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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14화 (414/1,064)

414화

군터는 사이주 제레이스와 함께 테리브란에 도착했다. 이전에도 한 번 와본 적이 있었고, 웅장하다 생각했었으나 지금 다시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그때는 다시 떠날 손님으로 왔었지만, 지금은 이곳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은 내 집으로 가세. 병사들을 위한 숙소도 잡아놓았으니 그곳에 가 쉬게 하고."

"공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처지가 빈궁하여 부득이하게 뻔뻔해질 수밖에 없는 점, 양해해주시길."

"하하. 그리 어려워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도 이제 우리와 한 식구가 아닌가."

'한 식구라…….'

군터는 그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듣기에는 따뜻하고 좋은 말이지만, 가만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다분히 계산적인 말이었다. 군터는 야스메티로부터 이미 언질을 받았기에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망명이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군터는 7황자의 사람이 됨과 동시에 제레이스 가문의 사람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군터가 사이주 제레이스에게 서신을 보냈을 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도망자 신세의 군터를 꽁꽁 숨겨두고 은폐한다면 모를까, 군터라는 이름이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면 사이주 제레이스는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져야만 한다.

아무리 사이주 제레이스가 군터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 해도 그가 자신의 재량만으로 군터와 그의 무리를 받아들여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군터의 망명 요청을 받아준 것은 사이주 제레이스 개인의 결정이 아닌 제레이스 가문의 결정이라 봐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이주 제레이스가 한 '한 식구'라느니, 자신의 집에서 머물라느니 하는 소리도 정감 가는 말로만 들리지는 않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다 감안하고서라도, 군터는 사이주 제레이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어찌 되었건, 그가 갈 곳 없는 자신과 자신의 무리를 친절히 반겨준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와서 이런 말을 하기는 겸연쩍지만, 당분간은 이곳에서 조용히 있어줘야겠네. 아직 자네에 대한 결정이 나지 않았거든. 나와 우리 가문, 그리고 우리 가문과 함께하는 이들은 자네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지만…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어서 말이야. 쓸 데 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자들이 있어. 그들을 설득할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네."

"알겠습니다."

"그래. 불편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이야기하도록 하게."

"예."

사이주 제레이스와 대화를 나눈 군터는 수하들에게 일러 병사들을 잘 단속하게끔 했다. 굳이 따로 말하지 않더라도 자중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만, 강조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만큼 중요한 시기니까.군터는 사이주 제레이스의 배려로 가족들과 함께 그의 저택에서 불편함 없이 머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이주 제레이스는 군터를 배려하여 그의 저택에 딸린 연무장까지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군터는 그곳에서 보리스와 함께 땀을 흘리며 사이주 제레이스가 말한 '논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따악!

가볍게 휘두른 일격을 받아낸 보리스가 거칠게 땅을 뒹굴었다. 힘에서 압도당하기도 했고, 충격을 분산시키면서 거리를 벌리기 위해 일부러 몸을 띄운 것이었다.

군터는 급하게 따라가지 않았다. 평범하게 걸음을 옮기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보리스의 얼굴은 이미 온통 땀으로 젖었고, 두 다리는 바람을 맞은 잎사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흠."

뻔히 보이는 찌르기. 그 한 방으로 끝이었다.

보리스는 피하지 못했고, 막았으나 견디지 못했다.

검을 놓치고 쓰러진 아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군터가 손을 내밀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숨을 헐떡이던 보리스가 그 손을 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하아…하아…이래서는 대련의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차이가 나도 너무 나지 않습니까."

간단한 베기와 찌르기조차 필살의 각오로 던지는 일격처럼 느껴졌다. 보리스가 힘 빠지는 소리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네 마음이 꺾였기 때문이다. 방도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뿐."

"……."

"네가 상대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적을 맞닥뜨렸다 해서 그냥 목을 내밀 셈이냐? 무슨 수를 써서든지 이길 수 있는,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야 할 것이 아니냐."

"…아버지의 말씀이 옳습니다."

속으로까지 납득을 한 것인지, 겉으로만 그리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군터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전적으로 보리스의 몫이었다.

"……."

체력이 완전히 고갈되어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보리스를 쉬게하고, 군터는 홀로 수련에 열중했다. 사실 말이 수련이지, 실제로는 점검에 가까웠다. 죽었다 살아난 이후, 칸젤을 흡수하고 몸을 회복하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 무엇이 얼마나 변했는지조차 알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군터는 '새롭다'라고 말해야 어울릴 자신의 몸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이 변화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이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직 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완력, 지구력, 순발력. 말 그대로 모든 신체 능력이 향상됐다. 이 이상 나아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전에도 이미 초인적이었던 육체가 더욱 강해졌다.

뿐만 아니라, 기운의 수발 역시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사기를 다루는 것에 이제는 그 어떤 어려움도 없었다.

해보지는 않았지만, 군터는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 술법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칸젤에 기대야 했던 모든 것을 이제는 맨손으로도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표현이지는 모르겠으나, 모든 면에서 발전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이 묘하게 허전한 것은, 십 년이 넘도록 다뤄온 애병(愛兵)을 이제는 손에 쥘 수 없다는 상실감 때문이리라.

"군터 경."

계속 연무장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저택의 무인 중 한 명이 찾아왔다. 사이주 제레이스의 부름이었다.

*

"어떤가 군터 경. 좀 지낼만한가?"

"배려해주신 덕분에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내 집이다 생각하고 지내게. 물론 힘들겠지만, 이곳에서만큼은 그만큼 편하게 있어도 된다는 뜻이야."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런데…그 논의는 어찌 되었습니까? 이제 결론이 났는지."

"아아. 그래. 그것에 대해서 내 할 말이 있네. 사실 그 때문에 불렀어."

사이주 제레이스가 말하다 말고 뜸을 들였다. 그의 반응에 군터는 혹시 논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가 생각했으나, 이어진 말은 그의 예상 밖이었다.

"군터 경. 자네가 서신을 통해 전한 이야기와…나와 만나 직접 나눈 이야기들 중에 거짓은 없는 것이겠지?"

"…거짓이라 하심은?"

"뭐든지 말이네. 나는 자네에게 들은 이야기를 믿고 이 일을 맡은 것이야. 그러니 내게는 솔직해져도 좋네. 자네가 이제껏 내게 한 말들 중에 혹 거짓이나, 아니면 확신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가?"

"무엇 때문에 그리 물어보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없습니다. 제가 한 그 어떤 이야기에도 거짓은 없습니다. 확신하지 못하는 부분 역시 없고 말입니다."

"으음. 그래? 그렇단 말이지……."

사이주 제레이스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혀를 찼다.

군터는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약간의 불쾌함을 느꼈다.

"어찌 된 일인지 연유라도 알 수 있겠습니까."

"아. 미안하군. 나도 모르게 잠깐 다른 생각을 했어.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이네. 내가 왜 자네에게 이런 질문을 했냐면…한 가지, 보고가 들어와서야."

"보고?"

"코누다이안에 보냈던 첩자로부터의 보고네. 그에 따르면, 코누디스 자작이 살아있다더군. 자네가 미겔이란 자에게 죽었다고 이야기했던 그 막시밀리언 코누디스 자작 말이야."

이 순간만큼은 군터도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되묻는 목소리에도 약간의 떨림이 묻어나왔다.

"그럴 리가……. 무언가 잘못 된 것이 아닙니까?"

"위글로우에서 있었던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더군. 몸이 성치는 않아 보였지만 틀림없는 코누디스 자작이었다고 하네."

"……."

"비슷하게 생긴 가짜라고 믿고 싶어도 말이지, 그곳에서 코누디스 자작을 본 눈이 너무 많아. 게다가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이전에도 코누디스 자작을 몇 번씩 본 적이 있는 이들이란 말이지. 그들이 모두 눈이 어찌 되어 가짜를 못 알아봤으리라는 가정은…무의미하지."

"……."

"코누디스 자작이 살아있네 군터 경. 때문에 지금 내 입장이 조금 난처해졌어."

"그럴 리가 없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걸 겁니다."

"자네가 느끼는 혼란스러움을 이해하네. 자네 스스로, 자네가 내게 해준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고 있었다면 지금의 이런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겠지. 그러나 나 역시 자네 못지않게 당황스럽다는 것을 알아주게. 아무튼 그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자네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게 되었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

"무슨 시간 말입니까?"

"알아봐야지. 어찌 된 일인지. 코누디스 자작이 정말 살아있는지. 그리고 코누다이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또 벌어지고 있는지."

사이주 제레이스가 골치 아프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일단은 지금처럼 지내고 있게. 무언가 새로 알게 되거나, 상황이 바뀌게 되면 곧바로 알려주도록 하지."

그리 말한 사이주 제레이스가 자리를 뜨고도, 군터는 한동안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생각할 시간이,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살아있다고?'

죽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만약 영주가 살아있었다면 미겔이, 그 계집이 어찌 그리 날뛸 수 있었겠는가.

'만약…살아있는 것이 맞다면.'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일들은 어찌 설명해야 하는가. 그리고 자신은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여러 가지 생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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