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화
"어이. 벌써 들어가나?"
니클라스는 뒤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내가 할 일은 다 끝냈다."
"쯧!"
"무슨 볼일이지?"
"엉?"
뒤돌아보니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가 삐딱하게 서 있었다. 니클라스와 마찬가지로 감찰대의 부대장 자리에 있는 모브락이었다. 감찰대장 미겔의 심복이기도 한 그는 여러모로 니클라스와는 맞지 않는 자였다. 서로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말도 잘 섞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먼저 와서 말을 걸었다. 니클라스는 그 이유가 짐작이 갔다.
"아, 다른 게 아니라…알고 있겠지만, 이번에 내 밑에 있는 놈들이 사소한 사고를 쳤지 않나."
"반 병신이 된 시민이 넷에 죽은 이가 둘이다. 이 정도면 사소하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
"음. 뭐 그거야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른 거고. 아무튼, 멍청한 놈들이기는 해도 내 밑에서 없어서는 곤란하단 말이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겠군."
"역시 머리가 좋으니 눈치도 빠르군. 우리 대장 나리가 왜 자네를 예뻐하는지 알 것……."
"하지만 곤란해. 규정에 예외를 둘 수는 없다."
"…어이."
"애초 대장님께서 내게 이 일을 맡기신 이유가 뭐라 생각하지? 규율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예외를 두지 않고, 엄하며 공정하게 이루어지기에 규율이다."
모브락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한 발 다가섰다. 한 대 후려치기라도 할 기세였지만 니클라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잡아먹을 듯 눈싸움을 벌이던 모브락은 인상을 찡그린 채로 작게 웃었다.
"흐흐. 잘났군. 잘났어. 기껏 한 번 우리 사이의 감정을 좀 씻어볼까 했는데 그렇게 나오겠다면…뭐 좋아.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부탁인데, 멍청한 짓은 벌이지 않았으면 좋겠군. 사고를 치는 건 좋지만, 그 뒷수습을 하는 건 나란 말이다."
"계속 그렇게 잘난 척이나 하고 있으라고. 난 대장과 달라. 난 네놈을 믿지 않거든. 겉으로는 칼 같은 척하면서도 뒤로는 지저분한 수작을 부리고 있겠지. 하나만 걸리라고. 그때는 '내 규율'대로 처리해줄 테니까."
"그럴 일은 없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지. 흐흐. 아무튼…기대하라고."
음침한 웃음을 흘리고 멀어지는 모브락.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니클라스는 조소했다.
'멍청한 놈.'
나름대로 위협이랍시고 지껄인 것이겠지만, 그저 우습기만 하다. 어떻게 저런 놈이 감찰대의 부대장 자리에 있는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너 따위 잡배에게 당할 정도였다면 지금까지 목이 붙어있지도 못했을 거다.'
차라리 장님에게 덜미를 잡히면 잡혔지, 모브락에게 잡힐 일은 없을 것이다.
"대장님."
니클라스가 관사를 나오자 그의 수하가 다가와 작게 말했다.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사람?"
"군터 경의 수하입니다."
그 말을 하며 안 그래도 작은 목소리는 속삭이는 것처럼 변했다. 그 말에 니클라스의 눈빛이 일변했으나, 그의 표정은 대수롭지 않은 말을 들은 것처럼 담담했다.
"너만 알고 있느냐?"
"예."
"어디에 있지?"
"만나시렵니까?"
"나를 찾아온 이를 만나지 않을 이유가 있겠나. 보아하니 일전의 일에 대해 보답이라도 하러 온 모양인데."
니클라스가 우려를 표하는 수하에게 태연히 대꾸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그의 말은 완전히 틀렸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기댈 곳이 니클라스님 밖에 없기에, 염치불구하고 이렇게 부탁을 드립니다."
그를 찾아온 이는 일전의 일에 보답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보답은커녕, 오히려 곤란한 일을 부탁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냥 그때 거기서 죽게 내버려둘 걸 그랬군. 그랬다면 지금 같은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니클라스는 자신을 토어릭이라 밝힌 사내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이 썩 좋지 않음을 알 텐데도 토어릭이라는 자는 여유로워 보였다. 미안함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목이 날아갈 것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그때 너희를 도왔던 것은 어디까지나 죽은 군터 경에 대한 내 나름의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무슨 빚을 진 것도 아닌데, 어째서 무리하게 너희를 도와야 하지?"
"저희를 돕는 것이 아니라, 군터 경을 돕는다고 생각해주십시오."
"때를 쓰는 건가? 그렇다면 사람을 잘못 찾았군."
니클라스는 이 배짱만 두둑한 자를 내쫓으려 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는 소리에, 목구멍까지 차오른 '돌려보내라'라는 말을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군터 경은 살아계십니다."
"뭐?"
"아아. 말을 잘못 했군요. 살아계신 것이 아니라, 살아나셨습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미쳤군. 내가 지금까지 미친 자와 이야기를 나눈 건가? 시간만 버렸어. 돌아가라. 다시 날 찾는다면 그때는 목을 벨 것이다."
"이해합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다니. 이건 뭐 무슨 전설이나 영웅담의 한 구절도 아니고 말이지요."
"……."
"그렇지만 사실입니다. 저야 제 눈으로 직접 봤기에 믿을 수 있었지만, 니클라스님은 그게 아니시니…그분께서 전하라 하신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점점 헛소리를."
"그때 하신 인사는 잘 받았다 하십니다. 그리고, 복부는 괜찮으냐 물으라 하시더군요."
"……!"
그 한 마디에 니클라스의 심정이 일변했다. 방금 토어릭이 한 말은, 그 자리에 있던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날. 군터가 최후를 맞던 그 자리에 니클라스도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자리에는 감찰대의 거의 전 병력이 투입되었었으니까. 니클라스도 군터를 죽이기 위해 칼을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나서긴 했어도 적극적으로 덤벼들지는 않았다. 군터에게 진 빚도 있었거니와, 비열한 방법으로 군터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느꼈는지, 군터는 창대 끝으로 그의 복부를 후려쳐 쓰러뜨리곤 돌아보지 않았다. 니클라스는 그가 자신을 살려주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기에 마지막 순간, 미겔의 칼이 군터의 목을 가르기 직전에 작게 고개 숙였다.
"설마……."
당사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창대 끝에 맞은 복부의 이야기는 더더욱. 니클라스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복부로 가져갔다. 통증은 가라앉은 지 오래지만, 그날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는 듯했다.
"솔직히…믿기 힘들군."
"이해합니다."
"그…창을 가져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나?"
"예."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까지 들은 이상 단순히 헛소리로만 치부할 수도 없다.
"어려운 일이다. 확실히 네 말대로 미겔이 그 창을 전리품으로 가져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그 창은 미겔에게 있지 않아."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영주 부인…그녀가 미겔에게 한 말이 있다. 그녀는 그 창이 불길한 마물이라 했지. 곁에 두고 있으면 화를 입을 거라고 충고했다. 미겔도 그녀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수는 없었는지, 그녀의 조언대로 그 창을 파괴하려 했지."
"그래서…창이 파괴되었다는 말입니까?"
토어릭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니클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불에 녹여보려고도 했고, 장정 몇 명이 망치로 종일 두드리기도 했지만 그 창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더군. 미겔은 그 창을 어찌 해보기를 포기했다. 대신, 그것을 어딘가에 숨겨버렸지.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말이야."
"…그렇지만, 니클라스님께서는 알고 계시겠지요? 공께서는 미겔이 신뢰하는 측근이 아니십니까."
"안타깝지만, 나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알 만한 자를 알고 있지."
"그게 누굽니까?"
*
"흐흐. 내 이럴 줄 알았지."
"더러운 놈이군요. 그렇게 깨끗한 척 도도하게 굴더니만 이런 식으로 딴 주머니를 차다니."
"그래서 내 전부터 말하지 않았냐. 세상에 욕심 없는 놈은 없다고. 다만 어떤 식으로든 그걸 감추는 놈만 있을 뿐이라고."
모브락은 그에게 들어온 보고에 잔뜩 흥분한 채 수하들과 함께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확신하지 못했었다. 물론 따로 지시를 내려놓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반응이 올 줄은 모브락 자신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니클라스가 아힌키우스에서 온 상인과 만났다.
감찰대의 부대장이 상인과 따로 만날 이유가 있겠는가. 그것도 외지의 상인과?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있기에 자리를 갖는 게 아니겠나.
게다가, 만난다는 장소도 니클라스의 집이나 내성의 식당 같은 곳이 아니라 외성의 후미진 곳이란다. 구린내가 풀풀 풍기지 않는가. 지금 막 니클라스가 수하 몇 명만 거느리고 은밀히 집을 나섰다는 보고를 받았다.
'흐흐. 네놈도 결국 나와 다를 바 없는 놈이라는 거지.'
구린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급습해서 니클라스의 약점을 잡는 거다. 그런 후에 며칠 전 못다한 이야기를 끝내고, 앞으로도 거슬리는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잘 교육을 시키면 된다.
'멍청한 놈 같으니. 어설프게 깔끔한 놈들은 이래서 안 돼. 딴 주머니를 차는 것도 차본 놈들이 잘한다니까.'
모브락은 수하가 전한 장소로 열심히 말을 몰았다. 자신이 들이닥쳤을 때 니클라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가 됐다.
"여긴가?"
"예. 틀림없습니다. 예전에 화전민촌이었던 곳이랍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람의 발길이 끊긴지가 벌써 십 년도 더 된 곳이라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데, 용케 그런 곳에서 접선을 하는 모양입니다."
"점점 더 흥미롭군."
"예?"
"생각해봐라. 이런 곳에서 은밀하게 만나서 나눌 이야기가 대체 무엇이겠느냐?"
"아……."
"구려도 보통 구린 게 아니야. 이거 정말 큰 건일 수도 있겠는데?"
모브락이 비릿하게 웃으며 야트막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옛날생각나는구만."
한때, 모브락은 도적이었다. 때로는 말을 타고 행상을 습격하기도 했었고, 산채에 머물며 관군을 피해 숨을 죽이기도 했었다.
'그때는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는데 말이야.'
옛 추억을 더듬으며 상념에 잠겨있을 때였다.
피잉-!
갑작스레 섬뜩한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말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틀었다. 모브락은 몸부림 치는 말 위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잡으며, 말의 목 언저리에 화살 한 대가 박혀있음을 확인했다.
"이게 무슨……!"
그가 노성을 내지르려던 찰나. 곧바로 이어지는 족히 수십 발의 화살이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크악!"
"아아아악!"
모브락은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랐지만, 무언가 단단히 잘못 됐다는 것은 알아차렸다. 칼밥을 먹으며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생사의 기로에 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온 길로 빠져나간다!"
그리 외치기도 전에 말머리를 돌린 그였다. 그러나 몸에 화살이 박힌 말은 얼마 달리지도 못하고 멈춰 서야만 했다. 어느새 그들이 지나온 좁다란 길을 틀어막고 있는 한때의 인마 때문이었다.
"웬 놈들이냐!"
수는 스무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쉽게 가자. 얌전히 말에서 내려. 그럼 험하게는 하지 않으마."
"미친 놈! 목이 달아나고서 후회해도 늦는다!"
성난 멧돼지마냥 씩씩거리는 모브락을 보며, 토어릭은 입술을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