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화
칼과 창, 화살은 피할 수 있어도 눈은 피할 수 없다. 그것을 토어릭은 뼈저리게 느꼈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곳을 통해 이동한다고 해도 사람의 눈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그들을 목격한 어떤 이들을 통해서 미겔은 정보를 얻었고, 그는 그것을 통해 추격군을 보냈다.
처음에는 추격을 뿌리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는 적다 하나 토어릭의 병사들은 모두 정예였으며, 함께 움직이는 니클라스의 무리도 그에 버금가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격자들과의 교전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무리 뿌리치고, 때로는 맞서 싸워 죽여 없애도 끊이지 않고 따라붙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들이 가려는 길을 미리 선점하기도 했다.
'경로가 완전히 읽히고 있는 모양인데.'
토어릭이 한 생각을 니클라스도 똑같이 했다.
"이대로라면 결국 발목을 잡히게 될 것 같군."
"예. 그럴 것 같습니다."
병사들의 피로가 점점 쌓여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적들의 추격은 점점 치밀하고 거세지고 있으니, 이대로 가면 은신처까지 당도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나누어야 할 것 같은데."
"한쪽이 미끼가 되고, 다른 한 쪽이 창을 옮기도록 하지요."
"그럼……."
"제가 시선을 끌겠습니다. 길잡이를 붙여드릴 테니, 니클라스님께서는 창을 장주님께 전해주십시오."
"…괜찮겠소?"
처음에 니클라스는 토어릭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이었을 뿐더러, 묘하게 건들거리는 분위기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며칠 동안이지만 토어릭과 함께 움직이며 생각이 바뀌었다. 직접 함께 움직이며 알게 됐다.
토어릭은 겉으로 어떻게 비치던 간에, 그 누구보다 자신의 임무에 철저했다. 게다가 현명하고 위엄 있게 수하들을 다스릴 줄도 알았다.
니클라스가 보기에, 그는 제법 훌륭한 군인이었다. 또한 믿을만한 사내였다. 비록 첫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았을지언정, 이런 사내를 싫어할 이유는 없다.
그런 그의 심경의 변화는 간단한 말 한 마디에서부터 드러났다.
"맡고 있는 물건이 신경 쓰여 그렇지, 피하기로 마음 먹는다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나중에 다시 뵙지요."
"알겠소. 나중에 봅시다."
그렇게 그들은 두 무리로 나뉘었다. 토어릭이 적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많은 인원으로 움직이고, 니클라스는 안내자와 함께 소수의 병사들만을 이끌고 '은신처'라는 곳으로 향했다.
토어릭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해주고 있는지, 한동안 니클라스 일행은 추격대의 눈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고작 이틀이었다. 이틀이 지난 후에는 다시금 적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이전보다 훨씬 덜했기에, 니클라스 일행은 어떻게든 안내자를 따라 멈추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
시간이 흐를수록, 낯선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는 거의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토어릭을 믿었다. 그의 능력, 충성심. 모두를 믿었다. 하지만 그것과 그가 성공할 것인가는 다른 문제다.
물론 처음에는 걱정하지 않았다. 약간의 불안감이 없지 않았으나, 결국 무사히 칸젤을 가지고 돌아올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에는 작았던 불안감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눈덩이를 굴리는 것처럼, 점점 덩치를 키워간 불안감은 오래지 않아 군터의 몸과 마음을 지배했다.
'내가 이렇게 나약해진 건가?'
충격이었다. 군터는 그제야 되살아난 자신을 보다 명확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죽었다 살아났어도, 몸이 썩어버린 나무토막처럼 변했어도.
'나는 나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저 큰 부상을 입은 것뿐이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멀쩡하다고 생각했었던 정신은 육신을 따라 나약해져 있었다. 하루의 반 이상을 의식 없이 보내고, 그나마 깨어 있을 때조차 몽롱함에 젖어있다 보니 객관적으로 자신을 살펴볼 기회가 없었다.
'지독하게 망가졌군.'
자신이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알아차린 순간. 군터는 터져 나오는 실소를 억누를 수 없었다. 그의 자그마한 웃음소리를 들은, 그의 침실 밖을 지키던 병사들이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달려들어왔지만 군터는 힘겨운 손짓으로 그들을 내보냈다.
'남들이 뭐라 치켜세워주던, 나 역시 약해빠진 하나의 인간일 뿐이었던 건가.'
사실은 우쭐해있었던 것이 아닌가. 초탈한 척하면서도, 사실 속으로는 '나는 특별하다'는 오만에 빠져있었던 것이 아닌가.
군터는 자신에게 실망했다. 그리고 전에 없이 냉정한 눈으로 스스로를 관조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지?'
그저 이렇게 누워서 알량한 기대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지금은 아니다.
"……."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손을 뻗어 침대의 모서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힘껏 내리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그는 힘을 주며 일어섰다 싶은 순간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주저앉았으나, 쓰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벼워진 몸이기에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으나, 온 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것만 같은 격통이 밀려왔다.
"……."
덜덜 떨리는 손으로 땅을 짚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침대의 모서리를 쥐고 천천히 일어섰다. 몇 번이고 다시금 쓰러질 듯 휘청거렸으나, 군터는 기어이 두 발로 섰다.
온 몸에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땀이 줄줄 흘렀다. 이렇게 메마른 몸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땀이 흐를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힘겹게 일어섰건만, 군터는 다시금 주저앉았다. 지독한 고통이 가슴을 옥죄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 전과 달리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웃었다.
그의 몸은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과 똑같이 망가지고 지쳤으되, 정신은 전혀 달라져 있었다.
*
"헉…헉……."
니클라스는 귀에 거슬릴 정도로 가쁘게 숨을 몰아 쉬는 수하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 역시 부하들 때문에 참고 있을 뿐, 내심으로는 그들처럼 힘든 티를 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들은 지쳐 있었다.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달리는 말 위에서 있어야 했고, 그나마 조금 쉴 때조차 언제 어디서 들이닥칠지 모르는 적을 의식하며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눈 밑에 시커먼 그늘이 생기고 안색이 창백해진 것이 벌써 닷새도 더 전이었다.
"……."
서서히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며, 니클라스는 안내자에게 넌지시 물었다.
"얼마나 남았지?"
"이제 하루만 가면 됩니다."
"밤낮으로 말이지."
"예. 허나 정말 이제 곧 도착합니다."
물론 이제껏 온 것에 비하면 '곧'일 것이다. 하지만 하루 온종일 달려야 하는 그 거리를, 무사히 갈 수 있을지에 대해 니클라스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벌써 이틀 동안 추적자를 보지 못했다.'
움직이면서도 최대한 적들을 교란하기 위해 흔적을 지우거나, 조작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크게 먹힐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주기만을 기대했을 뿐.
그렇기 때문에 무려 이틀 동안이나 적과 조우하지 않았다는 것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니클라스는 이 추적에 미겔이 직접 나섰거나, 혹은 지휘하고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가 군터의 잔당들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겔은 그리 무능한 자가 아니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이미 꼬리를 잡은 상태에서 이틀 동안이나 숨을 골랐다면,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니클라스는 그 이유가 무엇일지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했다.
"그 은신처에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지?"
"예? 그것은 저도 잘…….
니클라스는 안내자를 맡은 병사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병사는 그의 눈을 피했다. 니클라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이해한다. 그렇지만 난 요 며칠 동안 감찰대의 병력과 네 번이 넘는 전투를 치렀다. 그 정도면 어느 정도는 신뢰를 살 만하지 않은가?"
"……."
"여기까지 온 마당에 날 의심할 텐가? 내가 그 자그마한 정보를 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지?"
병사가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략 백 명 남짓한 것으로 압니다."
"백 명. 백 명이라……."
적은 수는 아니다. 하지만 충분하지도 않다. 만약 그의 생각대로 미겔이 잡은 꼬리를 붙들고 천천히 뒤따라오는 것이라면, 다음 번에 마주하게 될 병력은 최소한 수백일 것이다.
고작해야 정적의 잔당을 쫓기 위해 동원하는 병력치고는 과한 수준이지만, 미겔이 군터에 대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그런 과함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가보는 수밖에 없겠군. 가보는 수밖에…….'
어차피 처음부터 달리 방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새삼 마음이 무거워졌다.
"……."
기이한 느낌이 드는 천에 둘둘 말린 창. 니클라스는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이 창이 무엇이기에, 무엇을 할 수 있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고 나선 것이 아닌지 조금 후회가 되기도 했다. 미겔이 리에론과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그와 갈라설 생각은 했지만, 은밀히 그 시기를 재고 있었다.
나름 신중하게 행동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찾아온 불청객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의 말솜씨가 대단했기 때문이 아니다.
'살아있단 말이지. 아니. 되살아났다 했던가?'
다시 생각해봐도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토어릭이 보여줬던 진지함과, 목숨을 걸고 임무에 임하는 그의 수하들을 보며 그 믿기지 않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군터라.'
그를 처음 봤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어찌 보면 옛 주군의 원수라 할 수도 있는 자이나, 니클라스는 그를 원망할 만큼 편협한 사내는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의 위치에 있었을 뿐이다. 옛 주군의 목을 친 자라는 사실만 제한다면 군터라는 사내는 분명 호감이 가는 자였다. 자신의 목숨을 한 번 살려주기도 했고.
'부디 다시 살아난 만큼, 그대의 목숨이 질기기를 바라겠소.'
니클라스는 자신의 목숨을 그에게 걸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수하들 몇을 따로 불렀다.
"대장. 찾으셨습니까."
"할 일이 있다."
뻔히 보이는 상황에 놓여버렸다고는 하나,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상황에 끌려가기만 할 수는 없었다. 니클라스는 그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