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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22화 (422/1,064)

422화

보리스는 의기양양하게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의 뒤로는 그라모트와 로우렌 형제가 갈기 늑대를 비롯하여 보리스가 사냥한 사냥물들을 말에 매고서 따랐다.

개시부터 근사한 놈을 잡은 후부터, 그럭저럭 사냥 운이 괜찮은 편이었다. 사냥터에 들어서며 큰소리를 것처럼 호랑이를 잡지는 못했지만, 당최 호랑이가 눈에 띄지를 않았는데 어쩐단 말인가. 굳이 호랑이가 아니더라도 자랑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을 여럿 잡았으니 보리스의 어깨는 당당하게 펴져 있었다.

그러나 약속장소에 도착한 순간. 정확히는 모닥불 근처에 모여 앉아 있는 부친과 그 수하들, 그 옆에 놓여 있는 거대한 무언가를 본 순간. 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대호(大虎).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장정 대여섯을 합쳐놓은 것 같은 크기의 호랑이.

그것을 보았을 때, 보리스는 자신이 사냥한 십여 마리의 짐승들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버지께서 잡으신 겁니까?"

"그래."

보리스는 길을 터주는 병사들 사이로 지나가 모닥불 앞에 앉았다. 그리고 호랑이의 시체를 가까이서 더 자세히 보았다.

그러자 멀리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상처는 어디에……."

"말도 마십시오 공자. 장주님께서 놈을 보자마자 무기를 집어던지시더니 맨손으로 놈의 목을 졸라 죽이셨습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보리스는 할렌이 못 본지 얼마 안 되어 거짓말쟁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슴을 치는 그의 행동과, 가볍게 웃는 주변의 사람들을 보고서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호랑이를 맨 손으로 잡는다고?'

자신의 부친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옛적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상식 밖이지 않은가.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았다는 것도 믿기지가 않는데, 눈앞에 쓰러져 있는 놈은 척 보기에도 보통 호랑이가 아니었다.

"도대체 이게."

"저 늑대는 네가 잡은 것이냐?"

살짝 얼이 빠져 중얼거리던 보리스에게, 군터가 물었다.

"아, 예."

"제법이구나. 조금 거칠게 잡은 것 같기는 하지만."

놈의 가슴을 헤집은 상처를 말함이었다.

"……."

칭찬을 받았음에도 보리스는 어쩐지 부끄러워져 입을 꾹 다물었다.

"본래는 이틀 동안 할 생각이었다만, 첫날에 이놈을 잡아버렸다. 내일 아침 해가 뜨자마자 돌아갈 것이다."

"이 녀석의 가죽 손질 때문입니까?"

보리스의 물음에 군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이스 당주에게 선물해야겠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냥터에서 호랑이를 본 것은 처음이나, 보리스는 어디서도 이만 한 놈을 보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질도 질이지만 크기로 보아, 저놈의 가죽을 벗긴다면 방 하나를 통째로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냥터는 제레이스 가문의 것이었다. 빌려 쓰는 입장에서 주인에게 성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날이 다 저물지 않았는데, 조금 더 사냥하면 안 되겠습니까?"

보리스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직이라고는 하지만 금방입니다 공자. 산과 숲의 해는 일찍 지는 법입니다."

살라스가 그를 만류했다. 보리스는 살라스를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에게 향했다.

"앉아라."

"아버지."

"오늘만 날이 아니다."

그 한 마디에 보리스는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따금씩 이렇게 단호하게 내뱉는 그의 목소리에는 무게감이 있다. 아들인 보리스조차도 익숙해질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그것은 마치 높고 단단한 벽과도 같았다.

이런 식으로 한 마디를 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번복은 없으며, 이의는 더더욱 있을 수 없다.

"…예."

체념하고 도로 앉는 수밖에 없었다. 그라모트가 내려놓은 갈기 늑대의 너덜너덜한 시체가 꼴 보기 싫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는데 말이다.

*

예정보다 짧게 끝난 사냥 직후. 군터는 테리브란으로 돌아간 즉시 대호의 가죽을 벗기고 그것을 제레이스 가문으로, 다이시리 제레이스에게로 보냈다.

호피를 직접 만나서 전하지는 않았으나,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기뻐한다는 이야기는 선물을 보내고 하루가 지나지 않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직접 사람을 보내 고맙다는 말을 전한 것이다.

"조만간 한 번 뵈자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흘리듯 한 그 말을, 군터는 가볍게 듣고 넘겼다.

테리브란에서 머문 지 꽤 되었고, 정가(政街)의 사정도 대충은 알게 되었다. 딱히 알려고 하지 않아도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제레이스 가문은 7황자의 진영 내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외척이며, 데이븐랏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권세가였다. 그리고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제레이스 가문의 당주 대리로서 당연하지만 할 일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다. 그를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만나고자 하는 이들을 줄 세우면 성 하나를 에워싸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따로 한 번 만나자? 별로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다. 제레이스 가문의 후계자로서 온갖 귀물들을 다 봤을 그가 호피 하나에 기뻐하면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며칠 뒤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만나자고 사람을 보내왔을 때는 군터도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볼일이지.'

호피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필시 뭔가 용건이 있어 부르는 것일 터. 군터는 그 이유를 짐작해보았으나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떠보려는 것일 겁니다."

야스메티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장주님께서 사이주 공과 가까이 지낸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속으로는 크건 적건 신경을 쓰고 있었을 겁니다."

"아직도 그 이야기인가."

군터는 야스메티가 다이시리 제레이스를 너무 얕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를 너무 얄팍한 사내로 여긴다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군터의 심드렁한 반응에도 야스메티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분명 장주님을 사이주 공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겁니다. 따지고 보면 이번에 사냥터를 사용할 수 있게끔 손을 써준 것도 사이주 공이 아니었습니까?"

"난 사이주 제레이스의 수하가 아니다."

"때때로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알맹이보다 껍질이 중요할 때가 있지요."

"계속해라."

"장주님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하겠지요."

군터가 피식 웃었다.

"제레이스 가문을 이끄는 자가 한낱 객장의 속을 떠보고자 한다?"

"왜 자신을 그리 낮추십니까."

"사실을 직시하고자 함이다."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부정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말한 그대로,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이고르에 있을 때. 코누다이안에 있을 때와는 다르다. 이곳, 테리브란에서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레이스 가문이 떠나라 하면 오늘이라도 당장 떠나야 하는 처지의, 한낱 외부인에 불과했다.

"아마도…다이시리 제레이스가 신경쓰는 것은 장주님이 아니라 사이주 공일 것입니다."

"아아."

군터는 그제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근사한 선물이었네. 내 그런 선물은 정말 간만에 받아보았어."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군요."

"우리 가문의 땅에 그런 녀석이 살고 있었다니. 놀랐지 뭔가."

제레이스 가문의 땅이 데이븐랏지 곳곳에 널려 있고, 그들이 보유한 사냥터만 해도 열 곳이 넘어간다고 들었다. 과연 그는 그들 가문의 사냥터에 뭐가 살고 있는지는 차치하고, 그 많은 사냥터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는 있을까.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 마땅히 나도 보답을 해야 할 것인데."

"갈 곳 없는 몸을 받아주시지 않았습니까. 부족하나마, 보답은 제가 한 셈입니다."

그 말에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피식 웃었다.

"단호하군."

"……?"

"자랑은 아니네만, 이 자리에 있다 보면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된다네. 우리 가문은 가진 것이 많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보다 더 많아. 그러다보니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가지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 그들의 공통점이라 한다면, 무언가 원하는 게 있다는 거야. 그들은 아닌 척을 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내게 원하는 것을 받아내려 애를 쓴다네."

"……."

"하지만 자네는 조금 다르군. 은원이 분명하다고 해야 하나."

"경우를 따진 것뿐입니다."

"그것을 못하는 자들이 꽤나 많다네. 그리고…사람의 마음이란 본래 받은 것은 잊고, 받을 것만 생각하는 법이지. 대개 그렇다는 것이야."

어딘지 모르게 공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군터는 침묵을 지켰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이시 제레이스는 다시 한 번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내기에는 좀 어떤가? 아랫것들에게는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지원하라 했는데."

"좋습니다. 배려하신 덕분에 정말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네의 입장에서는, 만족스럽지는 않겠지?"

"……."

"솔직하군. 생각이 표정에 드러나는 자는 오랜만에 만나서, 굉장히 색달라."

"하는 일 없이 밥만 축내고 있는 것이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전장에 가길 원하나?"

"가능하다면…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군터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한쪽 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벽 한 면을 거의 통째로 채우고 있는 거대한 지도가 있었다. 따로 종이나 가죽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벽 자체에 새겨진 것이었다.

크기에 비해 매우 정밀하게 그려진 지도는 제국의 북부 전체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제는 제국 땅에서 떨어져나간 베이고르부터 제국 북부의 끝자락이라 할 수 있는 아록까지.

"알다시피, 우리는 지금 전쟁을 치르고 있네."

손을 뻗은 그가 한 곳을 가리켰다. 뻗은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2황자가 다스리는 5개 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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