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화
"그 자는 어찌 지내고 있느냐?"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알고 계시면서 뭘 물어보십니까?"
"네가 맞은 손님이 아니냐."
"우리 가문의 손님입니다."
"그렇게 쓸 만한 자더냐?"
"무인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자입니다."
"무부 따위, 어딜 둘러보더라도 발에 치일 정도로 넘쳐난다. 설령 그 솜씨가 흔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나다 해도, 무부는 무부일 뿐이야."
"군인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크렌 반군에서 칭송 받는 전쟁 영웅이었으니까요."
"그래봐야 근본 없는 야만인 놈들과의 교전일 뿐이었지."
"……."
사이주 제레이스는 쥐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고 맞은편의 사내에게 눈을 맞췄다.
"말씀해보십시오 형님.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괜한 일에 우리 가문이 번거로운 일을 자처하고 있는 듯해서다. 그 자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야."
"형님.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 보는 눈과, 사귀는 재주 하나만은 쓸 만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이건 결코 괜한 수고가 아닙니다. 손해 보는 일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형님. 지금은 난세입니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쓸 만한 칼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닙니까?"
"확신하는구나."
"확신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일을 벌렸겠습니까?"
"그래. 알겠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더는 의심하지 않겠다. 다만…나는 그렇게 넘어간다 하더라도,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이 여럿 있다."
"그렇겠지요."
"그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그 자는 어느 정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 게다."
"생각해두신 바가 있습니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곳저곳에서 잡스러운 소란이 일고 있지. 간단한 토벌 정도를 맡겨보면 어떠하냐."
"그 자는 휘하의 병력이 고작 백 남짓입니다."
"병력이야 보태주면 될 일이다. 보여야 할 것은 병력이 아니라 실력이지."
"으음."
사이주 제레이스는 고기를 썰고 있는 그의 형제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말한 것처럼 순수하게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주변에서 어떤 시선을 보내든, 무슨 소리를 수군거리든 개의치 않고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다이시리 판 제레이스. 제레이스 가문의 후계자이자, 연로한 부친을 대신해 이미 가문의 대소사에 깊게 관여하고 있는 그였다. 그런 그가 사람들의 시선을 운운하며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자연히 그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시험이겠지.'
생각을 해보았지만, 역시 떠오르는 답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
사이주 제레이스가 그를 불러 난처한 얼굴을 하고서 이야기를 꺼냈을 때, 군터는 내심 기쁨과 후련함을 느꼈다.
안 그래도 답답하던 차였다. 하는 일 없이 공짜 밥이나 축내며 칩거하다시피 박혀 있느라 몸이 근질근질했었다. 안 그래도 엊그제 살라스와 할렌이 와 병사들의 불만이 조금씩 생기고 있다 보고한 참이었다.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현재로서는 방도가 없어 그냥 엄히 단속하라고만 명령했었다. 그런데 그러기가 무섭게 이리 좋은 기회가 찾아오다니.
그렇다. 이것은 기회였다. 그간 쌓인 답답함도 풀고, 무엇보다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
"이번 일을 잘 해낸다면 자네를 보는 시선들도 달라질 것이네. 더 이상 답답하게 저택 안에만 있을 필요도 없어지겠지."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하하. 자신 있나?"
"공께서 소관을 믿어주신 만큼, 보여드리겠습니다."
"기대하겠네."
사이주 제레이스에게 이야기를 들은 직후, 군터는 그의 수하들을 불러 모았다.
"…그렇게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수하들 역시 그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다들 참고 있었지만, 어지간히 몸이 근질거렸으리라.
"우리끼리만 움직이는 것입니까?"
"아니. 얼마의 병력을 더해줄 모양이다."
"합도 맞지 않는 녀석들과 같이 움직이면 괜히 거슬리기만 하지 않겠습니까?"
"할렌의 말대로입니다. 어차피 상대가 도적 무리라면, 수가 적더라도 우리끼리 움직이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자기들끼리 결론을 내버릴 것 같이 주고받는 할렌과 살라스.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의견에 동조할 때, 야스메티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아마 그러기는 힘들 겁니다. 우리와 함께 움직일 병력은 우리를 돕는 역할도 하겠지만, 동시에 감시의 역할도 할 테니까요. 우리는 아직 저들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이방인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군터가 야스메티의 말을 받았다.
"야스메티의 말대로다. 오랜만의 외유에 들뜬 것은 이해하지만, 긴장감을 가지도록 해라."
그 한 마디에 풀어졌던 분위기가 칼처럼 날카롭게 벼려졌다.
"나는 이번 일을 나에 대한 시험이라 보고 있다. 동시에 기회라고도 보고 있다. 이번 일을 잘 처리한다면 우리를 향한 의심의 시선을 거둘 수 있다. 동시에 의심스런 이방인 신세에서도 벗어날 수 있겠지. 그러니…모두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있는 힘껏 따라와 주길 바란다."
"옛!"
*
야스메티는 자신을 찾은 형제, 바오룸을 반갑게 맞았다.
"형님. 어쩐 일로."
"그간 우리 형제가 따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드물지 않았느냐. 조만간 바람도 쐬게 될 터인데, 그 전에 속이나 풀어놓자고 들렀다."
"하하. 속에 무엇을 그리 쌓아두셨기에……."
"몰라서 묻느냐. 그간 답답한 일들 투성이었지 않느냐. 일이 이렇게도 꼬일 수 있다는 것을 내 이번에 처음 알았다."
"……."
바오룸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야스메티가 내온 술을 단숨에 들이켠 그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깊어 속에 묻어두었던 생각을 털어놓았다.
"난 나와 나를 따르는 이들의 미래가, 군터라는 사람의 아래에서 시원하게 펴질 줄만 알았다. 확신했었지. 그는 내가 이제껏 본 사람들 중 단연 최고였으니까."
"그분께서는 평범한 분이 아니시지요."
"그래. 그래서 난 그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내 모든 걸 내려놓고서 말이야. 잘한 결정 같았지. 그렇게 한 이후로 막히는 일 없이 모든 것이 술술 풀려갔으니까."
코누다이안 내에서 군터의 명성은 높아져만 갔고, 그의 영향력 역시 영주를 제외하면 비할 자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명실상부 영지의 이인자인 그의 아래에서, 바오룸 역시 그의 선택에 대한 결실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앞날을 아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속 편하게도 말하는구나. 너와 내 처지가 다르지 않은데 말이다."
영화를 누리던 과거는 한탄으로 남았다. 지금은 갈 곳조차 없는 영락없는 도망자 신세다.
물론 그렇다 해서 군터를 탓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탓한다면 배신자 미겔 놈을 탓하던가, 죽은 줄 알았더니만 멀쩡히 살아있다던 영주를 탓해야 할 터. 하지만 그건 그거고, 현재의 신세가 답답한 것은 답답한 것이다.
"그래서, 제게 조언이라도 구하고자 오신 겁니까?"
"해준다면 사양치 않지."
"하하하. 형님도 화술이 제법 느셨습니다."
"보고 듣는 대로 배운 것이다. 이방인이 되지 않으려면 그리 해야지."
투덜거리는 말에 야스메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주 좋습니다. 앞으로도 쭉 그리하셔야 합니다. 음…그나저나 조언이라."
"해줄 말이 없다면 술이나 마시자꾸나. 그게 내가 오늘 널 찾은 이유이니."
"조언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형님을 위해 한 마디만 해드리지요."
"…해 보거라."
"상황을 믿지 말고 사람을 믿으십시오."
"무슨 말이냐?"
"새가 잠시 날개를 다쳐 땅에 내려앉았다 칩시다. 상황을 본다면 새는 날 수 없다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날개를 다쳤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잠시 내려앉았다 해서, 지금 잠시 날지 못한다 해서 그 새가 앞으로도 계속 날지 못하겠습니까?"
"아니겠지."
"날개가 어느 정도 낫게 된다면 새는 다시 날갯짓을 할 겁니다. 그리고 높이 날아오르겠지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상황을 믿는다면 새가 날지 못하는 그 상황만을 놓고서 앞으로도 새가 날지 못할 것이라 여겼을 겁니다. 하지만 새 자체에 집중했다면 언제고 접힌 날개가 다시 펴질 것이라 여겼겠지요."
"장주님이 그 새란 말이냐."
"생각하기 나름이겠지요. 새라고 믿는 자에겐 새로 보일 것이고, 늑대라 믿는 자에겐 늑대로 보일 것입니다."
"어지간히도 꼬아서 말하는구나. 그저 장주님을 믿으라는 말 한 마디면 족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떻게 꼬아 말한다 해도 형님께서 잘 이해하실 거라 믿었기 때문이지요."
바오룸이 쓰게 웃었다.
"이번 일을 마치면, 정말로 제레이스가 우리에게 힘을 실어줄 것 같으냐?"
"예."
"어떻게 그리 확신하지?"
"간단한 문제입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그럴 만한 가치나 이유가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가치와 이유라."
"난세가 아닙니까. 게다가 저들은 지금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휘두를 수 있는 칼이 단 하나라도 더 필요한 시점이지요. 그런 판에 이미 검증이 된, 명검이라 할 수 있는 물건이 눈앞에 떨어졌으니 마음이 쓰이지 않겠습니까?"
"허면 저들이 어째서 우리를 그동안 이리 썩히고 있었던 것이냐?"
"칼이 손에 쥘 만한 칼인지 아닌지를 먼저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칼이라 한들 내 살을 벨 칼이라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하지요."
"…복잡하구나."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면, 처음부터 시간의 문제였을 뿐입니다. 제레이스가 우리를 받아들일 것은 처음부터 자명했습니다. 다만 그 시기와 조건이 조금 불확실했지요."
"영주의 문제 말이냐."
"그건 예상하지 못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여러 요인 중 하나가 되었지요."
"그건 그렇고, 저들이 우리를 의심할 이유가 있더냐? 어차피 우리는 백 명이 조금 넘는 도망자 무리에 불과한데 말이다."
자기 비하 같지만 냉정하게 따져 그것이 현실이었다. 고작 백 명 가량의 병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레이스 가문의 대소사는 후계자인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사이주 제레이스의 형이지요."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단 말이냐."
"그가 의심을 했다면, 그건 우리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동생에 대해서였을 겁니다."
"사이주 제레이스 공을?"
"후계구도야 진작 정해졌다지만, 그렇다 해도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아직 제레이스의 당주가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일견 단단해 보여도 실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서, 자그마한 바람에도 큰 소리를 내는 법이지요."
야스메티가 흐릿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