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화
"…십니까. …떤."
군터는 슬쩍 손을 들었다. 가벼운 동작이었으나 손에 힘을 주기가 쉽지 않았고,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감내하고 움직인 것은, 팔에 힘겹게 힘을 주는 것보다도 시끄럽기 짝이 없는 소음들이 그를 더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
소음들이 멎었다. 군터는 입술을 달싹이며 역시 힘겹게 한 마디를 뱉었다.
"다…나가라. 모…페이브…만 남아."
"옛."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인원이 다 물러가고, 그제야 비로소 조용해졌다.
옆에 모페이브가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의 감각은 도대체 어찌된 것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죽었으나, 기척 같은 것을 감지하는 감각만은 여전히 날카롭게 서 있었다.
"설명…해라."
"어디서부터 아뢰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순간은 기억하십니까."
'마지막…….'
군터는 멍한 정신을 채찍질했다. 아직까지, 그는 지금의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기억이라고 하는 것들도 단편적으로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모페이브가 말한 '마지막'을 곱씹으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위글로우. 영주 관저. 습격. 미겔. 그리고, 목을 가르던 칼날.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아니. 기억 한다."
그래. 이제 조금 그날의 기억이 선명해졌다.
"나는…죽었었군."
"예. 장주님께서는 한 번 죽으셨습니다."
"어떻게…된 거지?"
"간단히 말씀 드리자면, 장주님의 생명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 되살린 것입니다."
"…자세히."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할 일도 없다."
가만히 누워서 숨만 쉬고 있는 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시끄러운 소음은 고통이나, 모페이브의 목소리는 적당히 조용하여 듣기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러시다면."
모페이브가 말을 이었다.
"생명이라 하는 것은 육신과 영의 결합입니다. 영이 내용물이라 한다면 육신은 그릇이지요. 내용물이 없는 그릇은 의미가 없고, 그릇이 없는 내용물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이 죽음을 맞는 과정은, 그릇이 깨져 내용물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육신이 기능을 못하게 되면 영은 망가진 그릇을 떠나게 되지요. 장주님의 육신은 이미 한 번 망가졌었습니다.
일반적이었다면 목이 칼에 베인 순간 모든 것이 끝났을 겁니다."
"……."
"그러나 장주님께서는 보통 사람과는 다르시지요. 육신의 강건함을 말함이 아닙니다. 장주님께서는 사기를 다루시며, 이제껏 수 없이 생기와 사기를 몸에 품고 흘리셨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죽음을 앞두고서야 단 한 번 경험할 수 있는 것을 장주님께서는 예사로 겪으셨다는 것이지요. 하여, 진짜 죽음이 닥쳐왔음에도 장주님의 영은 보다 오랫동안 깨어진 육신에 머물렀습니다."
날카로운 칼은 단번에 줄을 자를 수 있다. 그러나 날이 무딘 칼은 한 번에 자르지 못한다. 군터에게 닥친 죽음이 그러했다. 사기를 다루며, 군터의 육신은 죽음에 익숙해졌다. 영 역시 마찬가지. 때문에 단칼에 영과 육신의 연결고리를 잘라내야 했을 죽음이 제 힘을 다 쓰지 못했다.
모페이브의 설명은 말하자면 그것이었다.
"…황당하군."
"사실을 말씀 드리자면, 어디까지나 가설이고 추측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운이 좋았지요."
그래. 운이 좋았다. 그러나 그 운이라는 것도 잡을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는 것.
"자네가 날 살렸군."
"겸양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번만큼은 저도 제가 이룬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왜 아니겠는가. 죽은 사람을 살린 일이다. 이 이야기에 세상에 퍼진다면 모페이브라는 이름을 세상 사람 모두가 다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내 몸은…어찌 된 거지?"
"비록 영이 다시 자리를 잡았다 하나, 그릇은 여전히 망가져 있습니다. 거기에, 장주님의 몸은 근 열흘 동안이나 죽은 채로 썩어가고 있었던 터라 상태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지요. 지금도 여전히, 장주님께서는 죽음의 문턱에 서 계십니다."
그런 것 같았다. 벌써 이틀째 누워만 있으며 이런저런 치료를 받고 있음에도 몸이 호전되는 것 같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으니. 그나마 악화되지 않는 것에 다행스러워 해야 할 지경이었다.
"방도는?"
"일단은…되살아난 몸의 회복력에 기대보아야겠지요."
"알고 있지 않나. 지금의 내 몸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재에 온기가 남아있다고 해서 재가 아닌 것은 아닌 것처럼."
"허나…송구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특별한 수가 없습니다."
"방도는 내가 안다."
"예? 어떤……."
"내 창은 어디에 있지?"
"아아."
알았다는 듯, 모페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바로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지?"
"위글로우에 있습니다. 미겔의 손에 들어간 것 같더군요."
"……."
아주 잠깐 동안. 군터는 '미겔'에 대해 떠올리려 노력했다. 자신이 겪었던 죽음의 과정 속에 등장하는 얼굴이 그 이름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약간의 수고가 필요했다.
"아."
모페이브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섬뜩하게 뻗쳐오는 살기도 살기지만, 그보다 훨씬 강렬한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다.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누워서 숨 쉬는 것밖에 못하는 군터가 발하는 분노는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고 위압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것인지, 모페이브는 두려움 다음에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래. 나는…놈에게 패해 죽었었지."
"패하다니요. 비열한 음모와 함정에 당하신 것뿐입니다."
"그렇다 한들, 내 목에 놈의 칼날이 박혔던 것이 달라지지는 않아."
말을 하며 군터는 앙상하게 마른 손을 자신의 목으로 가져갔다. 흉터도 아니고 상처도 아닌, 기괴한 형태로 파이고 썩은 것 같은 곳을 슬쩍 어루만졌다.
"살라스를…들라 하게."
*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그야말로 텅 비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막 되살아난 군터는 그야말로 식물과도 같은 상태였다. 숨을 쉬고 물을 마시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조금씩 머리가 맑아지면서, 군터는 하나씩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 시체와 다를 바 없는 몸뚱이를 회복시키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하고 싶다고 해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죽여주십시오."
살라스는 들어오자마자 대뜸 무릎부터 꿇었다. 자신만 따로 불렀다는 것의 의미를 짐작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군터는 살라스를 벌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가족들은 어찌 됐지?"
"모두 무사하십니다."
"…그래. 할렌은?"
"역시 무사합니다. 위글로우를 빠져나오면서 다소 부상을 입은 터라 치료 중에 있습니다."
"뒷수습은 잘 했구나. 벌은커녕 상을 내려야 할 것 같군."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미연에 그 놈의 음모를 알아차렸더라면 이런 일은……."
질끈 씹은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군터는 분노와 자책으로 얼룩진 살라스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어찌 된 것이냐. 무슨 일이 있었고, 너와 야스메티는 무엇을 했지?"
"야스메티는…그는 제국에 가 있습니다. 위글로우에서 벌어진 모든 일은 다 제 잘못입니다."
"설명이 필요하다."
위글로우에 있어야 할 야스메티가 어째서 제국에 가 있는가. 군터는 그 영문을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살라스는 무릎을 꿇은 채로 그간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국 7황자와 2황자의 전쟁에 변수가 생겼습니다."
"변수?"
"7황자가 무난히 승리할 것이라 예상했었지요. 그러나…2황자 측에 제국 군주가 합류했습니다."
"……."
"군주 룬차이. 그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 합니다. 때문에 2황자의 진격이 멈추고 전쟁이 지지부진한 흐름으로 접어들었다 하더군요. 야스메티는 일찍부터 7황자가 무난히 승리할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뜻밖의 변수가 생기자 당황한 듯싶었습니다.
하여 전쟁이 어찌 돌아가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며 얼마의 호위를 거느리고 제국으로 내려갔지요."
"그렇군."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대충은 이해했다. 야스메티는 평소에도 누누이 제국의 정세를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리에론보다도 더.
하지만 우습지 않은가. 바깥의 일에 눈을 돌리고 있느라 정작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보지 못했으니.
"일이 벌어지고 나서 곧장 소식을 전했으니 지금쯤 돌아오고 있을 것입니다."
"……."
분노가 가시고 나자 현재의 상황을 보다 냉정하게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보았을 때, 상황은 상당히 절망적이었다. 정말로 영주가 죽었다면 위글로우는 미겔의 손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벌써 꽤나 시간이 흘렀으니, 어쩌면 위글로우를 넘어 코누다이안 전체가 놈의 통제에 놓였을지도 모른다. 놈은 그 무자 계집과 손을 잡았을 테니 명분까지 쥐었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지금 당장 그의 신세는 추격을 걱정해야 하는 도망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미겔과 무자 계집이 작당하여 영주를 암살했다 떠든들 누가 들어줄 것인가.
미겔 그 놈은 무자 계집과 손을 잡았고, 리에론과도 손을 잡았음에 분명하다. 리에론이 놈의 편을 들 것이고, 지금 베이고르에 리에론을 거스를 수 있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궁리를 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어설프게 계획을 내는 것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야스메티가 오고 있다니, 지금으로서는 그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살라스."
"예."
"내 창을 찾아와야겠다."
"창…말씀이십니까."
"그 놈이 전리품으로 가져갔다더군. 가져올 수 있겠느냐?"
"놈의 의심을 사게 될 것입니다. 잘못하면 추격대가 붙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방도가 있겠느냐?"
"있을 것도 같습니다. 실은 저희가 위글로우를 탈출할 때, 도움을 준 자가 있었습니다."
"누구냐."
"혹, 모렌스 자작에 맞서던 볼드의 잔당을 기억하십니까?"
"볼드의 잔당?"
"그들을 이끌던 우두머리입니다. 장주님께서 직접 거두셨었지 않습니까. 니클라스라는 이름의……."
"그래. 기억이 나는군. 그 녀석이 도움을 줬단 말이냐."
"예. 아시다시피 모렌스 자작에 대한 그의 증오는 매우 깊습니다. 헌데 미겔이 리에론과 손을 잡는다는 것을 알았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녀석은 아직 위글로우에 있나?"
"예. 그는 미겔에 대해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중하면서 있다가 크게 한 방을 먹일 생각인 모양입니다."
"그래서…그 녀석을 통해 일을 진행하겠다는 거냐."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좋다. 그리 해라."
긴 대화가 끝나고, 군터는 살라스를 물러가게 한 뒤 다시 죽은 듯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