네가 실력도 없이 권력에 기생하는 쓰레기가 아니라는 건 알겠다. 그 흉흉한 기세만큼이나 군재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용맹 하나만은 인정 하겠네."

"……."

"알고 있겠지만,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리게 될 상대는 대적(大敵)이야.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목을 내놓아야 할지도 몰라."

"어느 전장의 어느 적이든 안 그렇겠습니까."

세레온 우슈무르는 군터의 짤막한 대꾸가 마음에 들었는지 씩 웃었다. 그에게서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이번에 우리가 치르게 될 전투는 여느 평범한 전투들과 다를 것이야. 사실 난 죽으러 간다고 생각하고 있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그만한 각오를 하고 있다는 게지."

결의를 다진 이들이 상투적인 표현으로 목숨을 걸었다 어쨌다 하지만, 세레온 우슈무르는 그 정도를 넘어 있었다. 그는 정말 생사에 초연한 것처럼 보였다.

'이해하기 힘들군.'

군터는 그의 이런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 와 그가 보았던 제국의 무관들 중에 굳어 있거나 초조해 보이는 이들이 많았다. 머지않아 상대하게 될 상대에 대한 압박감 때문이다.

룬차이.

제국의 군주 중 하나. 듣기로는 백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전장을 누볐으며,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던가. 때문에 제국의 무인들 중에서는 그를 신으로 섬기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교단이 있거나 신당(神堂)이 있는 것은 아니고, 미신 같은 것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앞으로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할 상대는 그 정도로 대단한 존재다. 신으로까지 여겨지는 이를 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특히나 제국군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곤혹스러운 일일 것이다. 제국군이 아닌 이로서는 그 심정을 짐작하기도 힘들 만큼.

"내 수하들도 나와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준비가 되었어. 그러니 어중간하게 물을 흐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소관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럴 거라 믿네. 그래야 할 것이고. 뭐. 두고 보면 알겠지. 전날 자네가 보인 무력시위 덕에 자네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과내 휘하에서 충실히 싸울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니까."

군터는 이렇게 의심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아주 예전에는 이런 대접이 익숙했었지만, 막시밀리언을 다랐던 십 년이 넘는 세월이 그때의 기억을 덮어버렸다.

"……."

심히 불쾌했다. 그렇지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가슴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 그는 아직 이방인이었고, 의심의 대상이었다. 병사들에게 그래야 하듯, 이 까칠한 상관에게도 스스로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말씀처럼, 두고 보면 알게 되실 겁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말게. 자네가 내 신용을 얻는다면, 내 자네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사과하도록 하지. 약속하겠네."

마지막 한 마디에 군터는 조금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의 말이나 태도가 거슬린 것은 사실이나, 그 모든 것에 사사로운 감정은 없었다. 그만큼 세레온 우슈무르가 앞으로의 전투에 대해 결연히 임하고 있는 것이라 이해하기로 했다.

"하실 말씀 다 하셨으면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음. 들어가 쉬게. 내일은 일찍부터 움직여야 할 테니."

자신이 한 말이 불쾌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란 것은 그 역시 짐작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세레온 우슈무르는 다소 무례하게 나오는 군터를 나무라지 않았다.

군터가 군례를 취하고 막사를 나오자 시원한 밤바람이 달아오른 머리를 식혀주었다.

*

"헤바르가 무너졌다고 상정하면, 아마도 주 전장은 셀마 근교가 될 확률이 높다."

출진을 코앞에 두고 세레온 우슈무르는 휘하 제장들을 모두 소집하여 군사회의를 열었다.

"헤바르가 무너졌다고는 하지만 그 뒤로 십여 개에 달하는 요새가 있습니다. 단 며칠 만에 그 모든 곳이 무너졌겠습니까?"

한 무관이 '헤바르'라고 적힌 지점의 뒤에 자리한 자잘한 점들을 가리키며 이의를 제기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러기는 어렵지."

"허면……."

"하지만 우리의 적은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

"명심하라."

세레온 우슈무르는 이의를 제기했던 수하가 아닌, 그의 막사에 자리한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제장들은, 아니 우리는 우리가 이제껏 가졌던 상식이라는 놈과 잠시 멀어져야 한다. 우리는 이제부터 매우 높은 확률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상식에 얽매여서는 비상식적인 적을 상대할 수 없다. 머리를 비워라.

과거에 보았던 것들은 모두 잊고, 이제부터 보게 되는 것들만을 머리에 담아라."

푹!

소매에서 단도 한 자루를 빼 들은 그가 지도의 한복판을, '셀마'라고 적힌 자그마한 성 모양 그림을 내리 찍었다.

"우리의 적은, 한때 우리가 그토록 존경하며 숭상했던 군주 룬차이다. 일찍이 중요한 일전을 앞두고 그의 자그마한 석상 앞에 기도하지 않은 자가 이 중에 몇이나 되겠는가.

아마도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압박감은 제군들이 느끼고 있는 것 이상일 것이다. 허나! 그런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그는 우리가 싸워 쓰러뜨려야 할 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세레온 우슈무르의 말이 이어질수록 무관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표정에 변화가 없는 이는 군터가 유일했다.

"백 년을 넘게 이어온 전설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리하면 우리의 이름은 역사에 남을 것이다."

긴장과 두려움을 열망으로 바꾸기 위한 세레온 우슈무르의 마지막 한 마디가 얼마나 먹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그 한 마디는 군터의 가슴에 확실하게 열기를 피워 올리는 데 성공했다.

'대적이란 말이지.'

이제껏 상대해 본 적들 중 가장 힘들었던 적은 단연 초원의 대전사, 포라칸이었다. 그를 상대하며 군터는 몇 번이나 패했고, 몇 번이나 죽을 뻔했었다.

그러나 이제 곧 상대하게 될 적은 그런 포라칸보다도 더 힘든 적이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제국의 군주.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어렸을 적부터 들었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을 만큼, 제국에서 그들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최소 몇 세대에 걸쳐 그 무게감을 더해왔다.

'인외(人外).'

명백하게, 그들은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들이다.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의 반만, 아니 반에 반만 사실이라고 해도 말이다. 일단 평범한 인간이 수백 년 동안 산다는 것자체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어쩌면 그들 역시…….'

언제부터인가 품어오기 시작한 생각, 혹은 의심.

말에 올라 상념에 잠겨 있던 군터의 귀에,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둥둥둥!

"출진하라!"

높게 치켜든 수십, 수백 개의 제국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

"장군! 제 8 정찰대의 소식이 끊겼습니다! 늦어도 오늘 새벽에는 당도하였어야 할 파발이 아직까지도 오지 않고 있습니다!"

"제카란 요새가 함락 당했다는 보고입니다! 적병을 피해 우회하여 오느라 하루를 지체하였다 하였으니, 아마도 적은 이미……."

"장군! 급보입니다!"

"장군!"

"장군……"

셀마에 주둔하고 있는 4군단의 지휘관, 폴라릭 앤버는 자신이 더 급하다는 듯 다급하게 급보를 외쳐대는 수하들을 손짓으로 제지했다.

"…잠깐. 그렇게 마구잡이로 외쳐대면 말을 해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몸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날뛰던 그들을 진정시킨 것은 폴라릭 앤버의 힘 빠진 목소리가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해지고,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었다. 그가 한계에 다다라 있다는 것을 그의 얼굴을 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실제로도 폴라릭 앤버는 한계였다. 아니, 이미 한계를 넘은 지 꽤 되었다. 그가 지금까지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은, 물론 그가 숙련된 군인이자 무인인 까닭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를 억누르면서도 동시에 떠받치고 있는 '책임감'이라는 녀석 덕분이었다.

'버텨야 한다. 나까지 무너져서는 답이 없다.'

그런 생각으로 어떻게든 쓰러지지 않고는 있었지만, 사실 그가 버틴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답을 잃어버린 지는 그가 한계에 다다른 것보다도 더 오래 되었으니까.

'어찌해야 하는가. 어찌…….'

답을 얻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팔 한쪽이라도 잘라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는 절박했다.

절망이 엄습해왔다. 몇 번이나 그를 위협했던 감정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그를 통째로 집어삼킬 것만 같은 이 끔찍한 괴물은 생각을 하려고 할 때마다 존재감을 드러냈다.

'역시 성문을 닫아 걸고 버티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그런다고 해서 얼마나 버틸 수 있지?'

헤바르에서 했던 생각이 정확히 지금 하고 있는 생각과 같았다. 전투에 응하지 않고 성문을 닫아 걸고 버티자고. 그렇게 시간을 끌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런 안일한 생각은 농성에 돌입하고 단 사흘 만에 동쪽 성문이 열리면서 깨질 수밖에 없었다.

죽음이 내려앉았던 성에서 목숨을 건져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그러나 지금. 폴라릭 앤버는 다시 한 번 시험에 빠졌다.

'방법이 없다. 방법이.'

모든 것이 무용(無用)하다. 이쪽이 어떻게 움직이든 적은 반드시 허를 찔러온다. 광대의 손바닥 위에서 노는 인형이 된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도 반드시 패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

그럼에도 그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의 손에 셀마와 1만 6천 병사, 그리고 서부 전선의 명운이 달려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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