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비가 그쳐가기 시작할 무렵, 군터는 즉각 추격을 재개했다. 어둠이 막 걷히던 새벽녘이었다.
"발견했습니다."
그의 예상대로 적은 멀리가지 못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뒤를 쫓기도 쉬웠다.
"적은 여전히 야산의 작은 동굴에 머물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가 뒤쫓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보급부대를 털었으면서 추격군이 붙을 거라는 생각도 못했나? 멍청한 놈들 같으니."
할렌이 조소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힐데리트는 그들과 생각이 달랐다.
'안일한 게 아니야. 설마 이렇게 빨리 쫓아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거겠지.'
어느 정도 상식이라는 게 있다. 예를 들면 추격대가 편성된다고 해도, 그들이 하루에 얼마만큼을 이동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하여 따라붙기까지 최소한 얼마 정도가 걸릴 것이라는 것을 그 '상식'을 이용해 계산할 수 있다. 아마도 적장은 충분한 경계심을 가지고 그 계산의 결과를 최대한 박하게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간과했던 건 따라붙은 추격대의 행군 속도가 그의 '상식'을 아주 많이 뛰어넘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더해 한 가지 실책이라 한다면, 비가 쏟아지는 통에 정찰을 여느 때처럼 운용하지 못했다는 것 정도일까.
그러나 그 하나의 실책도 그의 탓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저 운이 좋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두두두!
달리는 말 위에서, 힐데리트는 곧 시작될 전투를 대비했다. 괜히 손을 칼집에 가져가고,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숙련된 무인이자 군인인 그였지만 전투 전에 느끼는 긴장감은 열일곱의 나이에 처음으로 중무장을 하고서 산적 토벌에 나섰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앞질러서 정찰을 나갔던 병사들이 돌아와 적의 동태를 전했다.
그러자 군터는 살라스와 할렌에게 명령을 내렸다.
"살라스! 할렌! 각기 스물을 이끌고 적의 정찰병들을 없애라."
"옛!"
살라스와 할렌이 각기 병사들을 이끌고 뛰쳐나가자 힐데리트가 다가와 말했다."장군. 제게 맡겨주시지요."본의 아니게 행군하는 내내 부끄러운 꼴을 보여 왔던 힐데리트였다. 지휘관으로서 이끌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가 직접 조련한 것도 아닌데 병사들이 처지는 것이 어찌 그의 잘못이겠느냐마는, 낯이 뜨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본래 힐데리트는 나설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짐이 될 생각은 그 이상으로 없었다. 일전을 앞두고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몸이 달아있었다.
군터는 그런 속내까지는 헤아리지 못했으나, 힐데리트가 전의에 가득 차 있음은 알 수 있었다. 그도 어지간하면 의욕이 넘치는 군인에게 군공을 세울 기회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대의 병사들을 낮춰 볼 생각은 없으나, 내 수하들은 모두 기사에 능하오. 이런 일에는 적격이지."
"음……."
기병이라고는 하지만 제국의 기병과 초원의 기병은 다르다. 전장에서의 역할부터가 조금 차이가 있었고, 제국의 기병은 기사를 익히지 않았다.
익히지 않는다는 말보다는 익히지 못한다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아 적을 맞추는 재주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기마술 자체에서부터 수준 차이가 상당했다.
힐데리트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군터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더 잘할 수 있는 쪽을 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퍼억!
퍼퍽!살라스와 할렌이 이끄는 병력은 후방으로 정찰을 나왔던 적병들을 급습해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미리 엄폐할 수 있는 곳에 숨어 있다가 단번에 뛰쳐나가 정찰병들을 제거하니,군터가 이끄는 본대가 적에게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가지."
정찰대로부터 신호가 끊긴 것을 적이 알아차리기 전에 쳐야 한다. 군터와 병사들은 바람처럼 말을 달렸다. 그렇게 얼마 달리지 않아, 선두에서 달려 나가던 군터가 희미하게 보이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했다.
'흐트러져있다.'
초인적인 시력으로 적의 대열이 흐트러져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자유분방하게 흐트러져 있는 것이 아닌, 지친 것처럼 군기가 꺾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두두!
적들이 뒤를 돌아보기 전, 군터는 세 대의 화살을 쏘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후에 다시 두 다섯 대의 화살을 쏘았다. 빗나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노린 대상의 숨통을 끊어놓지 못한 것 역시 하나도 없었다. 놀랄 수밖에 없는 결과였으나 군터는 덤덤했다. 빗나갈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탓이다.
'이것으로 확실해졌군.'
이전부터 그의 몸은 반쯤은 인간을 벗어나 있었다. 그때도 충분히 '초인적'이라 할 수 있었던 육신이 죽음을 건너오며, 칸젤과 하나가 되며 완전히 틀을 깼다.
꾸욱!
어지간한 장정이 온 힘을 다해야 간신히 잡아당길 수 있을 만큼 억센 활의 시위가, 특별히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가볍게 뒤로 당겨진다.
쒜엑!
쏘아지는 화살의 궤적에 군더더기는 없으며, 목표를 벗어나는 일 또한 없다.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순간, 빗나가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적이다!"
"추격군이다!"
적들이 당황하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도적 떼가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인지, 그런 움직임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잘 조련된 정예군에게서만 엿볼 수 있는 침착함과 신속함이었다.
그러나 군터의 눈에는, 그런 기민함조차 느릿하게 보였다.
피잉!
두 대의 화살을 더 쏘고서, 군터는 창을 들었다. 칸젤이 사라지면서 손에 쥘 병기가 없어진 그가 최대한 칸젤과 비슷한 모양으로 주문한 새로운 창이었다.
거금을 들여 솜씨 좋은 장인에게 의뢰했기에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들었지만, 팔의 연장선상과 같이 느껴졌던 칸젤에 비하면 아무래도 손색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막 손에 쥔 창이 십여 년 간 다룬 칸젤과 같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지금부터 천천히 손에 익혀 가면 된다. 그렇다 해도 결국 칸젤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서걱!
적이 목을 베기에는 충분하다.
*
군터의 전술은 간단했다. 간단하다 못해 무식할 정도였다.
대장이 선봉이 되어 무작정 적을 향해 돌격하고, 부장 둘이 각기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좌우로 나뉘어 적의 측면을 찌른다.
'이 무슨 무모한!'
병력과 상황의 우세가 있다 한들, 대장이 가장 먼저 적의 창칼을 향해 뛰어들다니. 힐데리트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적을 향해 달려가는 군터를 보며 기함을 했다. 그리고 허겁지겁 병사들을 이끌고 그의 뒤를 따랐다. 살라스와 할렌이라는 군터의 수하 부장들이 좌우로 뛰쳐나가는 것을 본 직후였다.
'전군이 보조를 맞춰야 할 것이 아닌가! 이래서야 백 명으로 적을 치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무공에 자신이 있다 해도 이건 아니다. 이건 용맹이 아니라 무모이며, 만용이다. 혹 자칫 잘못하여 대장이 적의 칼에 베이기라도 한다면……!
그런 힐데리트의 당연한 걱정은, 그가 미처 합류하기도 전에 귀가 아플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외침에 날아가 버렸다.
"적장의 목을 베었다!"
'무슨!'
군터가 적을 향해 돌진해 들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와 비슷하게 놀랐다. 믿을 수 없어 흐릿하게 보이는 곳을 쳐다보니, 창끝에 수급처럼 보이는 것을 꽂아 높이 들어 올린 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쳐라! 비열한 약탈자 놈들을 모조리 섬멸해라!"
힐데리트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밀집하여 달리던 병력을 좌우로 넓게 분산시키고, 적을 덮어 싸듯이 공격해 들어갔다. 그가 압박함과 동시에 좌우로 나뉘어 나갔던 살라스와 할렌이 혼란에 빠진 적의 양 측면을 찔렀다.
그리고 중앙에서는 군터가 적장의 수급을 창끝에 단 채 사납게 날뛰었다. 그가 한 번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적이 피를 뿌리며 갈라졌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달아난 적은 한 명도 없었다. 심문을 위해 남긴 몇 명만이 목숨을 부지했고, 나머지는 모두 목을 잃거나 그와 비슷한 꼴이 되어 땅에 몸을 뉘었다.
"대승입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힐데리트가 이리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적을 말 그대로 완벽하게 섬멸했다. 그런 와중에 피해는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만만치 않은 저항을 예상하고 테리브란을 떠났던 힐데리트로서는 지금의 이 결과가 믿기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는 군터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사과라니. 무엇을 말이오?"
"장군께서 홀로 적을 향해 돌격하실 때, 만용이라 생각했었습니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인들 못하겠소."
"나름대로 무인이라 자부하면서도 보는 눈이 없었으니,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쯤 하시오. 고개까지 숙여가며 사과할 일은 아니오."
군터의 말에 힐데리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아직까지 열기가 식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군의 무공에는 정말 탄복했습니다. 소문으로 들은 이상입니다. 저는 이제껏 장군과 같은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조력자이자 감시자의 역할로 따라붙은 힐데리트는 이제 대놓고 군터에게 호감을 드러냈다. 그는 군인이지만 동시에 무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강자에게 마음이 끌렸다.
게다가 군터는 이제껏 본 적 없는 강한 무인이면서, 동시에 조금 과격하긴 하지만 훌륭한 군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거기에 성격 또한 현재까지만 놓고 보면 특별히 모난 구석이 없었으니, 힐데리트가 호감을 갖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런 자를 제레이스가 놓칠 리가 없지.'
힐데리트는 확신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사내가, 조만간 제레이스 가문의 식사자리에 초대를 받게 될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