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407화 (407/1,064)

407화

미겔이 이상을 알아차린 것은 토어릭과 니클라스 일행이 위글로우를 떠난 바로 그날 밤이었다.

"철저히 감시하라 하지 않았나?"

"면목 없습니다."

납작 몸을 낮춘 사내들이 용서를 구했다.

"그래서, 놈의 행방은?"

"말씀드린 그 상인들과 함께 성문을 나서서 남쪽으로 향했다는 것 외에는."

"놓친 건가."

"보통 놈들이 아니었습니다. 같이 움직인 놈들, 도무지 상인 같지가……."

"당연히 아니겠지. 니클라스가 뭘 한다고 상인 놈들을 은밀히 만났겠나."

미겔이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서 혀를 찼다.

만약 니클라스가 상인들과 만났다는 보고가 조금만 더 일찍 들어왔더라면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일은 이미 벌어졌고, 이제는 뒤늦게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사람이 없다. 믿고 쓸 만한 놈이 없어.'

니클라스가 능력이 있어 밑에 두고 부리긴 했으나, 그를 진정으로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니클라스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감시하기 위해 은밀히 눈을 붙여두었던 것이고.

하지만 그렇게 붙여놓은 눈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거기다 휘하의 이인자라는 놈은 멍청하게 당해버린 듯했다. 정말 하나 같이,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을 만한 놈이 없었다. 비루한 도적 출신들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사람을 풀어라. 놈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아내. 그리고 그 상인이라는 놈들. 그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도."

"옛!"

바짝 엎드려 있던 사내들이 부리나케 물러갔다. 혹 그의 마음이 변해 자신들에게 책임을 물을까 두려워하는 티가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보며 미겔은 다시금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얼마 후, 기다리던 소식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니클라스와 만난 상인들은 아힌키우스에서 왔다고 했지만, 그들은 남쪽에서 왔다는 것 같습니다."

짐작했던 바다. 니클라스가 상인들과 은밀하게 쑥덕거릴 이유가 없다. 니클라스는 여느 흔한 놈팡이 놈들과 다르다. 그는 재물을 탐하는 자도 아니며, 자신의 권세를 사사로이 쓸 자는 더더욱 아니니.

"말을 탄 수십의 무리가 동쪽으로 향했다 합니다."

'동쪽이라고?'

가장 먼저 생각이 난 것은 역시 제국이었다. 그러나 니클라스가 제국과 접점이 생길 이유가 없다. 물론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제국을 제한다면, 동쪽이라 했을 때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가 직접 숨겨놓은 군터의 창.

'설마.'

영주부인. 이제는 영주 대리가 된 여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흉물이 재앙이 될 거라 했었지.'

그 말을 온전히 다 믿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신경이 쓰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 창을 몰락한 마을의 지하에 묻어버렸던 것이고.

'아니. 아니겠지.'

그 창이 범상치 않은 물건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 그 상인으로 위장한 것들이 도망친 잔당이라면, 목숨을 걸고 위글로우까지 올 동기로는 아무래도 약하다. 창 한 자루 때문에 목숨을 걸고 적의 집 앞까지 온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그렇지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표현할 수 없는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도브겐으로 병사들을 보내라."

"도브겐…말입니까?"

"그래. 가서…확인해라."

미겔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누군가 그곳에 출입한 흔적이 없는지. 그리고…그 물건이 제대로 있는지."

*

모페이브가 미지근한 물을 내오며 입을 열었다.

"좀 어떠십니까?"

군터는 침대에 누운 채 작게 답했다.

"…그대로다. 나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질 않는군."

여전히, 팔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였다. 이런 몸뚱이로도 숨이 붙어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기서 더 나빠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지만, 그마저도 얼마나 갈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말씀하신 대로, 마님께는 아직 소식을 전해드리지 않았습니다."

"음."

괜한 걱정을 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 군터는 벨리사와 아이들에게 자신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도록 했다. 생각한대로 일이 풀리고 몸을 회복하고 나면, 그때 그들을 만날 생각이었다.

"토어릭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그렇군."

답답함이 차 올랐다. 움직이기 힘든 몸이라 더 답답함이 컸다. 조급함이기도 했고, 걱정이기도 했다. 만약 일이 틀어져 토어릭이 실패하고, 자신의 몸이 회복되지 못한다면.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모페이브가 그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건넸다.

"토어릭은 신중한 자이니, 모두 잘 될 것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다음날. 기다리던 소식이 당도했다. 토어릭에게서 온 소식은 아니었다. 제국으로 갔던 야스메티에게서 온 소식이었다.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전갈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 뒤. 야스메티가 은신처에 당도했다.

"…면목 없습니다."

야스메티는 군터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제 책임입니다. 벌해주십시오."

"지금에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보다…어찌 된 거지? 이미 듣긴 했지만,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군."

"변명의 여지도 없는 실책이었습니다. 큰 것에만 집중하느라 정작 눈앞의 작은 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작은 것이라.

이렇게 된 상황이다 보니 야스메티의 표현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얼추 이해가 가기도 했다. 바로 옆에 붙은 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그쪽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겠지.

이해할 수 있는 실수다. 하지만 뼈아픈 것은, 그게 하필이면 이번이었다는 것이다.

"그래. 이왕에 갔다 왔으니 이야기나 해보게. 제국 쪽은 어떻던가."

정확히는 7황자 쪽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의 형제인 2황자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의 손쉬운 승리를 점치는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막상 개전 이후의 양상을 보면 그렇지가 않았다. 난데없이 2황자의 깃발 아래 참전한 제국 군주 때문이었다.

"아시다시피, 제국의 군주 룬차이가 2황자의 편으로 참전했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 전황은 팽팽하게 고착화되어 있습니다. 7황자는 병력의 우세를 이용해 전선을 길게 늘렸고, 덕분에 한 곳에서 룬차이에게 패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만회하여 전세를 대등하게 가져가고 있지요."

"그렇다고 해도, 그 군주라는 자를 어쩌지 못하고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예. 그렇습니다."

"그리 대단한가? 그 룬차이라는 자가."

"대단하지요. 그는 이제껏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십, 수백 번이 넘게 치른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불패(不敗)의군주'라고도 불립니다."

"…그건 대단하군."

"7황자는 확실히 대단한 자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라면?"

"7황자 본인 말입니다. 그는 벌써부터 이번 전쟁이 상당히 길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된다?"

"저는 그리 보았습니다. 어떤 영문에서인지, 룬차이는 전쟁에 적극적인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엽적인 전투에서 몇 차례의 승리를 거두었을 뿐, 본격적으로 판을 크게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다른 이유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드러난 것만 보면…그는 이번 전쟁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2황자의 편을 들어 참전했겠나."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그간 알려졌던 2황자에 대한 여러 이야기나 평을 고려해보면…룬차이가 자신이 원해서 2황자의 진영에 가세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언가…알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야스메티가 본 7황자 쪽의 자세한 사정이라든가, 다른 이야기들도 들으려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으나 군터는 야스메티와 나눈 짤막한 대화만으로도 극심한 피로를 느꼈기에 그 이야기는 듣지 않기로 했다.

야스메티는 군터의 몸 상태부터 시작해 당장 이곳의 일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으나, 군터는 이미 지쳐 그에게 직접 이야기를 해줄 기운이 없었다. 하여 모페이브에게 전해 들으라 말한 뒤 야스메티를 내보냈다.

"…어찌 된 겁니까?"

군터의 앞에서 내색은 안 했으나, 야스메티는 내심 시체처럼 변한 군터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제국에 있을 때 얼핏 전해듣기는 했으나 말로만 들은 것과 직접 보는 것은 전혀 달랐다.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모페이브가 쓴웃음을 지었다.

"놀라기만 했겠습니까. 솔직히 말해, 지금도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다는 것도 허무맹랑하지만…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장주님께서는 회복하실 수 있는 겁니까?"

"그럴 것이라 기대하고, 믿고 있습니다. 그를 위해 지금 여러 사람이 바삐 움직이고 있지요."

"구체적으로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얼마든지요. 일단은…자리를 옮기시지요."

그들이 있는 곳은 군터의 침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들이 있는 은신처가 동굴이기에, 그들의 말소리가 침실까지 전해져 울릴 수가 있었기에 그들은 긴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자리를 옮겼다.

*

야스메티가 당도하고 며칠 뒤. 기다리던 토어릭의 소식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 소식은 그리 기쁘지만은 않았다.

"토어릭이 장주님의 창을 회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까지는 기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그 소식을 전하는 목소리가 가라앉아있다는 것이, 뒤에 이어질 내용을 앞서 암시하고 있었다.

"현재 위글로우의 군사들에게 쫓기고 있다고……."

'미겔.'

군터는 눈을 감았다. 잠깐 진정하지 않으면 노기가 치밀어올라 입 밖으로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어찌 보면 감정만 앞선, 대책 없는 말일 수도 있다. 꼬리를 달고 이곳으로 오라 하는 것은, 불을 가지고 짚 더미 속으로 달려들라 하는 것과 같으니.

허나 군터는 확신했다. 비록 남들에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칸젤을 손에 넣는다면 몸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 몸만 회복한다면.'

그렇다면 추격대가 얼마나 오든 모조리 뿌리칠 수 있으리라. 위글로우에서 범했던 실수는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을 테니.

"어떻게든, 이곳까지 오라 해라."

힘 없이 뜬 두 눈이었으나, 그 속에는 뜨거운 불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