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화
낮에는 숨어서 휴식을 취하고, 밤에는 이동하며 남쪽으로 향한 그들은 국경이 가까워져 왔을 때 무구와 말 등을 점검하며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정작 국경을 넘는 일은 걱정했던 것만큼 어렵지 않았다. 야음을 틈타 국경을 넘었을 때, 뒤늦게나마 쫓아오는 병사들마저 없었다.
"너무 허술하군요. 이래서야 국경이라 할 수 있는지."
살라스가 중얼거렸다. 허탈한 기색이었다. 국경을 넘기 전, 오랫동안 칼날을 손질했던 살라스였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손질한 칼 한 번 뽑지 않고 이렇게 풀려버리니 허무하기도 할 것이었다.
"제국 7황자와 2황자의 전쟁은 온 베이고르의 관심사요. 특히 7황자의 영토와 직접 맞닿고 있는 코누다이안은 더하지. 국경의 지휘관과 병사들 역시 귀가 있어 그 사실을 모르지 않으니, 마음이 느슨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요."
니클라스의 말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완전히 썩었군요. 뭐, 우리로서는 좋은 일입니다만."
할렌이 뒤쪽 저 멀리 보이는 국경선을 일별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곧 모두의 마음이었다.
"이제부터는 제국입니다. 미겔이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 챘다고 해도 더는 손을 쓰지 못할 겁니다."
야스메티가 말했다.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무관들과 달리, 그의 얼굴에서는 피로가 역력하게 묻어 나왔다. 제국에서 급히 돌아온 것을 시작으로 한 번도 쉬지 않고 바쁜 나날들을 보낸 그였다.
"사이주 제레이스 공이 직접 마중을 나온다 했으니, 약속장소로 향하다 보면 조만간 그의 사람이 우리를 찾아올 겁니다."
군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얼마나 걸리겠나?"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곳은 그들의 땅이니까요. 제국은 모르겠으나, 7황자는 허술한 자가 아닙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자신의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겁니다."
"그는 전장에 나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전장에 나가 있으면서도 후방의 일까지 다 살핀다 하더군요. 물론 과장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았습니다. 7황자는 정말 흔치 않은 걸물입니다."
7황자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데는 군터 역시 동의했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 지금 치르고 있는 전쟁에서는 적잖이 고생을 하고 있는 듯했다.
"만약 7황자가 이번 전쟁에서 진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리 되면 골치 아파지지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야스메티가 인상을 찡그렸다.
"다만 소인의 소견으로는,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어째서인가? 2황자의 진영에는 제국의 군주가 합세했다 하지 않았나."
"그렇기는 하지만, 그는 이 전쟁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군주가 있다 한들, 결국 이 전쟁에서 그의 역할은 칼입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뛰어난 칼 역시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한 것이 이 머리지요. 양 군의 머리는 각기 2황자와 7황자. 둘 중 어느 한 쪽을 택하라 한다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하겠습니다."
군터는 슬쩍 야스메티를 눈짓하고 나직이 말했다.
"단언하지 마라. 확신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다. 전쟁에서는 더더욱."
"깊이 새기겠습니다."*
*
미겔은 아주 질 나쁜 농담을 들은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말해봐라."
"군터가…살아있다고 합니다."
보고하는 수하도 불신에 찬 얼굴이었다. 일단 들은대로 전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놈들, 도망을 다니는 와중에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니냐?"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희한하게도, 모든 놈들이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자기네 대장이 멀쩡히 살아있었다고요. 게다가 직접 베르츠 부대장의 목을 베었다는군요. 니클라스 놈에게 합세해서 말입니다."
"……."
미겔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베르츠가 당했다?'
며칠 째 소식이 끊어졌을 때부터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도망친 쥐새끼들에게 목덜미를 뜯길 수 있는지는 짐작도 할 수 없지만, 어쨌든 당했으리라고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여기서 죽은 놈의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헛소리라고 치부하려 해도, 백 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 입을 맞춘 듯이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면 이건 조금 생각해봐야 할 문제였다.
'죽은 놈이 살아났을 리는 없지.'
놈의 목을 직접 친 것이 자신이다. 놈의 목에서 피가 새어나오는 것과, 놈의 몸뚱이가 차갑게 식은 것까지 똑똑히 지켜봤었다. 놈의 숨이 멎은 것을 직접 코에 손을 가져다 대어 확인했단 말이다.
놈은 죽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놈이 살아났다는, 탈영병들의 말은 개소리임에 틀림없다. 다만.
'병사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그런 이야기가 내 귀에 들어오도록 만들 수는 있겠지.'
자신에게, 그리고 위글로우에 있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심기 위해서 말이다.
'살라스. 그 놈이 살아있지. 그놈이 수작을 부린 것일 터.'
사람의 눈은 단순하며, 기억은 그보다 더 단순하다. 비슷하게 꾸민 놈을 내세워 군터라는 이름을 불러주면,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는 착각할 수도 있다.
'뭔가 일을 벌일 참인가.'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나, 걱정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되돌릴 방법은 없다.
'하지만 방비는 철저히 해야겠군.'
미겔은 따로 명을 내려 위글로우의 방비를 철저히 하게 했다. 내성은 물론이요, 외성의 검문도 강화하여 혹시 모를 사태가 벌어질 것에 대비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잃었는데, 네놈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미겔은 살라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능력 있는 놈임은 인정하나, 스스로 머리가 되어 일을 진행할 수 있는 그릇은 아니었다. 우직하여 꾀가 부족하고, 용맹하나 대담하지는 않다.
'하지만 베르츠가 당했단 말이지.'
놈이 어떤 수작을 부려 베르츠를 쓰러뜨렸는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겔은 경각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렇게 경각심을 가진 그는 넓게 보는 대신 좁고 자세히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그의 시야 밖에서, 그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한 무리의 병력을.
*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던 군터 무리의 앞에 사이주 제레이스가 보낸 이들이 당도한 것은 그들이 국경을 넘고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귀에 들어간다더니.'
전장에 나가 있는 7황자가 그런지는 몰라도, 사이주 제레이스는 확실히 그런 듯했다.
"군터 경. 간만에 뵙습니다."
선두에서 말을 건네는 자는 아는 얼굴이었다. 일전에 사이주 제레이스가 베이고르에 왔을 때 그를 옆에서 따르던 자였다.
"오랜만이오."
"코누다이안에 큰 일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했지요. 그런데 그때부터 군터 경의 소식이 뚝 끊긴지라, 혹 경께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이 아닐까 걱정했었습니다."
"그렇소? 고마운 일이군. 보다시피 어찌어찌 살아는 있소이다."
정확히 말하면 죽었다 살아난 것이지만, 당연히 그에 대해서는 이야기 할 필요가 없었다.
"사이주 제레이스 공께서는?"
"오고 계십니다. 제 주인께서 군터 경의 서신을 전해 받으시고 꽤나 놀라셨었습니다."
"그대도 전해 들었소?"
"그래서 직접 이렇게 마중을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군. 부끄럽게도…그리 되었소이다."
부끄럽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지금과 같은 초라한 도망자의 신세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으니.
"너무 상심치 마십시오. 주인을 문 개는 언제고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 될 것이오. 반드시. 내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 테니까."
최대한 자제를 했음에도 순간 감정이 요동치자 섬뜩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말들이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고, 대화를 나누던 사이주 제레이스의 수하는 놀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여전히 기세가 대단하십니다. 아니, 전보다 더 날카로워지신 것 같습니다만."
"……."
"여하간 노고가 크셨습니다. 이제 저희가 왔으니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이동 중에 도시에 들려 휴식도 좀 취하도록 하지요."
"그래도 되겠소?"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군터 자신을 비롯해 수하 무관들은 문제가 없으나, 얼마 되지 않는 여인과 아이들은 잔뜩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이지요. 제 주인께서 직접 그리하라 하셨습니다."
"고마운 일이로군."
7황자에게 의탁하기로 마음먹은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사이주 제레이스의 존재였다. 비록 한 차례 만나 교분을 쌓은 것뿐이나, 군터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그가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단순히 얄팍한 호의 하나만 믿고 몸을 움직인 것은 아니나, 작게라도 기댈 언덕이 하나 있다는 것이 도망자 신세가 된 그에게 있어서는 큰 위안일 수밖에 없었다.
사이주 제레이스의 수하, 프루스터라는 이름의 사내는 군터 일행을 볼레론이라는 이름의 도시로 이끌었다. 군터 일행은 그곳에서 이틀을 머물며 몸에 쌓인 피로를 씻어내고 도망자의 행색을 지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꿀맛 같던 이틀의 휴식 뒤에 그들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도시를 떠나 다시 이틀을 움직였을 때에야 마침내 그들을 마중나온 사이주 제레이스의 무리와 만날 수 있었다.
"군터 경. 언제고 다시 보게 될 거라고 확신했었지만, 설마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소관 역시 그렇습니다."
다시 만난 사이주 제레이스는 이전처럼 반갑게 군터를 맞아주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과 호탕한 태도 역시 먼젓번에 봤던 그대로였다.
"그런데…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아니지. 착각이 아니야. 자네 뭔가 변했군 그래. 왠지 모르게 이전보다 더…어려워졌어. 그래. 그렇게 밖에 말을 못 하겠군."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작지 않은 일을 겪다 보니……."
그렇게 둘러대는 수밖에 없었다. 군터 스스로도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가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죽었다 살아나니 이렇게 되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말이다.
"아무튼 잘 왔네. 전하께도 이미 서신을 보냈네.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답이 내려지겠지."
"……."
"염려 할 필요 없네. 내 장담컨대, 전하께서는 자네를 기쁘게 맞으실 것이야. 그리고 자네를 중히 쓰실 걸세."
껄껄 웃는 사이주 제레이스를 보며, 군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