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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23화 (423/1,064)

423화

홀로 남은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벽의 지도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지도에 못 박힌 것처럼 고정 되어 움직이지 않았는데, 그가 몸을 돌린 것은 방문이 열리고 수하 한 명이 들어서면서였다.

"무엇을 보고 계셨습니까?"

"전국(戰局)."

"헤바르에서의 전갈입니다. 닷새를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닷새면 이미 밀렸겠군."

헤바르라면 밤낮으로 말을 바꿔 타며 달려도 족히 보름이다. 다이시리 제레이스의 시선이 보고 있던 남쪽에서 조금 위로 올라갔다.

"역시 괴물은 괴물이야.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지 않은가. 싸워서 이기라는 것도 아니고, 성문을 닫아걸고 버티기만 하라는데 그것도 못하다니."

전장에 있는 장수들이 무능하지 않음은 그가 더 잘 알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렇게 한심한 꼴을 보인다는 것은, 상대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전하께서는 어떻게든 그 자의 발을 붙들라고 하셨다."

"얼마나 지원을 합니까?"

"정병 2만. 군량과 무기들 또한 넉넉히 들려 보낸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리 되면 북방의 방비가 소홀해지는 것이 아닐지."

수하가 우려를 표하자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코웃음을 쳤다.

"반군 놈들은 여력이 없다. 더군다나, 다 쓰러져가는 와중에도 저들끼리 권력싸움이나 벌이고 있지 않은가?"

이미 10만이 훌쩍 넘는 병력을 동원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여기서 2만을 더 보낸다면 데이븐랏지의 방위가 흔들거릴 것이 분명했으나,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그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알기로, 지금 베이고르의 사정은 전비에 허덕이는 데이븐랏지보다도 더 좋지 않았던 것이다. 확신하건대, 그들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일은 없었다. 못해도 향후 5년 동안은 그러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저…하옵고."

"뭔가?"

"식량의 가격이 치솟고 있습니다. 슬슬 시민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이번에는 곧바로 대꾸하지 못했다.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전쟁준비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런 총력전은 여러 가지 부담을 안길 수밖에 없다. 아무리 준비를 잘 했더라도 말이다. 그나마 비축해둔 물자를 순차적으로 푸는 등, 할 수 있는 조치를 다 했기에 지금까지나마 조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보아하니 그것도 이제는 한계인 모양이었다.

"…별 수 없지."

"어찌 할까요?"

"적당히 책임을 물을 만한 자를 찾아라. 관리보다는 상인이 좋겠지."

"죄명은…물자의 사재기를 통한 물가 교란입니까?"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허나,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이 조치가 시민들의 불만을 완전히 가라앉히지는 못한다. 아주 잠깐, 그들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릴 뿐. 상단 하나를 박살낸다 하여 올라간 물가는 내려가지 않을 것이고, 시민들의 화는 다시금 치솟을 것이다.

"아버님을 뵈어 가문의 창고를 열기를 청할 것이다."

제레이스 가문이 먼저 나서서 창고를 연다면 다른 귀족 가문이나 유력가들 역시 눈치를 보며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 되면 당분간은 상황이 호전될 터.

"힘들군."

전쟁이란 위기이며 동시에 기회다. 시류를 잘 탄다면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것이 전쟁이나, 그렇지 않는다면 가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것이 또 전쟁이다.

제레이스 가문은 이 전쟁에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있었다. 7황자의 인척으로서, 가장 든든한 협력자로서 그들은 오직 전쟁의 승리만을 위해 전력투구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그들 가문에게 가장 득이 되는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장의 득실을 따지지 않고 더 멀리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문의 창고를 연다는 말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가산을 다 탕진해도 좋다. 이 긴 싸움에서 마지막에 승자가 될 수만 있다면.

'이 모든 것을 보상받을 수 있겠지.'

지난한 길일 것이나, 그 끝에 보이는 것은 황금의 산보다도 더 거대한 무언가다.

그들의 전쟁은 이 땅이 아니라 제국 전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지금의 이 전쟁은 초전(初戰)에 불과한 것.

'내 생에 마무리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젖먹이 아들을 떠올린 그가 슬쩍 입 꼬리를 비틀었다.

*

전장으로 떠나는 것은 그가 원하던 것이었으니 말에 오르는 데 주저함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언제나 그랬듯 가족이었다. 특히 벨리사와 실비아. 군터는 애써 어두운 표정을 짓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들을 보며 약간의 가책을 느꼈다.

"금방 돌아오겠소."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과거에도 몇 번이나 똑같이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뿐.

"아버지."

두 여인이 슬픔에 차 있다면, 그의 아들은 큰 아쉬움과 약간의 분노에 차 있었다. 전장에 따라가겠다던 아들을 단호한 한 마디로 남긴 군터였다.

"네가 내 대신이다. 어머니와 동생을 잘 보살펴라."

장성한 아들을 전장에 대동하지 않는 까닭은 물론 다칠까 걱정이 되어서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곳에 남는 가족들을 보살피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을 이해시켰기에 보리스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이곳에 남기로 한 것이었고.

"생각해야 할 일이 있거든 야스메티와 모페이브, 두 사람과 상의해라."

"예."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후. 군터는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집결지로 향했다.

"2만이라니. 엄청나군요."

베이고르에서는 전 군세가 2만이었다면, 이곳에서는 지원 병력이 2만이었다. 그야말로 규모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 다시 한 번 피부로 와 닿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테비브란이 거대하다지만 2만이라는 병력이 전부 도시 안에 머물 수는 없으므로, 집결지는 테리브란에서 조금 떨어진 평야로 정해졌다. 이 군세를 이끄는 지휘관은 군터도 아는 자였다.

'세레온 우슈무르.'

파헨델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첫 인상이 그리 좋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자였는데, 어쨌든 지위로 보면 2만의 병력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였다.

황제로부터 직접 서임을 받은 적포장군인데다, 파헨델이라는 요충지에서 다 년 간 사령관을 역임하기도 했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경력이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 그의 군재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능력 없는 자에게 대군을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니, 군터는 그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구면이군. 그렇지 않나?"

집결지에 당도한 군터는 곧바로 세레온 우슈무르를 만날 수 있었다. 본래라면 관직도 없는 군터가 그를 대면하기는 어려운 일이겠으나, 군터의 뒤에는 제레이스 가문이 있었다. 그의 인선 역시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직접 명한 것인 만큼 세레온 우슈무르와의 독대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난 기억력이 좋은 편이야.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자네처럼 특이한 자는 잊어버리기가 쉽지 않지."

"……."

"재밌군. 반군의 떨거지였던 자가 지금은 제레이스 가문의 비호를 등에 지고 있다니 말이야.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내게 무엇을 부탁했는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공을 세울 자리를 마련해주겠다는 말만 전해들었을 뿐."

"솔직하게 말하지. 난 자네도, 지금의 이 상황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전쟁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따져 묻고 싶을 정도야."

군터는 그의 불만을 이해했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그 역시 아마 세레온 우슈무르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지금 여기서는 무슨 말을 해도 그의 불만을 가라앉히기 힘들 것이다. 하여 군터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약속드리지요. 실망시켜드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군터는 억누르고 있던 기운을 풀어냈다. 사납고 강렬한 기운이 순식간에 막사 안을 휘몰아쳤다. 노기가 어려 있던 세레온 우슈무르의 눈빛이 일변했다. 그의 손은 이미 허리춤의 칼집에 향해 있었다.

"…기대하지."

아직 완전히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군터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조금 전에 비해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

이번 전쟁에서 군터의 공식적인 직책은 천부장이었다. 군터가 본래 거느리고 있던 병사들에 더해 천 명을 지휘하게 된 것이었는데, 베이고르에서 수천의 병사를 이끌어보기도 했던 그였기에 천 명이라는 인원에 조금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기병이다.'

어쩌면 꽤나 어려운 요청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군터가 원한 대로 기병을 이끌게 해주었다. 분명 천 명의 병사는 수만이 부딪치는 전장에서 무언가를 이루기에는 적은 수였으나, 기병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이제부터는 내가 하기 나름이겠지.'

자신은 있었다. 그가 신경 쓰이는 것은 전장에서 뭘 할 수 있을지가 아니라, 처음 보는 병사들을 어떻게 짧은 시간 동안 쓸 만하게 만들 수 있을지였다.

"형편없지는 않습니다만…썩 좋지도 않군요."

휘하로 합류한 900남짓한 병사들을 살핀 할렌의 평이었다. 군터의 생각 역시 그와 비슷했다. 그의 평가는 할렌이 한 것보다도 조금 더 냉혹했다. 할렌은 형편없지는 않다 말했지만, 그가 보기에는 그마저도 아니었다.

"제국의 기병은 장…대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다릅니다. 본질적으로 전장에서 수행하는 역할부터가 다르지요."

초원의 전사들과,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베이고르의 기병은 기동력에 중점을 두었다. 반면 제국의 기병은 기동력보다는 돌파력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는 그들이 사용하는 무거운 무장과 마갑(馬甲) 등에서부터 드러난다.

"느린 기병은 기병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허나 전쟁은 이미 벌어지고 있으며 전투는 코앞입니다. 단 며칠 만에 수 년 간 익숙해진 체질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저희는 수마저 적습니다."

"그래서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살라스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즉답했다.

"통일되지 못한 방식은 혼란만을 초래할 겁니다. 따라서 저들을 바꿀 수 없다면, 저희가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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