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화
사이주 제레이스에게 들은 이야기를 군터는 가장 먼저 그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야스메티가 물었다.
"믿으십니까?"
"믿지 않는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하지만 확인은 해봐야겠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저희가 할 일은 아닙니다. 확인은 저들이 알아서 해줄 것입니다."
"어떻게 말인가."
"간단한 일입니다. 사절을 파견하여 살펴보면 될 일이지요."
"영주를 알고 있던 자들도 분간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제레이스 가문도 그것을 고려할 것입니다."
"……."
"혹 영주가 정말로 살아있을까 마음에 걸리십니까?"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지. 만약 영주가 살아있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미겔이 아니라, 영주가 꾸민 일일 수 있겠지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생각해보면 일의 시작은 영주의 서신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영주의 신변에 이상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무리하여 위글로우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미겔의 매복에 당했다. 지금까지는 그저 미겔이 일을 벌였다고만 생각했었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 한다면.
'나에 대한 숙청.'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지만, 영주가 정말 살아있다고 한다면 그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요. 가뜩이나 군부의 신망이 두터웠던 장주님께서 큰 전공을 세우셨고, 영주가 병을 얻었다 한다면…어린 후계자를 위해서 후환의 싹을 잘라버리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다.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을 떨칠 수 없는 것은, 그 말도 안 되는 가정이 근거를 가지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그러니까 영주가 장주님을 함정에 빠뜨렸고, 숙청하려 한 것이었다면…장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니,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어떻게 하고 싶으냐고. 그거야 뻔한 것이 아닌가.
"복수해야겠지."
"방도가 없습니다. 장주님께서는 지금 제레이스 가문의 객장 신분에 불과합니다. 그나마도 위태로운 처지지요. 그런데 어찌 타국의 영주에게 칼끝을 댈 수 있겠습니까."
"……."
"만약 이것이 계획된 숙청이었다면, 영주는 준비를 했을 것이고, 지금쯤이면 모든 작업을 끝냈을 것입니다.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는 합당한 명분까지 곁들여졌을 것이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콰드득!
군터의 손에 들려있던 잔이 단박에 깨지고 으스러졌다. 날카로운 조각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 피가 흘렀다. 그러나 군터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뒤로 꺾었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확실해진 것은 없다. 그렇지 않나?"
"그 말씀이 옳습니다. 아직은 아무것도 확실치 않지요."
"기다리겠다. 어차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밖에 없지 않은가."
"좋은 말씀을 올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방도를 궁리해보겠습니다."
"무슨 방도 말인가."
"만약 영주가 정말로 살아있고, 그가 일을 주도한 것이라면…우리 쪽도 제레이스 가문에 할 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
"발머 전선에서의 전갈입니다. 적의 공세에 밀려 성을 버리고 헤바르까지 군을 물렸다고 합니다."
"나흘을 못 버티는군."
"그쪽에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알고 있다. 방도가 없었으리라는 것을. 그가 화가 나는 건 그들의 무능에 대해서가 아니라, 패배 그 자체에 관한 것이다. 또한 뜬금없이 남의 전쟁에 끼어든 노망난 괴물에 대한 것이다.
제국 7황자. 자콥 엘 트라소프는 탁자 위의 지도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전하."
"말하라."
그의 심기가 좋지 않을 때 말을 거는 것은 금기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7황자에게 말을 건 자는 그런 금기에서 자유로운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였다. 그것은 그가 아록을 다스리는 카리아 가문의 일원이며, 이번 전쟁에 직접 2만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합류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그가 설치도록 놔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놔두지 않으면?"
"제게 1만 군사를 주신다면 헤바르로 가 그와 맞서겠습니다."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에 답하는 7황자의 목소리는 냉소적이었다.
"의욕은 좋다만, 용맹과 만용은 구분하라."
"그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버티는 것에 집중한다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만용이라는 거다. 너와 같은 생각을 한 자들이 이제껏 없었는 줄 아느냐.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도 없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마음먹은 대로 해내지 못했지. 왜 그런 줄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너와 같이 만용을 부렸기 때문이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서, 나라면 뭔가 다를 거라는 착각에 빠진 채 군사를 부렸기 때문이야. 설령 내가 네게 군사를 내어준다 해도, 그건 최소한 그 어깨에 들어간 힘이 빠진 후일 것이다."
"……."
대놓고 무안을 당한 사내, 에단 카리아가 얼굴을 붉혔다. 그는 혀를 차는 7황자에게 고개를 숙인 뒤 자신의 뒷걸음질로 자신의 자리에 돌아갔다.
"룬차이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지원만 충분히 해주어라.
어차피 그 늙은이가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할 생각이 없어. 필요 이상으로 날뛰지는 않을 것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 모두들 착각하지 마라.
이 전쟁에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늙은이의 목이 아니라 저 뒤에 꽁꽁 숨어 있는 어리석은 형제 놈의 목이야. 늙은이의 이름값에 짓눌려서 오판을 하지 말란 말이다."
"옛!"
군사회의를 마치고 신하들이 다 빠져나가자, 조용히 옆에 시립해 있던 부관이 말을 전했다.
"전하. 테리브란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제레이스인가?"
"예."
서신을 건네받은 7황자는 봉인을 뜯고 빠르게 서신의 내용을 훑었다. 살짝 찌푸린 채로 서두를 읽어 내려가던 그는 서신의 끝에 이르러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재미있군."
"뭐라고 합니까?"
"코누디스가 살아있다고 한다."
"예?"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말이다."
"그 정도 인사의 생사를 두고 혼동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까?"
"애초에 군터라는 녀석의 말 한 마디였을 뿐이다. 놈이 헛소리를 한 것이라면…그럴 수도 있지."
"…제레이스가 전하의 하교를 기다리겠군요."
"알아서 하라 전해라."
"그렇게만 전하면 되겠습니까?"
"지금은 내가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관까지 물러가고 홀로 남은 7황자는 전세를 그린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다 잠시 쉬기 위해 자리에 앉았을 때, 문득 일전에 보았던 당당한 무인을 떠올렸다.
'허튼 소리를 할 놈 같지는 않았는데.'
가볍게 건넨 것이라지만, 자신의 권유마저도 단박에 뿌리칠 정도로 기개가 있는 자였다. 그런 자가 시시한 이유로 주인에게 쫓겨날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과 같은 때만 아니었다면 조금 더 관심을 두었으련만.'
북쪽의 일도 조금은 흥미가 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그의 발은 이 전장에 단단히 묶인 상태였다.
'제레이스가 알아서 하겠지.'
그 정도 일쯤은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런 능력도 없었다면 아무리 친족이라 한들 도성을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문득 든 생각을 정리한 그는 다시 지도로 시선을 가져갔다. 여기저기서 발생한, 그의 결정을 기다리는 이런저런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
군터는 사신이 코누다이안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베이고르로 향하는 것이지만, 그들이 베이고르로 향하는 주목적 중 하나는 코누다이안에 들러 영주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런 사신의 파견에 제레이스 가문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음은 물론이었다.
"솜씨 좋은 술사를 대동시켰네. 만약 그들이 무언가 손을 썼더라도 능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야."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이건 자네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네. 자네를 받아들인 것이 우리이니, 우리는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해."
"그렇다 해도 제가 제레이스 가문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하하. 그리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다면, 그리 해도 좋네."
사이주 제레이스는 언젠가부터 '우리'라든지 '가문'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다. 군터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지만 별 거부 없이 순응했다. 어차피 제레이스 가문의 손을 잡고 망명을 한 마당에, 그들의 그늘 아래 든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다. 게다가, 그들의 손을 잡는 것이 군터로서도 더 이득이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을 주십시오. 그리고 장주님께서도 그들로부터 바라는 것을 얻어내십시오.'
야스메티는 그들과의 관계를 협력 관계라 이야기했다. 물론 그런 표현이 그의 기분을 상하지 않기 위해 어느 정도 다듬은 표현이라는 것을 군터도 알았다.
하지만 군터는 진심으로 그렇게 여겼다. 제레이스 가문이 베푼 것에 보답한다. 그들에게 빚진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보답하고 자신 역시 제국에서의 기반을 닦는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자신을 은근히 수하처럼 대하기 시작한 사이주 제레이스. 군터는 호탕하게 웃는 그를 보며 꿈틀거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
"영주님. 7황자의 사신 일행이 외성문을 지났다고 합니다."
"…그래. 알았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흐릿한 눈동자가 정면을 향했다.
눈을 뜨고 있으나 그 눈은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눈길이 닿는 곳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사신이 내성문을 지났습니다."
잠시 후 다시 보고가 들어왔다.
그때도 그는 변함이 없었다.
"…이제 일어나셔야지요. 사신이 곧 당도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라일라가 그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래. 그래야지."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문이 열리고, 7황자의 사신단이 그의 앞을 향해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