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화
토어릭은 몸 쓰는 일에 그다지 자신이 없었다. 두 손으로도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투에 나서서 적의 목을 베었던 그가 이런 마음이라면 모두가 웃겠지만, 사실이었다.
물론 토어릭도 무공으로 따지면 어디 가서 꿇리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뛰어난 편에 속했다. 그러나 그가 있는 곳의 주변 환경이 문제였다. 그가 섬기는 주인의 밑에는 무골(武骨)이라 할 만한 놈들이 득시글거렸다. 그런 놈들 틈에서, '괜찮은' 정도로 솜씨에 자신감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토어릭은 자신의 동료들과 비교해 봤을 때, 자신이 무인으로서는 조금 처진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힘 자랑을 할 일이 생기면 겸손하게 뒤로 물러나곤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의 일이고.
'네놈 정도야…….'
제법 덩치가 있긴 하다. 그러나 저 덩치가 근육보다는 살로 이루어졌음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표정이라든지 분위기는 제법 흉흉하게 지을 줄 아는 놈인 것 같지만…그뿐이다. 고작해야 널리고 널린 잡배 수준에 불과하다.
'그건 좀 박한가.'
어찌 됐든, 수 차례나 사선을 지나온 진짜 군인에게 비할 바는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카앙! 챙!
토어릭은 그것을 단 두 수만에 증명해냈다.
두 사람을 태운 말이 서로의 옆을 스쳐 지나가고, 덩치와 목소리만 큰 잡배는 인상을 쓰며 칼을 고쳐 잡았다.
"제법이구나!"
기세를 잃지 않겠다는 것인지, 사납게 외치는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토어릭은 이미 단 두 번의 충돌로 상대의 밑바닥을 확인했고, 저 당당한 목소리가 허세에 지나지 않음도 확신했다.
"언제쯤 살려달라 애원할 테냐."
토어릭은 곧장 말머리를 돌려 상대에게 덤벼들었다. 그 순간. 그는 상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채챙!
토어릭은 거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칼날이 닿는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해서 상대를 몰아붙였다.
반격다운 반격 한 번 허용하지 않는, 강하다 못해 폭력적인 공세였다. 상대의 일그러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토어릭은 발악하듯 뻗어오는 상대의 칼날을 피하고 칼을 쥐지 않은 손으로 칼을 쥔 상대의 손목을 낚아챘다.
"으윽!"
"설마 부하들이 구하러 오길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토어릭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 구겨지는 상대의 얼굴에 박치기를 날리고 물러나는 상대의 어깨를 베었다.
"끄악!"
상대는 비명을 지르며 낙마했다. 뼈가 잘린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살만 베인 것뿐인데 말이다.
'터무니 없군. 이런 놈들에게 당한 건가?'
갑자기 화가 치밀어, 토어릭은 그의 전마로 하여금 쓰러진 상대의 다리를 짓밟게 했다. 섬뜩한 우드득! 하는 소리를 뒤이어 터진 찢어지는 비명이 덮어버렸다.
*
"엉망이군."
니클라스가 송장처럼 변한 모브락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에 토어릭은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상관 있겠습니까. 말을 해줄 주둥이만 멀쩡하면 되지요. 게다가 엉망이라고는 해도…어쨌든 사지는 다 잘 붙어있지 않습니까? 심문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겁니다."
"손속이 잔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아니라 다른 녀석들이 왔다면…이놈을 이렇게 멀쩡하게 놔두지 않았을 겁니다."
"……."
니클라스는 토어릭의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 순간 니클라스는 자신이 이들의 상황을 간과했음을 깨달았다.
이들은 배신을 당했다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틀리지도 않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억울하게 코누다이안에서 축출당했고,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 쓴 채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증오가 뼈에 사무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다.
"그래. 다시 보게 됐군. 네 말대로 말이다."
"으…으으…너, 너어……."
모브락이 핏발 선 눈으로 니클라스를 노려보았다. 이렇게까지 엉망이 되고서도 여전히 기가 죽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니클라스는 독기 어린 눈 속에서 흐릿하게 비치는 두려움을 놓치지 않았다.
"대장이…대장이 널 얼마나……."
"그는 날 이용했고, 나도 그를 이용했을 뿐이다. 물론 나를 중용해준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게 내가 그를 등지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지."
"무슨 개소리를……!"
"리에론과 손을 잡았잖나."
"……."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모렌스에게 빚이 있지. 그 뒤에 선 리에론 역시 마찬가지고."
"그래서…그래서 우리를 배신하겠다는 거냐?!"
"네가 배신을 말하다니. 우습지 않나? 영주님을 해하고, 영지를 집어삼킨 게 누구지?"
"이…익!"
"여기까지 와서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간단히 말하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답해줘야겠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답하지 않으면 험한 꼴을 보게 될 테니까."
"흐흐. 내 꼴을 봐라. 여기서 뭘 더 험한 꼴을 볼 수 있지?"
"글쎄. 그건 내가 아니라 저쪽에다 물어봐야지 않겠나."
니클라스는 눈짓으로 토어릭을 가리켰고, 토어릭은 팔짱을 낀 채 무심한 표정으로 모브락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위협도 없이, 그저 쳐다보기만 했음에도 모브락은 토어릭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
"창? 창이라고?"
토어릭의 물음을 들었을 때 모브락이 보인 반응은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혹은 '이놈은 미친놈인가', 둘 중 하나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목숨을 걸고 일을 벌이면서 원하는 것이 고작해야 창 한 자루라니까 말이다. 평범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모브락이 보인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말 그 망할 창에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군."
모브락은 얼마 전의 일을 떠올리기 위해 기억을 더듬었다.
미겔은 그 창을 없애버리려 했었다. 펄펄 끓는 용광로에다 집어 던져보기도 했고, 장정 십여 명을 동원해 박살을 내려고도 했었다. 믿기지 않지만 그런 시도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이후, 그는 그 창을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다 숨기기로 했다.
"그게 어디지?"
그때 미겔의 행동과, 지금 이들이 보이는 반응을 보면 확실히 그 창에 뭔가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상대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쥐고 이렇게 저렇게 흥정을 했겠지만.
"…도브겐의 묘지. 지하 납골당에 숨겨놓았다."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조금만 말을 끌어도 목에 칼이 들어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젠장! 이제 나도 모르겠다.'
이놈들에게 입을 나불댄 것을 알면 미겔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입을 나불대지 않으면 당장 지금 죽게 생겼으니, 모브락은 눈을 질끈 감고 이들이 원하는 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도브겐? 도브겐이 어디지?"
"마을이다. 예전에 있었던 마을."
"거짓은 아니겠지?"
"이봐. 난 지금 죽기 싫어서 불고 있는 거야. 확실해. 도브겐이다."
"좋아. 그곳이 어딘가? 예전에 있었다면, 지금은 없다는 소리인가?"
모브락은 간략하게 도브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도브겐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범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20년도 더 전에 역병이 돌아 인구의 삼분의 일 이상이 병사하여 완전히 몰락해버린 마을이었다. 생존자들은 도시를 떠났고, 얼마가 지난 후에 당시 가족을 떠나 보낸 주민들이 돌아와 가족들의 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누구도 그 불길한 마을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설마 그런 곳에다 숨겨뒀을 줄은."
그런 불길하기 짝이 없는 곳에 창을, 그것도 지하 납골당에 숨겨놓았다니. 듣지 못했다면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 그럼 가서 확인해봐야겠군. 네 놈의 목이 붙어있어야 할지, 떨어져야 할지를."
토어릭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래 된 일이라고는 하나, 여전히 흉명을 가지고 있는 유령 마을에 대한 이야기도 그에게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
토어릭과 니클라스는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모브락을 제외한 모든 감찰대원들을 죽여 묻어버리고 곧장 도브겐으로 향했다.
"괜찮겠습니까? 놈이 니클라스님을 의심할 겁니다."
"그렇게까지 나를 생각해주고 있었는지는 몰랐군. 그대가 내게 접근했을 때부터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 않나."
"거절하셨다면 그대로 물러났을 겁니다."
"거절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겠지. 말장난은 그쯤 하는 게 어떤가."
"그러지요. 하지만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당장 급한 대로 흔적을 지우기는 했지만, 미겔은 독사 같은 놈이니 곧 어떻게든 추격하기 시작할 겁니다."
"난 가족이 없다. 신뢰할 수 있는 수하들은 이곳에 같이 왔지."
"이대로 위글로우를 떠나도 문제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대가 터무니 없는 거짓말쟁이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네."
"그건 곧 알게 되실 겁니다."
그들은 도브겐으로 말을 달렸다. 만신창이가 된 모브락이 비명을 질렀으나 간단히 기절시키고 밤낮으로 길을 재촉했다.
도브겐은 위글로우로부터 엿새 거리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바쁘게 말을 달리니 나흘 만에 닿을 수 있었다.
'으스스하군.'
거의 다 썩어버린 외곽의 울타리와 다 무너진 집터들 덕분에 이곳에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쪽이다."
가뜩이나 망가진 몸에 휴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강행군을 겪은 모브락은 가만히 두면 곧 죽을 것 같은 몰골이 되었다. 그는 잔뜩 마른 목소리로 음산한 폐허의 구석을 가리켰다.
"저쪽에…지하 무덤으로 가는 입구가 있다."
무덤이라고는 하지만 땅굴 같은 느낌이었다. 두꺼운 나무 기둥을 세웠고, 안쪽의 작은 공간에는 자그마한 토기들이 빼곡하게 늘어져 있었다.
"어떻게 이런 곳을 알았지?"
20년도 더 전에 몰락한 마을이다.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어렵지만, 이런 비밀스런 공간이 있다는 것까지 아는 것은 타지인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부하 놈들 중에…이곳 출신이 있었거든."
토어릭이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좋아. 창은 어디에 있지?"
"저기…저 둥근 토기 아래 땅을 파봐라."
토어릭은 자신이 직접 다가가 모브락이 가리킨 곳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 동안 흙 바닥을 파헤치던 그는 손끝에 걸리는 단단한 물체를 느끼고 눈을 크게 떴다. 금속임에 틀림 없는 상자, 혹은 궤짝. 그 너머로까지 느껴지는, 손을 대자마자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꺼림칙한 기운.
"…찾았군."
조심스럽게 흙을 들어내고 기다란 철 궤짝을 꺼냈다. 무게가 상당하여 부하들과 함께 들어올려야 했다.
토어릭은 궤짝의 뚜껑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창을 천으로 감쌌다. 평범한 천이 아니라 모페이브가 건네준 천이었다. 무슨 술법이 걸려있다고 했던가. 창이 내뿜는 기운을 막아준다고 했었다.
"이걸로 끝인가."
토어릭이 작게 중얼거리자 뒤에 있던 니클라스가 입을 열었다.
"끝? 아직이지."
"……?"
"그 창을 가지고 그대의 주인에게 무사히 돌아가야 끝 아니겠나."
"…그렇군요."
미겔이 모브락과 니클라스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부하들을 풀기 시작한다면 이쪽의 행적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서둘러야겠습니다."
토어릭이 나직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