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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20화 (420/1,064)

420화

다이시리 제레이스의 허락 아래 제국에 받아들여졌으나, 군터는 정식으로 관직을 얻지는 못했다. 베이고르에서 이름을 날린 무장이라 해도 그것만으로는 관직을 내려줄 명분이 없고, 이번에 세운 사소한 군공을 이유로 하자니 한미한 관직밖에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지금까지처럼 객장의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 더 낫다는 다이시리 제레이스의 말에 군터는 동의했다.

그리하여 군터의 신분은, 표면적으로는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실질적인 대우는 비할 수 없이 달라졌다.

우선 마음대로 바깥 출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첫째요, 사이주 제레이스의 저택이 아닌 제레이스 가문의 본가 저택에 별채를 내어주었다. 수하 병사들까지 다 수용하고도 남음이 있는, 별채라고는 하지만 어지간한 저택보다도 더 큰 규모였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요."

"그렇소. 이제 한 식구가 되었군. 잘 부탁하오."

"소관이야말로."

제레이스 가문에서는 군터를 위해 연회까지 열어주었다. 제레이스 가문의 일원들 일부와, 이전부터 군터와 면식이 있던 몇몇 인사들이 그 연회에 참석했다.

"감축 드립니다. 드디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셨군요."

호화롭지도, 그렇다고 소박하지도 않았던 연회가 끝나고 난 후. 군터는 그의 측근들과 따로 자리를 가졌다.

"그런 말을 듣기에는 아직 이르다. 객장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용병과 다를 바 없지 않나."

"그렇습니다."

군터의 자조 섞인 말에 야스메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허나 발판을 마련한 것은 분명합니다. 더 큰 무대에서, 더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졌지요."

무게 있는 주제로 대화가 이어졌지만 자리 자체는 가벼운 분위기였다. 술과 음식이 있고, 자리한 이들도 편하게 앉아 이어지는 말을 경청했다.

"베이고르에 있었을 때는 잘해봐야 영주 휘하의 가신이 한계였지요. 하지만 제국에서는 다릅니다."

제국의 권력은 황제에게 집중되어 있다. 아니, 집중이라기보다 권력이라는 것 자체가 황제로부터 나온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제국은 황제였고, 황제는 곧 제국이다.

이제는 황제가 죽고 없어 옛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황제는 없어도 그가 만든 제국의 법은 남았다. 그리고 그 제국법은 베이고르의 영주와 같은, 독자적인 권력 세력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는 바꿔 말하면 영주와 같은 '장벽'이 없다는 이야기다. 실질적으로는 다르겠지만, 어쨌거나 형식적으로는 황제 아래로 모두 같은 '신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높이 올라가는 데 있어, 그 어떤 장벽도 한계도 없다. 게다가.

"제국은 열려 있습니다. 거기에 아시다시피 지금, 제국 황제의 자리는 공석입니다."

황제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비어 있는 황좌를 향해 이빨을 드러낸 황자들 중 누구라도 황제가 될 수 있다.

"대공을 세운다면 장주님께서는 성주가 되실 수도, 총독이 되실 수도, 그 이상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달콤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그게 그리 쉬울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는.

어쩌면 인간의 얄팍한 본성일지도 모른다. 나약함. 좋지 않은 현재에서 눈을 돌리고 뻔뻔하게 그려낸 달콤한 미래를 바라보는.

허나 그러면 또 어떠한가. 어차피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이는 미래도 어쩌면 정말로 갈 수 있을지 모를 가능성 중 하나다. 그렇다면 그 희박한 가능성을 목표로 삼는 것이 어찌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적어도 지금, 야스메티의 한 마디는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데 성공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애송이 십부장 시절, 나는 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당시 백부장이었던 코누디스 자작을 따랐다."

군터는 그를 바라보는 수하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그로부터 십 년 하고도 6년이 지나, 다시 이 꼴이다. 하지만."

그가 잔을 들고, 모두가 잔을 들었다.

"지금의 난 그때와는 다르다. 나는 그때의 세상 모르는 애송이가 아니며, 무엇보다 지금은 너희가 내 곁에 있기 때문이다."

수하들에게 하는 말이자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머릿속으로 말을 골라가며 뱉었으나, 그렇게 말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됐다.

'모든 면에서 그때 보다 낫지 않은가.'

상실감도, 막막함도 없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이 가득했다. 세상을 몰라 용감했던 그 시절보다도 더.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알고 있다. 그런 데도 두렵지 않다. 야스메티가 말한 성주니, 총독이니 하는 것도 얼마든지 쟁취할 수 있으리라.

"이곳에서 다시 일어나 베이고르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는…내 등을 찔렀던 놈들 모두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잔을 쥐지 않은 손으로 목을 쓸었다. 목젖 아래, 희미하게 남은 긴 흉터가 느껴졌다. 생명의 끈을 가르던 미겔의 칼날이, 그날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날의 고통. 치욕. 분노.

한 잔 술을 단번에 들이켜 그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잊는 것이 아니다. 새겨두는 것이다. 다시금 꺼내어 볼 때를 기약하며.

*

"당분간은 제레이스 가문의 비위를 맞춰주며, 그들의 눈에 들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당장 군터의 신분은 제레이스 가문의 객장이었고, 그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제레이스 가문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으니.

"다만 그들의 휘하처럼 부려져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정말 제레이스 가문의 휘하로 들어가게 될지언정, 지금 당장은 안 됩니다."

"언젠가라고 해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남의 밑에서 종노릇을 하는 것은 이제 질렸다. 약한 자의 밑에 있다가 덩달아 몰락하는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런 마음은 한동안은 깊숙이 묻어두셔야 합니다."

"알고 있다."

심정적으로 염증을 느꼈다고 해서 현실 감각을 집어던진 것은 아니다. 당장 제레이스 가문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어느 정도 굽혀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그들의 신뢰, 혹은 총애를 얻어야 한다는 것도.

"내가 뭘 해야 하겠나."

"특별히 무언가를 하셔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장주님께 맡길 일이 생기면 그들이 먼저 장주님을 찾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저…제레이스의 무관들과 교류를 하시는 것 정도면 족할 것입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제레이스 가문에 속하거나, 줄을 댄 무관들은 대부분 군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부터 그의 무명을 알고 있던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힐데리트와 같이 이번에 그와 새로이 교분을 나누게 된 이들도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으니.

"그뿐인가?"

"예. 음. 단지……"

"뭔가."

야스메티는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군터가 눈빛으로 재촉하자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 조금 망설여집니다만, 이제부터는 사이주 제레이스 공과는 거리를 두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어째서지?"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장주님께서 사이주 제레이스 공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들 형제의 우애가 깊다고 하지 않았나?"

"예. 그렇지요.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 제레이스 가문의 형제가 권세 높은 귀족 가문의 자제들답지 않게 사이가 좋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알게 됐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외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그들은 서로를 견제합니다. 아니, 사이주 제레이스 공의 속내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그렇습니다.

제레이스 가문의 후계자라고는 하지만, 그는 아직 당주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나, 현 당주의 마음이 변하거나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진다면 차기 당주의 자리가 누구에게 돌아가게 될지 모릅니다."

"다이시리 제레이스. 생각보다 도량이 좁군."

군터는 약간 다이시리 제레이스에게 실망했다. 사이주 제레이스와 오랫동안 안 것은 아니지만,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이나마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이주 제레이스라는 사내가 야심에 불타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헌데 같은 부모의 아래에서 수십 년을 함께 보냈을 그가 동생의 마음을 모른단 말인가.

"아닙니다."

그런데 야스메티는 군터와 생각이 다른 듯했다.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도량이 작은 것이 아니라 치밀한 것입니다.

그 역시 사이주 제레이스 공이 당주의 자리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경우가 있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놓치지 않고 경계하는 것입니다.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

"장주님께서도 유념하셔야 합니다. 큰일을 다루는 자는 무릇 그와 같아야 합니다. 철저해야 하지요. 열에 하나, 백에 하나라 해도 원치 않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큰일을 다룸에 있어 중요한 것은 대범함보다는 치밀함입니다."

"네 말이 옳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네 말을 따를 수는 없다."

"장주님."

"사이주 제레이스는 막다른 곳에 몰렸을 때 내 손을 잡아주었다. 물론 그 역시 나름의 계산을 했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에 빚을 졌다. 그 보답은 못할망정, 다이시리 제레이스의 눈치 때문에 그에게 등을 돌릴 수는 없다."

야스메티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의 말이 옳다는 것도 안다. 허나 그러면서도 군터는 그의 우려가 너무 앞서나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다이시리 제레이스의 입장에서, 그가 사이주 제레이스와 교분을 나누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무얼 어쩌겠는가. 설마하니 그것을 가지고 칼을 들이밀기라도 하겠는가?

만약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그렇게나 동생을 경계하고 있었다면, 진즉에 어떻게든 손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사이주 제레이스는 여전히 테리브란에 머물고 있었고, 요직은 아니라지만 관직을 역임하며 조정이나 제레이스 가문의 굵직굵직한 행사에도 얼굴을 비치며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바꿔 생각해보지. 오히려 지금 내가 사이주 제레이스에게 등을 돌린다면, 나를 의리 없는 자라고 욕하지 않겠는가? 다이시리 제레이스든, 내가 교분을 나눠야 할 이들이건 말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래. 내 생각은 그렇다. 그러니 이번만은 자네의 말을 들을 수가 없겠군."

군터의 단호한 말에 야스메티는 담담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십시오. 저는 어디까지나 조언을 드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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