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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17화 (417/1,064)

417화

"도적이라고 뭉뚱그려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깃발을 내리고 신분을 숨긴 채 숨어든 오젠(2황자가 다스리는 제국의 주)의 병력일 수도 있지요."

지금은 전시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못할 짓이 없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첩자들이 국경을 넘다 죽어나가고 있을 것이고, 서로의 땅에서 암약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칼들이 여럿일 것이다.

도적의 무리로 위장해 약탈을 자행하거나, 후방을 교란하는 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런 행위가 발각이 된다면 크게 위신을 깎아먹겠지만, 이런 부류의 일들이 다 그러하듯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으니까.

"우리가 토벌해야 하는 놈들은 어떻소?"

"도적의 무리라기에는 움직임이 기민합니다. 약탈 후에도 흐트러짐이 없고, 무엇보다 토벌군이 세 차례나 파견되었음에도 여전히 무사하다는 것만 봐도……."

보통의 도적 떼라면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세 번이나 토벌군이 파견되었음에도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평범한 도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젠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겠군."제레이스 가문은 사백의 병력을 붙여주었다. 군터가 이끄는 병사 백과 합쳐 도합 오백 가량. 도적 떼를 상대하러 가는 토벌군치고는 제법 큰 규모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 사백의 병력을 이끄는 지휘관은 힐데리트라는 이름의 무관이었다. 그는 이번에 군터의 부장으로서 토벌군에 참여했다.

군터가 처음 그를 보고 느낀 것은, 그가 꽤나 단련한 무인이라는 점. 그리고 사람이 신중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살라스와 비슷한 느낌이었으나, 제레이스의 무장이라 그런지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은연중 자부심이 엿보였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그는 처음부터 군터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리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아니면 지위에 따른 대접을 해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과 비슷한 연배이며 객장에 불과한 군터에게 상당히 깍듯한 태도를 보였다.

"놈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은 케인즈에른 부근입니다."

"그게 언제요?"

"닷새 전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벗어났겠군."

"그렇겠지만, 의미 없는 정보는 아닙니다. 놈들이 어느 쪽으로 움직였을지는 대충 짐작이 가니까 말입니다."

"그건 어째서요?"

"케인즈에른의 서쪽에는 군사 거점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소레딜 장군께서 지휘하시는 1만 병력이 상주하고 있지요."

울타마란 소레딜. 제국의 흑포 장군으로서, 7황자의 진영에 있는 이들 중 위계로 따지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높은 지위에 있는 자였다. 7황자는 그를 신뢰하여 1만의 군대를 맡겼다. 그의 주둔지가 바로 케인즈에른에서 서쪽으로 엿새거리에 있는 요새였고.

"아무리 겁 없는 놈들일지라도 죽을 자리인 줄 알면서 그쪽으로 가지는 않았겠지요."

"서쪽은 아니라는 얘기군."

"놈들이 처음 목격된 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갑니다."

그 말에 군터는 슬쩍 힐데리트 쪽을 눈짓했다. 느닷없이 자신들의 무능을 고백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해서였으나, 힐데리트가 그 말을 꺼낸 것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한 달이 넘도록 아군의 추격을 피해 다녔지요. 영리한 놈들입니다. 그런 놈들이니,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슬슬 돌아가려 할 거란 말이로군. 맞소?"

힐데리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특히 이번에 놈들이 벌인 짓은 이전에 벌인 일들에 비해 상당히 대담했지요."

남부 전선으로 향하던 보급 물자를 털었다고 했던가. 얼핏 듣기로는 호위 병력만 이백에 달했었다고 하는데…그럼에도 당해버렸다. 피해도 피해지만 자존심이 잔뜩 상한 데이븐랏지의 군부에서 본격적으로 손을 쓰려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간단하군."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습이었다고는 하나 이백이 넘는 보급부대를 몰살시킨 놈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놈들도 본격적으로 추격이 있을 것임을 예상하고 있을 테니 순순히 당해주지는 않을 겁니다."

"글쎄. 적을 얕잡아 볼 생각은 없지만…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소."

"……."

군터가 건성으로 대꾸하자 힐데리트는 잠시 침묵했다.

'이런.'

힐데리트는 이번에 그의 부장으로 따라붙기 전부터 군터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코누다이안의 기사였던 시절에 테리브란에 들렸을 때부터 말이다.

당시 그가 테리브란에 머문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가 교류했던 테리브란의 무인들을 통해서 그의 이름이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특히 군부 인사들의 입에 적잖이 오르내렸었다.

비록 자그마한 나라의 무인이라 하나, 결코 얕볼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무공을 지닌 자. 군인이기 전에 무인이라면 한 번쯤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힐데리트도 그 중 하나였고, 따라서 얼굴을 보기 전부터 그에 대해 어느 정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만한 자였던가.'

무인으로서는 확실히 뛰어난 자임을 알겠다. 처음 얼굴을 봤을 때부터 넘실거리는 거친 기세에 살짝 주눅이 들 정도였으니, 직접 칼을 부딪쳐보지 않더라도 그가 좀처럼 보기 힘든 강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뛰어난 무인이라고 해서 뛰어난 군인인 것은 아니고,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은 더더욱 별개의 문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벌써부터 적을 얕보는 투의 군터에게 힐데리트는 내심 실망감과 걱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켜보라 했지만, 여차하면 나설 수밖에 없겠군.'

본래 그의 임무는 군터라는 자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감시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그의 역량이라든지, 사람 자체를 관찰하고 파악하는 것이 주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뒷짐 지고서 관망만 하다가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이 오게 할 수는 없다. 어차피 지휘관이라고 한들 군터의 병사는 백 명에 불과하고, 자신의 병사는 그 네 배에 달하니 힐데리트는 만약의 경우 부관이나 관찰자가 아닌 주장(主將)의 역할을 할 생각이었다.

"우선은, 놈들이 경계를 넘어가기 전에 따라붙어야겠군. 당분간은 속도를 내야겠소."

"예."

당연한 말이라 간단하게 답했다. 그러나 군터가 말한 '속도를 낸다'는 것은, 힐데리트의 생각과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군터가 거느린 병력은 전원이 기병이었다. 그리고 그의 요청에 따라, 지원군 역시 전원 기병으로 꾸려졌다. 못해도 수 년 동안 말을 탄 이들이었고, 그렇기에 기동력에 있어서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이런 식의 행군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하루의 반 이상을 말 위에서, 그것도 달리는 말 위에서 보낸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말이 하루의 반 이상이지, 실상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의 거의 전부를 말 위에서 보내는 것이었다.

"장군. 이래서는 병사들이……."

"나름대로 여유롭게 움직이고 있소만…이마저도 힘드오?"

"……."

힐데리트는 녹초가 되어가는 병사들을 보다 못해 한 마디 했다가 본전도 못 찾고 물러나야 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군터 쪽의 병사들은 지친 기색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과장하자면 테리브란을 나올 때 모습 그대로였다. 안색이 누렇게 변하기 시작한 이쪽과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대단하다. 수는 적지만, 이들 모두가 백전의 정예들이다.'

처음부터 실전 경험이 풍부한 병사들임은 알아보았다. 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을 뿐. 말도 안 나오는 강행군 속에서도 여유로운 것하며, 그러면서도 주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날카로운 군기까지.

'오만이 아니라 자신이었나.'

첫날 군터가 보였던 자신감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지.'

그래도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처음보다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힐데리트는 지친 병사들을 살피러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과 오만이 판가름 날 시험의 시기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

"불을 뗀 흔적이 있습니다. 크기로 보아…이곳에서 밤을 보낸 것 같습니다."

흔적을 살피던 병사가 희미한 재를 손가락에 묻혀 살펴보며 말했다.

"얼마나 됐지?"

"이 정도면…대략 이틀. 아니, 하루 하고 반나절 정도인 것 같습니다."

병사의 말을 들은 할렌이 군터에게 향했다. 군터는 큼지막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루 하고 반나절 정도랍니다. 좀 더 서두르면 내일 해가 지기 전까지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병사들이 지쳤다."

그 말에 할렌이 힐끗 힐데리트와 그의 병사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치들 없이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놈들의 수가 대략 삼백 정도라는데…뒤에서 기습을 가한다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오늘은 날이 저물기 전에 쉴 곳을 찾는다."

"예?"

"하늘을 봐라."

할렌이 고개를 위로 꺾었다. 맑은 하늘에 점점이 깔린 구름이 동쪽으로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밤, 비가 올 거다."

"예에?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공기가 다르다."

"으음."

"어차피 놈들도 멀리 가지 못할 것이니, 괜히 병사들을 무리시킬 필요는 없다. 하루 정도 늦춰진다고 해서 놓치지는 않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공기가 다르다느니, 비가 올 것 같다느니, 할렌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군터의 결정에 순순히 따랐다. 어차피 그의 주인이 내리는 결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할렌이 물러가고, 군터는 다시 하늘을 올려 보았다.

'비라.'

할렌이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군터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의문은 할렌이 품은 것과는 조금 달랐다. 군터는 오늘 밤 비가 내릴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가 궁금해 하는 것은, 어째서 자신이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서였다.

'땅. 바람.'

형체가 없는 것들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마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했다. 그 속삭임은 어떤 뜻도 갖고 있지 않았으나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하늘 위에 흘러가는 구름의 움직임이나 불어오는 바람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힐데리트 공."

"예."

"오늘은 날이 지기 전에 멈출 것이오. 그러니 병사들을 푹 쉬게 하시오."

"알겠습니다."

군터는 병사들로 하여금 푹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따로 정찰을 보내거나 하지도 않았다. 병사들이 다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그늘진 곳을 찾아 쉴 것을 명하니 병사들이 모두 기뻐했다.

그리고 그날 밤. 제법 굵은 비가 날이 밝을 때까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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