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421화 (421/1,064)

421화

야스메티와 이야기를 나눈 그 다음 날. 군터는 사이주 제레이스를 찾아갔다. 그런 군터를 사이주 제레이스는 언제나처럼 반가이 맞아주었다.

"어서 오시게. 바로 며칠 전에 보았거늘, 어쩐 일인가?"

"할 일이 없어 적적하던 차여서 말입니다."

"하하. 이거 원."

"언제든 찾아오라 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군터가 그의 저택을 떠나던 날에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 말대로 이렇게 불쑥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사이주 제레이스였다.

"실례되는 말일지 모르겠네만, 눈치가 조금 부족한 편인가?"

"어인 말씀이신지."

"나와 어울리는 것을, 내 형님께서 별로 좋아하시지 않을 걸세."

"소관은 제레이스 가문에 빚을 졌습니다. 허나 그렇다 해서 다이시리 제레이스 공의 수하가 된 것은 아닙니다."

"뭐, 그래. 그건 그렇지. 그러나…하하. 이거 참."

사이주 제레이스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군터는 그가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짓는 웃음이, 이제껏 보았던 그의 모든 웃음 중 가장 맑았기 때문이다. 그 웃음엔 일말의 가식도 없었다.

"요즘 좀 어떤가? 자네를 보고자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네만."

"찾아오는 사람은 많습니다. 다만 그들 중 그저 얼굴이나 익히자고 찾아오는 이들은 몇 안 되더군요."

"가문의 이름 아래 모여 있지만, 그들도 각자 생각하는 바가 다 다르지. 신중해야 할 걸세. 자네의 이름값이 아직 그리 높다고는 못하지만, 형님께서 눈 여겨 보았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면서 자네를 주목하는 이들이 꽤나 늘었다네. 그리고 그런 이들은 앞으로도 점차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것이야."

"피곤한 관심은 사양하고 싶습니다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되겠는가. 자네 스스로가 잘 신경을 쓰는 수밖에 없을 것이야."

"머리를 쓰면 쓸수록 몸이 굳는 느낌입니다."

"하하! 역시 천생 무인이로군. 정적들에게 쫓겨 다니다가 가까스로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 않나. 벌써부터 피 냄새가 그리운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제 처지 때문이지요. 객장이라지만, 사실은 하는 일 없이 공짜 밥만 축내는 신세가 아닙니까."

"그렇게 자기 비하를 할 필요는 없다고 보네만."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흐음."

"소관의 능력을 증명하고, 공을 세워 제 자리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겸사겸사, 아직까지 제게 향하는 미심쩍은 시선들을 걷어내고 말입니다."

"하하. 내게 그런 부탁을 해봐야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네. 자네도 알겠지만, 모든 결정은 형님께서 내리시는 것이야."

"부탁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저 속이나 터놓는 것이지요. 말씀드린 것처럼 답답해서 말입니다."

"음. 사냥이라도 나가지 그러나? 테리브란 인근에 사냥터가 여럿 있다네. 그 중에서도 우리 가문의 사냥터는 다른 귀족 가문들이 부러워 할 만큼 넓고, 귀한 사냥감이 많지."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입니다만, 제레이스의 사냥터를 소관이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하하. 내가 아무리 힘이 없다 해도 어쨌거나 당주의 아들인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네."

군터는 그 후에도 사이주 제레이스와 이런저런 주제로 담소를 나눴다. 그리고 며칠 뒤, 아들인 보리스. 그리고 몇몇 수하들과 함께 제레이스 가문의 사냥터로 향했다.

"활 솜씨는 많이 늘었느냐."

"이제 삼백 보 밖에서도 과녁을 빗나가는 일은 없습니다."

군터의 물음에 보리스가 힘 있는 목소리도 답했다. 그만큼 자신의 솜씨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리라. 그것은 어설픈 오만은 아닌 것 같았다. 손가락에 박힌, 돌덩이 같은 굳은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과녁을 맞추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오늘 제 솜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자만은 하지 마라. 듣자하니 이곳에는 맹수가 많다더구나."

당연하지만, 제레이스 가문이 보유한 여러 사냥터 중 위험하다는 이곳을 일부러 골랐다. 덤벼들지도 못하는 사슴 같은 것을 잡는 건 재미가 없으니까 말이다.

"걱정 마십시오. 호랑이 한 마리 정도는 잡아보겠습니다."

사냥터에 진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군터와 보리스가 이끄는 두 무리로 나뉘었다.

"그라모트! 로우렌! 공자님을 잘 모셔라! 알겠느냐?!"

"염려 마세요 아버지."

"저희가 모시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공자님의 솜씨를 못 보셔서 하시는 말씀이세요."

할렌의 우렁찬 목소리에 그를 닮은 두 청년이 긴장한 기색 없이 받아쳤다.

군터는 슬쩍 그 자신감 넘치는 청년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의 시선을 받자마자 자신만만하던 두 젊은이가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에 할렌이 혀를 차고, 군터는 니클라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들 녀석을 부탁하지. 무모한 짓을 하려 하거든 힘으로라도 제지해주게."

"그리 하겠습니다."

살라스나 할렌에게 맡길까 생각도 했었지만 그 둘 모두 보리스가 갓난 아이였을 때부터 보아왔던지라 보리스를 엄하게 대하지 못했다. 하여 군터는 그런 것도 없고, 믿을 만한 실력자인 니클라스를 보리스에게 붙였다.

보리스는 뭔가 불만이 있는 것 같았지만 맹수의 발톱에 몸이 찢기는 것보다는 기분이 조금 불편한 것이 나을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거든 호각을 불고…그럼 약속 지점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지."

사냥이 시작됐다.

조용하던 숲속에 거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두두두!

나무가 우거진 숲속을 군터와 그의 수하들은 평야를 달리는 것처럼 질주했다.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너무 느슨해진 것이 아니냐!"

할렌의 외침에 짤막히 대꾸한 군터는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시위를 당겼다. 나무와 풀 사이로 날아간 화살은 멀찍한 곳에 몸을 낮추고 있던 곰의 미간에 명중했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 위에서 명궁인 사람은 장주님 밖에 없을 겁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곰을 본 할렌이 작게 투덜거렸다. 옆에 있던 살라스도 동의한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개시부터 곰이라. 이거 느낌이 좋습니다."

"한동안 이곳을 쓴 자가 없었다더군. 잡을 만한 놈들이 꽤 있을 거다."

군터 쪽이 군터의 화살 한 대로 상쾌한 개시를 하고 있을 무렵. 보리스 쪽도 첫 사냥감을 노리고 있었다.

"이랴!"

"공자님! 너무 빠릅니다!"

뒤쪽에서 니클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보리스는 무시했다. 그리고 날카롭게 치뜬 눈을 화살촉이 향하는 방향에 고정했다.

꽤나 근사하게 생긴 갈기 늑대 한 마리가 달아나고 있었다. 보통의 늑대와는 달리 무리 생활을 하지 않는 갈기 늑대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십 수 기의 인마에 잔뜩 놀란 것 같았다.

"……."

보리스는 흥분 속에서 최대한 숨을 고르며 기다렸다. 사냥감이 그가 그리는 궤적에 들어올 때까지.

'지금!'

슈웅!

사냥감이 마음속으로 그린 궤적 안에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시위를 놓은 순간, 보리스는 실패를 직감했다. 시위를 놓던 순간에 돌인지, 파인 땅인지를 짚은 말이 살짝 몸을 틀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화살은 늑대를 맞추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동시에 늑대는 수풀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랴!"

"공자님! 멈추십시오!"

멈추라고? 근사한 사냥감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 보리스는 멈추는 대신 더 빨리 달리라 말을 재촉했다.

두두두!

길게 자란 수풀을 헤집고 들어갔다. 고개를 높이 빼고 주변을 샅샅이 훑었으나 갈기 늑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제길. 놓친 건가?'

거리가 멀었지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갈기 늑대치고도 굉장히 근사한 녀석이었다. 어지간한 범 못지않은, 어디다 내놔도 충분히 자랑할 수 있을만한 멋진 사냥감이었다. 그놈을 꼭 잡았어야 했는데.

'마지막에 흔들리지만 않았어도.'

숨을 헐떡이는 말의 뒤통수를 야속하게 바라본 보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공자! 고개 숙이시오!"

"……!"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보리스는 이미 몸을 틀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섬뜩한 살기가 느껴짐과 동시였다.

콱!

바로 눈앞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맞물렸다. 지독한 노린내가 코끝을 찌르고, 흉맹한 노란 눈동자가 허공에서 빛을 뿌렸다.

'나무 위에 있었구나!'

갈기 늑대가 나무를 탄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도망치던 중에 나무 위로 피했을 줄은, 그렇게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발톱.'

이빨을 피했으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갈고리처럼 휜 발톱이 그의 목 줄기를 노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보리스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팔을 들어 올리는 것뿐이었다.

퍼억!

캐앵!

하지만 예상했던 끔찍한 고통은 없었다. 옆구리에 화살을 맞은 갈기 늑대가 발톱을 다 휘두르기 전에 나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공자! 물러서시오!"니클라스의 목소리. 보리스는 그가 자신을 구했음을 알았다. 허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이번에도 니클라스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흡!"

갈기 늑대가 떨어져 나갔음을 알자마자, 보리스는 안장에 걸어두었던 창을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힘껏 내질렀다.

푸욱!

추락하고 나서 아직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던 갈기 늑대의 몸에 창날이 박혔다. 놈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지만, 보리스는 놈이 빠져나가기 전에 말을 달리며 놈을 밀어붙였다.

"이야아아앗!"

거친 몸부림이 창을 쥔 팔에 부담으로 밀려왔다. 보리스는 팔에 온 힘을 주며 창을 들어올렸다. 커다란 늑대의 몸이 떠올랐을 때, 보리스는 전력으로 나무를 향해 창을 찔렀다. 늑대의 몸을 관통한 창끝이 나무에 박히고, 경련하는 늑대의 비명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콰직!창대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휘었다. 팔에 느껴지는 무게가 조금 가벼워졌을 때. 보리스는 그제야 다시 늑대와 눈을 마주쳤다.

살기 가득하던 노란 눈은 이제 고통에 젖어 있었다. 보리스는 희열에 가득 찬 채 빛을 잃어가는 짐승의 눈을 마주보았다.

우드득!

무게를 견디지 못한 창대가 부러졌다. 갈기 늑대의 몸뚱이가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미 놈은 달아날 힘을 잃은 뒤였다. 몸통 중간이 붉게 변한 놈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며 피를 토하는 것뿐이었다.

"고맙습니다. 니클라스님. 덕분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 멋진 녀석도 잡을 수 있었고요."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살았지요. 니클라스님의 덕에 말입니다."

두려움도, 떨림도 없이 사냥을 성공했음에 기뻐하기만 한다.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하여간 보통의 젊은이들과는 조금 많이 다른 보리스의 모습에 니클라스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니클라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보리스는 잔뜩 들뜬 표정으로 말에서 뛰어내려 숨이 끊어지기 직전인 늑대에게 다가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