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이름 모를 적의 대장이 창 끝에 찔려 떠 있다.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게 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손아귀를 쥐면 작게 꿈틀거리는 불씨를 움켜쥘 수 있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군터는 그렇게 했다.
"끄…어어……."
사람이고 생명이었던 것이 형편 없이 쪼그라들었다. 건장한 사내의 몸뚱이가 마른 장작처럼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군터는 더욱 더 가벼워진, 초라한 시신을 창을 한 번 휘둘러 팽개쳤다.
"이건…대체 무슨."
얼빠진 목소리다. 고개를 돌리니 니클라스가 역시 얼빠진 얼굴을 하고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정말 군터 경이시오?"
여전히 얼빠진 소리에 군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무슨 말이지?"
"당신이 죽는 것을 내 눈으로 봤소."
"살아있는 것도 지금 눈으로 보고 있지."
"보통 사람은 죽었다 살아나는 경우는 없는 걸로 아는데."
"그럼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말장난 같은 대화가 오갔다. 군터는 이 의미 없는 문답이 그리 재미있지 않았지만, 니클라스가 그를 위해 해준 일이 있기에 인내심 있게 대꾸해 주었다.
니클라스가 이번에는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은 베르츠의 시신을 보며 물었다.
"…그건 뭐요? 대체……."
"술법…의 일종이다."
"술법?"
실은 술법이 아니다.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 힘, 혹은 능력이지만 이것을 뭐라 정의해야 할지 군터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이것은 본래 칸젤의 능력이었다. 피 먹이 천과 바칼의 잔재가 섞여 생겨난 능력.
허나 지금, 칸젤은 사라졌다. 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와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분명 예상치 못한 것이었으나 이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본래 그래야 했던 것처럼.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건……."
촤악!
니클라스의 말이 이어지던 중, 군터는 전혀 그럴 것 같은 기색도 없이 창을 휘둘렀다. 어정쩡하게 서서 어쩔 줄 모르고 굳어 있던 무관 셋의 목이 허공에 떠올랐다. 잘린 목에서 핏물이 솟아오르고, 군터는 니클라스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사술(邪術)이 아닌지."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거부감이 드나?"
"…토어릭이라는 자를 만나고부터, 뭔가 다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오."
군터와 니클라스가 태연히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전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군터와 함께 들이닥친 기병들이 후방에서 적을 덮쳤다. 경사 진 땅을 평지처럼 내달리며, 우거진 나무들 사이사이를 자유롭게 지나치는 그들의 움직임은 니클라스가 가지고 있던 기병에 대한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저 정도였던가.'
초원 전사들의 기마술이 뛰어난 것이야 당연히 알고 있고, 그런 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군터 휘하의 기병이 대단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렇게 기병들이 산지에서 맹위를 떨쳐 승기를 거머쥐는 와중에 적병들이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니클라스가 그것을 보며 외쳤다.
"놓쳐서는 안 되오! 놈들이 소식을 전하면 또 다른 추격군이 금세 따라붙을 거요!"
"놓치지 않는다."
그리 말하면서도 군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도망치는 적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투였다.
"무언가 준비가 되어 있는 거요?"
"살라스가 산 아래에 있다."
"아아. 그렇군."
납득한 니클라스가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허벅지에 맞은 칼부터 시작해, 그의 몸은 크고 작은 상처투성이였다.
*
"한 놈도 빠짐 없이 모두 추살(追殺)했습니다."
보고하는 살라스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전공을 세운 것에 기뻐하는 것도 아니었고, 전투의 열기를 아직 식히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전마 위에 올라 있는 군터의 모습 그 자체에 격동하고 있었다.
군터는 이제 이전의 모습을 거의 회복해 있었다. 전투에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야윈 느낌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산에 올랐던 잠깐 사이에 다시 모습이 변해 있었다.
괴이한 일이지만 살라스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런 급격한 변화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거니와, 설령 그게 아니라 한들 그에게 있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의 주인이 다시 강한 모습으로 우뚝 섰다는 것. 그 하나였으니.
"돌아간다."
"예."
가슴을 짓누르던 죄책감과 분노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살라스는 니클라스와 그의 병사들을 신경 써 챙기며 그들의 은신처로 방향을 잡았다.
*
적. 그러니까 미겔의 무리에게 거둔 승리도 승리지만, 무엇보다 시체처럼 누워만 있던 군터가 예전처럼 회복했다는 것만으로도 우중충했던 은신처의 분위기는 정반대로 달라졌다. 이전에는 절망이 모두의 마음을 집어삼켜가는 모양새였다면, 지금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한 사람이 병석에서 털고 일어났을 뿐인데도, 그들은 이 절망적인 상황이 바뀌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기대와는 달리, 여전히 상황은 암담했다.
"미겔이 그 마녀(魔女)와 한패이며, 그들이 리에론을 끌어들여 일을 벌였습니다. 젠탄테르 가에서 힘을 써주기를 바라지만, 현실적으로 위글로우는 이미 저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봐야겠지요."
담담하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듣기 힘들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금 상기시키는 야스메티의 말은 그들이 현재 처해있는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알려주었다.
"…이렇게 된 상황에서, 일단 당장에 방도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두 가지?"
"그게 뭡니까?"
물음은 양 옆에서 나왔지만, 야스메티는 상석에 앉은 군터만을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 이마를 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는 얼핏 보면 조는 듯했지만, 그의 전신에서 일렁이는 숨 막히는 기세가 그것이 아님을 알게 했다.
"하나는 최대한 빨리 도망치는 겁니다. 적의 추격이 더 거세지기 전에 말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기습적으로 위글로우를 치는 겁니다."
"위글로우를? 가능하겠습니까?"
"우리의 병력은 아무리 끌어 모아도 삼백이 채 안 됩니다. 자살행위입니다!"
두 번째 방도에 대해서는 즉각 반박이 튀어나왔다. 야스메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습니다. 어려운 일이지요. 자살행위라는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위글로우에 상주해 있는 병력만 이천이 넘고, 굳건한 성벽이 있습니다. 삼백도 안 되는 병력으로 위글로우를 치는 것은 죽여달라고 목을 들이미는 꼴 밖에 되지 않습니다."
"헌데 어째서 그런 말도 안 되는……."
"……."
야스메티는 답하지 않았다. 그가 답하지 않으니 말을 하는 사람이 사라져 회의장에는 적막이 흘렀다. 그제야 그들은 야스메티가 입에 담은 터무니없는 계획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장주님. 미겔과 마녀. 두 연놈들을 목 베고 싶으신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현실을 보셔야 합니다."
"…이해했다."
군터는 이마를 괴고 있던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수하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망을 쳐야 한다면,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아뢰옵기 송구합니다만, 적어도 이 동부에 저희가 발을 붙일 곳은 없을 것입니다."
"어째서?"
"코누다이안이 리에론에게 넘어갔습니다. 이것만 해도 큰 문제인데,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동부 연합의 구심점이었던 영주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지요. 동부는 머리를 잃었습니다. 새로운 머리가 생겨나 빈 자리를 채운다면 좋겠으나, 저는 그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과연 동부 영주 중 누가 작고하신 영주님의 뒤를 이을 수 있겠습니까?"
"동부가 무너질 거라는 건가?"
"무너지기만 하면 다행입니다. 최악은 리에론에게 붙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저는, 상당히 높은 확률로 그리 될 거라 생각합니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겠나."
"이 또한 두 가지 방도가 있습니다."
잠깐 숨을 고른 야스메티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하나는 북부입니다. 아시다시피 북부는 본래부터 칸디시아렌 공작 가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비록 이번 전쟁으로 크게 피해를 입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북부가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닙니다. 전쟁 영웅으로 등극한 프롱기우스 후작이 있으며, 무엇보다 전쟁통에 행방불명 되었던 칸디시아렌 공작이 무사하다 하더군요. 그들이 가진 리에론 공작에 대한 감정은 최악입니다.
비록 세는 불리할지언정, 리에론에게 굴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주님께서 그쪽으로 향하신다면 그들이 장주님을 리에론에게 팔아 넘기지는 않겠지요."
괜찮은 선택지인 것 같았다. 북부가 비록 이번 전쟁으로 크게 상했다고는 하지만 칸디시아렌 공작이 살아있다면 아직 모르는 일이다. 그쪽에 의탁한다면 야스메티의 말처럼 리에론에게 팔려가지는 않을 듯했다.
"두 번째는?"
"제국입니다."
"제국?"
생각지 못한 답에 군터는 슬쩍 눈을 크게 떴다.
"예. 제국으로 간다면 리에론이 손을 쓸 방도는 없습니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7황자는 리에론이 아니라 베이고르가 뭐라 한들 눈 하나 깜빡 할 위인이 아니지요."
"……."
"게다가 아시다시피 7황자는 지금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장주님께서 그 전쟁에서 공을 세운다면 베이고르에 있었을 때보다 더 크게 올라서실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다만?"
"만약 7황자에게 의탁하게 된다면, 모든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칸디시아렌 공작에게 가는 것은 가문의 깃발을 바꾸는 것이나, 7황자에게 가는 것은 나라의 깃발을 바꾸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장주님께서는 이미 한 번 제국을 등진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아무래도…어떤 이들의 눈에는 그것이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기 힘든 말까지 다 꺼내가며, 야스메티는 이야기를 마쳤다.
"……."
군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떼었다.
"이 일은, 조금 더 생각해 보도록 하지. 아직 토어릭도 돌아오지 않았으니. 토어릭이 돌아오면…그때 다시 논하겠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