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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12화 (412/1,064)

412화

칸디시아렌에게 가느냐, 7황자에게 가느냐.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그랬다면 야스메티가 은근하게라도 한 쪽을 추천했을 것이다. 하지만 야스메티는 그러지 않았다. 두 선택지는 각기 일장일단이 있다. 그리고 야스메티는 그것에 대해서 설명했었다.

그리고 야스메티가 말했듯,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토어릭이 곧 당도한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그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것을 좌우할 선택을 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군.'

도망자의 신분. 잘 쳐줘봐야 객의 입장에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또 다시, 누군가를 머리 위에 지고 살아가야만 한다.

이미 죽은 자에게 원망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슬며시 떠오르는 생각은 어쩔 수 없다.

얼마나 허망한 죽음인가. 한때나마 그토록 화려하게 야망을 갈구하던 사내가 설마 그렇게 죽어버릴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 어떤 장사도 등 뒤에서 꽂히는 칼에는 별 수 없다지만, 대체 뭘 했기에 키우던 개에게 물려 최후를 맞는단 말인가.

'약했던 거지.'

약해졌든, 원래 약했든, 결국은 약해서 죽은 거다. 약했기 때문에 리에론에게 졌고, 미겔에게 졌으며, 그 무자 계집에게도 졌다. 그래서 그는 죽었고, 덩달아 자신도 죽었다. 약한 자를 섬겼기 때문에.

'내 스스로 서고 싶다.'

누구의 밑에도 있지 않고, 홀로 서고 싶다. 그리하면 이번과 같은 일도 겪지 않을 테니.

그러나 마음과 달리 현실은 녹록치 않다. 당장 미겔이 보낸 추격군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아닌가. 홑몸이라면 말 한 필을 타고서 어디로든 갈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지 않은가.

거추장스럽다.

군터는 순간 생각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놀랐다.

'거추장스럽다고?'

그를 바라보는 가족, 수하. 그 모든 것들을 그저 귀찮고 번거롭게 여겼다는 사실이, 그를 당혹스럽게 했다.

'벨리사. 보리스. 실비아.'

가족들의 이름을,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리운, 그랬을 터인 얼굴들이 어쩐지 희미하게 느껴졌다.

'혼자면 족하다고?'

순간이지만, 말 한 필을 타고 자유롭게 너른 땅을 누비는 상상을 했다. 방금 전 마음 속에서 바라고 그렸던 자신의 모습은 분명 그것이었다.

'인정할 수 없다.'

그런 무책임한 자신을 군터는 용납할 수 없었다. 심각한 고민에 머리를 혹사하다가 아주 잠깐, 머리가 어떻게 되었던 것이라 여기며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칸디시아렌. 7황자.'

다시 본론이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날이 새도록, 군터는 앉은 자리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

토어릭이 돌아왔다. 군터는 자신의 결정을 수하들에게 알렸고, 결정을 기다리던 자들은 각오를 다졌다.

"고생이 많았다."

"…믿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해야 하는 것은 이쪽일 텐데도, 토어릭은 그리 말했다. 군터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치하했다. 지금 당장은 이렇게 밖에 해줄 것이 없었다.

"출발하지."

우선 군터는 그의 장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숨어 있는 그의 가족, 그리고 수하들과 합류했다. 야스메티가 필요하다며 극구 주장하여 만든 또 다른 은신처는 훌륭하게 제 역할을 해냈다.

덕분에 미겔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노렸을 텐데도 벨리사와 아이들, 그리고 장원을 지키던 수하들은 들키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당신."

"아버지."

사실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불러오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군터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처럼 당당히 그들을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록 패배자, 도망자라는 신분은 변하지 않더라도.

가족들은 잔뜩 흥분해서 달려 나왔으나 쉽사리 다가오지 못했다. 군터가 뭔가 변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군터는 모든 기세를 갈무리하고 가만히 서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이전과 달랐다. 그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가족들은 그 이질감을 보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흡사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이질감. 그것을 가장 먼저 극복하고 다가온 이는 보리스였다.

"아버지. 혹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네게 걱정을 끼쳤구나."

보리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벨리사와 실비아도 그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변한 군터가 낯설게 느끼는 듯하면서도 그가 자신들이 알던 남편이요 아버지라는 사실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그를 만지고, 눈물을 흘리는 데는 그것이면 충분했으리라.

*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서 벗어나자 이제는 다른 것들을 걱정해야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장원에 대한 것이었다.

"미겔이 이미 장원에 손을 뻗었습니다. 자치대는 무장해제 당했고, 위글로우에서 온 병력이 주둔하며 장원의 주민들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베르츠의 추격대가 몰살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때는 더 극단적인 수를 쓸지도 모릅니다."

군터는 눈을 감았다. 당연히 그리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엇보다…병사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장원에 가족들이 있는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간에는 급박한 상황이 연달아 벌어진 터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지만 이제 슬슬 가족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할 것이다. 아직까지 탈영을 한 병사는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흔들리는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장원에 주둔하고 있다는 미겔의 병사들을 치고, 병사들의 가족들을 빼내는 것일 거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했다. 앞으로 먼 길을 이동해야 하는데 제대로 훈련되지도 않은 민간인들을 데리고 움직일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얼마 가지도 못해 추격군에게 덜미를 잡힐 것이 뻔하다.

"장원에 가족이 있는 병사가 얼마나 되지?"

"얼추 백 삼, 사십 정도 됩니다."현재 있는 병력 중 대략 절반이다.

"가족이 있는 자는 돌려보내라."

"하지만……."

아직 부상이 완치되지 않은 할렌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군터는 그의 걱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미겔이 병사들이나 그 가족들을 해코지 하는 게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아무리 미겔이라도 저항하지 않는 병사들을 벌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명목상 장원으로 돌아가게 될 병사들은 탈영을 하는 셈이니까, 군부의 분위기를 신경 써야 할 미겔로서는 그들을 크게 벌하지 못하리라.

할렌이, 그리고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다른 이들이 우려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들을 보내고 나면 고작 백 명이 조금 넘습니다. 그 정도 병력으로 국경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의문이며, 혹 국경을 넘는데 성공하여 7황자의 진영에 가담한다고 해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할 것이다.

차마 이 말을 할 수 없었던지 말끝을 흐린다.

"괜한 걱정이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군터는 고개를 저었다.

"국경을 넘는 것은 문제가 없다. 우리가 올 줄은 예상도 못하고 있을 테니, 경계가 약한 곳을 찾아 돌파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7황자에게 간다면, 우리의 병력이 백이든 삼백이든, 설령 오백이든 어차피 마찬가지다. 그에게 있어서 우리의 군세 같은 것은 별 볼일 없는 한 줌에 불과하니까."

이번 전쟁에 7황자가 동원한 병력만 10만이 넘어간다고 들었다. 전쟁에 동원된 것만 그 정도이니, 실제로 그가 가진 전체 병력은 그보다 더 많다는 뜻이다. 그만한 대군을 가진 자에게 백 명이든 삼백 명이든 그게 대수일까?

야스메티가 군터의 말에 힘을 보탰다.

"맞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더 많은 병력이 있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그들에게 있어 외부의 사람이 아닙니까. 타국의 사람이고, 한때는 적이었지요. 그런 우리가 힘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지 않겠습니까? 남의 집에 칼을 들고 가는 격이지요."

그것은 엄밀히 따지면 시각에 따라, 생각하기에 따라 다른 문제였다. 그러나 야스메티의 말은 지금의 상황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데는 충분했다.

"가족이 있는 자들은 이곳에 남겨둔다. 우리가 떠나고 이틀 후쯤에 가도록 하는 게 좋겠지."

*

사이주 제레이스는 자신에게 온 서신을 받아들었다.

봉인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싸구려임에 분명한 투박한 것이었으며 서신을 가져왔다는 자도 거지꼴이라 했다. 그럼에도 그가 이 서신을 받은 것은, 거지꼴을 한 자가 말한 이름 때문이었다.

'군터라.'

사이주 제레이스는 전선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후방에 남아 보급에 조력하고 혹 있을지 모를 베이고르의 움직임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얼마 전 코누다이안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 자세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일종의 정변 비슷한 것이 벌어졌음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역시 헛소문이었는가.'

사실 그는 군터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믿지 않았다. 북쪽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활약했다는 자가 갑자기 죽어버렸다는 것도 너무 뜬금없었고, 무엇보다 그리 쉽게 갈 자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누다이안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은 분명한데, 군터의 이름은 도무지 들리지를 않으니 그에게 무언가 크게 일이 생긴 것은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렇게 서신을 보내왔다. 물론 아직 지위를 가린 것은 아니나, 허접한 봉인을 뜯고 서신의 내용을 살핀 사이주 제레이스는 이 서신이 군터에게서 온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군. 이렇게 된 건가.'

서신에는 여러 이름들이 나왔고, 그간 벌어진 일들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었다. 그를 통해 사이주 제레이스가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의문들이 대부분 해소됐다.

"서신을 가져온 자는 어디에 있느냐?"

"관사 밖의 객관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데려와라."

"예."

휘하 무장에게 명을 내린 사이주 제레이스는 서신을 품에 갈무리하고 의자에 앉았다.

'일이 이렇게도 흘러가는군.'

묘한 미소를 지은 그는 빈 종이를 가져와 책상에 펴고 깃펜을 들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다음에야 닿게 되겠지만, 그래도 일단 전장에 나가 있는 그의 주인에게 전해야 할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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