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적이다!"
"매복이다!"
베르츠는 앞서 가던 병사들의 외침에 인상을 찡그렸다.
'매복이라고?'
이 말인즉, 뒤에서 따라붙고 있는 것을 진작부터 알았다는 뜻이다.
'과연. 쉽게 당하지는 않는단 말이지.'
베르츠는 니클라스를 인간적으로 싫어했지만, 그의 능력만큼은 인정했다. 굴러들어온 돌이 능력도 없는 놈이었다면 이제껏 그를 머리 위에 두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미겔부터가 그를 부대장의 자리에 앉히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매복이라니. 제법 머리를 굴리긴 했다만, 그래 봐야 놈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당황하지 말고 단결하여 침착하게 응전해라!"
한 방 먹은 꼴이 되기는 했지만, 베르츠는 오히려 저런 반격이 쥐새끼들이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는 반증이라고 여겼다. 본래 사정이 급박해질수록 반응은 더욱 거칠어지기 마련인 것이다.
"급할 것 없다. 천천히 밀어붙여."
그의 생각대로, 적들은 미리 자리를 잡고 있다가 숨어서 공격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는지 이쪽에서 침착하게 대열을 유지하며 좁혀 들어가자 속절없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런 전개에 베르츠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짐은 물론이었다.
"서두르지 마라! 포위는 이미 완성됐다. 놈들은 달아날 곳은 없어."
크지 않은 산이다. 숨으려면 달아날 길을 찾기 쉬운 큼지막한 곳에 숨을 것이지, 어째서 이런 곳을 택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놈들은 이곳을 택했고, 이제 그 멍청한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피해는?"
"열 명 정도가 당했습니다. 스무 명 정도가 부상을 입어 후방으로 빠졌고……."
"쯧!"
베르츠는 수하의 보고를 듣고 혀를 찼다.
입지 않아도 될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처음의 기습 이후로는 피해가 늘지 않고 있지만, 속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다.
"무릎을 꿇리고 나면 산 채로 가죽을 벗겨주마."
짜증스런 마음에 기분 대로 흉악한 말을 중얼거렸다가 곧 그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니. 아니지. 그건 좀 곤란하군.'
미겔은 니클라스를 생포해서 데려오라고 했었다. 그렇게 말하던 그는 니클라스의 배신에 적잖이 화가 난 것처럼 보였었다. 그야 부하가 배신을 하면 그 어떤 상관이라도 화가 날 수 밖에 없을 겠지만…베르츠가 보기에 미겔이 느끼는 감정은 그 이상인 것 같았다.
그가 아는 미겔은 사람을 잘 믿지 않는 자였고, 따라서 배신을 당했다 하더라도 배신자가 자신을 거슬렀다는 사실 자체에 화를 내면 냈지 믿음을 저버렸다는 이유로 화를 낼 사람은 아니었다. 애초에 믿음을 주지도 않았는데 그것으로 화를 낼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니클라스에 대해서만은 달랐다. 베르츠도 니클라스의 배신은 미겔에게 있어 꽤나 화가 나는 일이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미겔이 니클라스에게 해준 대우라든지 대하던 태도 같은 것만 봐도, 그가 니클라스를 상당히 총애했음은 분명하니까. 어쩌면 남들에게는 주지 않았던 '믿음'이라는 녀석을 조금은 줬을지도 모른다. 그런 만큼 니클라스의 배신이 속 쓰리겠지.
'그 놈이 대체 뭐라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니클라스 그 놈이 어느 정도 능력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미겔이 저지른 실수에 대한 변명은 될 수 없다.
그래. 실수다.
'애초에 믿을 수 없는 놈을 가까이 두는 게 아니지.'
그가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니클라스 쪽의 저항은 점점 약해져 갔다. 힘이 빠지고 있다는 뜻이리라.
드문드문 날아오던 화살조차도 더 이상 날아오지 않자, 베르츠는 방패를 든 채 앞으로 나섰다. 나무들이 빼곡하게 시야를 가리고 있는지라 적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베르츠는 니클라스가 멀지 않은 곳에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이! 니클라스!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숨어있기만 할 텐가! 응?! 꼴이 이게 뭔가! 감찰대의 부대장씩이나 되셨던 양반이 말이야! 보아하니 더 이상 할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쯤에서 순순히 항복하는 게 어떤가! 안심하라고! 거칠게 다루지는 않을 테니까! 너를 그토록 총애하시는 대장님께서 몸 성히 데려오라고 하셨거든! 혹시 아나?! 우리 자비로우신 대장님께서 너 같은 배신자 놈을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주실지! 어-이! 듣고 있나?! 응?!"
베르츠의 외침은 산중에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굵은 나무 뒤편에 몸을 숨기고 있던 니클라스의 귀에도 들어갔다.
"베르츠로군."
달가운 사이는 아니라고 하지만, 한때 같은 밥을 먹었으니 목소리만 듣고도 저 아래에 누가 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 니클라스는 그가 올 거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니클라스 자신과 모브락이 없다면 병사들을 이끌 만한 자는 베르츠 뿐이었다. 감찰대에서 베르츠와 비슷한 지위에 있는 이들은 몇 있지만, 병사들을 이끌고 중요한 임무를 맡을 만한 자는 베르츠 뿐이었다.
성정이 잔혹하고 비열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능력은 있는 편이었으니까.
"어-이! 듣고 있냐고! 이런 빌어먹을! 너무 겁 먹어서 오줌이라도 질질 지리고 있나?! 캬하하핫!"
"…놈에게 화살 한 대 정도 날려줄까요?"
옆에서 베르츠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던 수하가 나직이 한 마디 했다.
그에 니클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화살이 떨어졌다고 생각하게 해야지. 경계가 느슨해진 채 조금 더 올라오면, 그때 마지막으로 쏟아 붓는다."
"예. 하지만…거슬리는군요. 저 기름에 절인 것 같은 목소리 말입니다."
"하하. 나도 그렇다. 하지만 저런 쓸 데 없는 소리를 하면서 시간을 끌어주니 우리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지."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이미 충분히 시간을 끈 것 같습니다만, '저쪽'에서의 호응은 없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믿고 기다려야지. 달리 방법도 없지 않느냐. 저 놈의 말처럼 순순히 항복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상황이 이렇게 되게 만든 것은 니클라스 자신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니클라스는 자신의 결정에 후회는 하지 않으면서도, 수하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고집이 아니었더라면 수하들이 이러 곳에서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좋아! 숨바꼭질을 하는 것도 재미있겠지! 끝까지 그렇게 숨어있으라고! 내가 찾아줄 테니까!"
'오는군.'
혼자 떠들어대는 것에 질렸는지, 베르츠가 다시 병사들을 전진시켰다. 확실하게 포위망을 형성하고 좁혀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뚫고 나가는 것도 어렵다.'
포위가 견고하며, 적 병사들 역시 오합지졸이 아니다. 저 포위를 돌파하는 것도 어렵지만, 어떻게든 성공한다 한들 곧 따라 잡히고 말 것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내가 잘못 생각했었던 건가?'
괜한 무리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잘못된 선택이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느껴지나?! 이제 슬슬 우리가 얼굴을 볼 때가 다가오는 것 같은데!"
'시끄러운 놈.'
니클라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도박이었다. 그리고 도박이라는 것은 항시 불운과 행운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법이다. 행운이 따라줬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거다.
"약속하지."
"……?"
"내 죽을 때 죽더라도 저 놈의 목은 베고 죽겠다."
"푸흐흐. 약속을 지키시는지 확인하려면, 제가 대장님보다는 오래 살아야겠군요."
"이런. 내가 그렇게 신용이 없었나?"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니클라스는 입가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아껴두었던 화살. 모두 쏟아 붓는다."
"음…사실 남은 거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는 않습니다."
"목표는 베르츠다. 놈이 고맙게도 자기 위치를 스스로 떠벌려주고 있으니, 우리는 놈을 노린다."
니클라스가 그의 두 자루 검을 들어 올렸다.
"놈의 목을 베는 데 성공한다면 적들은 동요하게 될 거다. 그럼 우리는 그 틈을 놓치지 말고 즉시 포위를 돌파한다."
베르츠의 목을 베는 것도 문제고, 포위를 돌파하는 것도 문제일 것이며, 그 후에 도주하는 것 역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수하들은 물론, 말을 하는 니클라스 자신도 그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다.
"내 신호를 따라라."
그리 말한 니클라스는 크게 소리쳤다.
"베르츠! 누가 오려나 했었는데 네가 오다니! 미겔이 판단력이 흐려졌구나! 날 잡으라면서 너 같은 머저리를 보내다니!"
"너야말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니냐! 살려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그 무슨 헛소리냐!"
그가 외치고서 곧바로 베르츠의 대꾸가 돌아왔다. 잔뜩 성난 목소리였다.
"지금."
병사들이 일제히 활을 들었다. 겨누는 곳은 방금 베르츠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이었다.
*
슈슈슝!
"뭐, 뭐냐!"
땅을 박차고 뛰쳐나가는 순간,적이 당황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러나 기습적으로 뿌린 화살은 제대로 피해를 주는 데는 실패했다. 베르츠의 주변으로 방패를 든 병사들이 여럿 포진해 있었던 것이다.
"니클라스다!"
"잡아!"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그를 알아본 병사들이 소리쳤다. 병사들이 소리치니 덩달아 베르츠도 목소리를 높였다.
갑작스레 쏟아진 화살에 잠깐 당황하기는 했지만, 곧 자기 몸 어디에도 화살이 박히지 않은 것을 알아채고 다시 기가 산 것이다. 아니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니클라스 때문에 흥분한 것인지도 모르고.
"잡아! 팔 다리 정도는 잘라도 돼! 목만 붙어있으면 된다! 놈을 잡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리겠다!"
상이라는 말에 눈이 뒤집힌 병사들이 기세를 올리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곳은 산지였고, 큰 나무들이 무수히 늘어서 있었다. 이런 곳에서 아무리 잘 훈련 받았다고는 하지만, 일개 병사들이 니클라스와 같은 무인을 따라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방금 전의 화살 세례로 인해 조금이지만 적의 진형이 흔들린 상태였다.
"잡아!"
니클라스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병사들 사이를 거침 없이 질주했다. 두 명 이상의 적은 피했고, 한 명의 적은 베어 넘겼다. 때로는 그마저도 옆으로 몸을 틀면서 피해 빠져나가기도 했다.
탁!
섣불리 검을 내리찍은 병사의 어깨를 밟고 높게 뛰어오른 니클라스가 옆의 나무를 차며 허공에서 몸을 틀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의 허벅지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다섯.'
땅에 내려선 니클라스는 곧장 다시 몸을 날리며,베르츠와 자신 사이에 남은 적병의 수를 헤아렸다.
서걱!
'넷.'
땅을 굴렀다. 창이 어깨를 제법 깊게 가르고 지나갔다. 상처 때문이 아니라, 그 밀어내는 힘 때문에 잠시 비틀거렸던 니클라스는 이를 악 물고 다시 앞으로 달렸다.
푸욱!
한 자루 검이 심장을 찔렀다. 피를 토해내는 고깃덩이를 방패 삼아 밀고 들어가며, 니클라스는 과감히 검 한 자루를 포기했다.
'셋.'
"포기하시지 그래!"
베르츠가 앞으로 나섰다. 함께 있는 병사들을 믿는 것인지, 휘청거리는 니클라스의 상태를 보며 자신감을 얻은 것인지, 그는 다 끝났다는 듯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대단해. 날다람쥐처럼 날래군. 하지만 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거지? 설마하니 내 목이라도 노린 건 아니겠지? 응?"
니클라스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자루 검을 두 손으로 쥐고 베르츠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를 맞은 것은 베르츠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세 명의 병사들이었다.
채앵!
그들이 평범한 병사들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무장부터가 일반 병사들과는 달랐으니까.
카앙!
아무리 니클라스라 하더라도 사방에서 달려드는 병사들을 뿌리치고 난 후에, 부상을 입은 몸으로 세 명의 무관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세 명의 협공을 받으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치열히 맞서는 것 정도가 한계였다.
"으랴!"
그러나 그런 균형도, 니클라스가 물러서는 틈을 놓치지 않고 들이친 베르츠에 의해 깨졌다. 쭉 뻗은 검이 니클라스의 허벅지를 찔렀고, 니클라스는 균형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지?"
베르츠가 위로 올라오려던 니클라스의 검을 밟아 눌렀다. 그리고 니클라스의 목에 검을 가져대 댔다.
"감상을 듣고 싶은데. 기분이 어떤가?"
"……."
"아 참. 모브락은 살아있나? 죽였지? 응?"
"……."
니클라스가 계속해서 입을 다물자 베르츠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곧 죽어도 혼자 잘난 척은 다 하시겠다? 역시 니클라스 나리답구만. 뭐, 그렇지. 병신 같은 대장을 따랐다가 개죽음 당하는 부하들만 불쌍하지. 응?"
그 한 마디에 표정 없던 니클라스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그를 본 베르츠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 그 얼굴이야. 그래야지. 고양이한테 잡힌 쥐새끼는 그런 표정을 해야 맞는 거야. 알겠……."
쿵!
굉음.
묵직한 무언가가 이죽거리던 베르츠의 뒤에 떨어져 내렸다.
몸이 굳은 베르츠가 뒤를 돌아보기 전에, 니클라스는 그것을 보았다.
커다란 말. 그 위에 탄 거구의 사내.
'춥다.'
전투의 열기에 잔뜩 달아올라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던 몸이 한기를 느꼈다.
"아……."
다문 입술을 비집고 소리가 나온 것은, 말 위에 탄 사내의 얼굴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아보았어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정말 자신이 알던 '그'인지.
푸욱!
'그'는 무심히 창을 뻗었다. 그가 움직였다는 것을, 그의 손에 들린 창에 가슴 한복판을 꿰인 베르츠의 몸뚱이가 허공에 들리고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