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화
"군터 경. 아니 장군. 먼 발치에서 몇 번 뵈었던 적이 있습니다만, 기억하십니까?"
"기억한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코르넬 휘하의 영주 직속 친위대원으로서 코르넬의 옆에 자주 따라다니던 자라는 것은 기억이 났다.
"영주님께서 전하시는 서신입니다."
"서신이라."
이미 이곳의 사정은 들어 알고 있을 테니 왜 이리 지체하느냐는 내용은 아닐 터. 군터는 약간의 의문을 가지고 서신의 봉인을 뜯었다. 그리고 짤막하게 쓰인 글을 읽었다.
한 눈에 들어오는 글의 길이를 봤을 때부터, 군터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평소 막시밀리언은 간단한 말을 전하더라도 서두에 필요 없는 말들을 얼마 정도 적곤 했다. 그것은 어떤 의도를 가진다기 보다, 그의 버릇 같은 것이었다. 막시밀리언의 표현에 따르면, '치장'이었다.
그런데 지금 본 서신의 내용은 매우 짧았다. 평소와 같은 '치장'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짧은 만큼 내용도 간결했다. 그리고 분명했다.
-돌아와라.
군터는 그 한 마디로 압축되는 내용의 서신을 접고 그것을 전한 친위대원을 보았다.
"서신의 내용을 아나?"
"모릅니다."
"위글로우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입이 무거운 것은 친위 병사로서의 덕목이지. 그러나 나는 알아야겠다."
군터가 기세를 일으켰다. 그의 사나운 기운에 미약하게나마 살기까지 섞이자 친위대원의 안색이 단번에 새하얗게 질렸다. 충실히 단련한 무인조차 견디기 힘들 정도로 군터의 기세는 거칠고 사나웠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장군. 저는 그저 영주님의 서신을 전할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 난 알아야겠다. 그러니 말해라. 그간 영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으으……."
친위대원은 입이 무거운 척을 했지만, 그렇게 대가 센 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군터의 압력에 굴복한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을 털어놓았다.
그가 한 이야기 중 군터가 귀를 기울인 첫째는, 코르넬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코르넬이 죽었다……."
조금 복잡한 기분이었다.
영지의 인물들 중 수하들을 제외하고 군터와 가장 교분이 깊던 자가 코르넬이었다. 영주가 처음 수하들을 모집할 때부터 알던 사이였고, 그런 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잘 알았다.
그랬던 자가 죽었다니 숱하게 죽음을 봐온 군터로서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병이라고.'
그것도 사인이 병이다. 물론 무인이라고 해서 병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렇다 해도…….
문득 예전처럼 칼을 쥘 수가 없다고 중얼거리던 코르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영주님께서도 편찮으신 상황입니다."
"영주님께서?"
"예. 의원이 매일 붙어 있습니다만, 병명은 물론이고 마땅히 손을 쓰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위중하신 것이냐?"
답은 침묵으로 돌아왔다. 군터는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후우."
순간 군터는 자신도 모르게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것을 들었다. 때문에 군터는 잠깐 홀로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영주님께서 나를 부르심은 후사 문제 때문인가?"
"장군. 무례하십니다."
"……."
그래. 말실수였다. 군터 자신도 인정했다. 위독하든 어쨌든, 아직은 살아있는 영주를 두고 후사 운운한 것은 영주가 죽을 것이라 말한 것과 다름 없다.
그런데 말실수를 한 것은 군터이건만, 안색이 어두워진 것은 슬쩍 언성을 높였던 친위대원이었다.
"실은…영주님께서 전하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장군께서 서신을 읽고 제게 더 물으셨을 때. 따로 말을 전하라 하셨지요."
"뭔가."
그는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영주님께서는 지금……."
친위대원이 꺼낸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영주가 라일라와 대립하고 있다는, 솔직히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군터가 군대를 이끌고 위글로우를떠나올 때만 해도 둘의 사이는 원만한 부부 사이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영주님께서는 부인께서 병을 낫게 할 방도를 가지고 있다 믿고 계십니다."
병을 낫게 할 방도라.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라일라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다. 그녀는 전직 초원 부족의 무녀로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의원이 고치지 못하는 병이라고 하니, 영주는 붙잡을 수 있는 모든 걸 붙잡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일라는 그런 영주의 믿음을 배신했다. 정말로 병을 고칠 능력이 없어서일 수도 있겠으나, 만약 영주가 생각하고 있는 대로 방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모른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면.
속단은 이르지만 답은 하나뿐일 것이다.
'그 꼬마를 코누다이안의 영주로 만들기 위해서겠지.'
참 가증스러운 계집이다. 영주의 총애가그리도 컸거늘……. 물론 확실한 건 아니라고 하지만 말이다.
"알겠다. 오늘 입궐하는 즉시 말하고 떠나겠다."
"예. 그럼 소관은 먼저 움직이겠습니다."
"바로 말인가? 오늘 새벽에 도착했다 하지 않았나."
"제 몸이 상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영주님께 돌아가봐야 합니다."
단호하게 답하는 모습에 별볼일 없다 여겼던 사내가 조금은 다시 보였다.
"이름이 뭔가?"
"드미트리입니다."
"좋네 드미트리. 그리 하게. 튼튼한 말 세 필을 내주지."
"감사합니다."
*
드미트리와 만난 후. 군터는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가 곧장 왕성으로 향했다.
"전하를 뵙고 싶네."
"전해 올리겠습니다. 기다리십시오."
알현을 요청하고 잠깐 기다리자 근위병이 곧 돌아왔다.
"전하께서 피곤하시다고 나중에 다시 들라십니다."
"…급한 일이라고 전해주게."
"전하께서는 이미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알고 있네. 허나 급한 일이라 하지 않는가."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전하를 알현하고 싶으시다면 오후 쯤에 다시 와주십시오."
군터는 본래 맡은 일에 충실한 자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 뻣뻣한 근위병의 단호한 말을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다시 한 번……."
"애꿎은 병사를 곤란하게 하면 쓰나. 군터 장군. 전하께서 피곤하다 말씀하셨지 않나. 이럴 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신하 된 자의 도리가 아니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군터는 슬쩍 표정을 구겼다.
"각하께서 이 시간에 어인 일이십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어인 일인가? 급하다는 것은 또 뭐고? 내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라면 알고 싶군. 혹시 아나? 내가 자네를 도울 수 있을지."
"……."
군터는 잠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나른해 보이는 리에론 공작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영지로 돌아가봐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각하께서 전하께 말씀을 올려주시겠습니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군. 자네도 알겠지만 지금 이어지고 있는 승전연은 전하의 마음과도 같네. 그런 자리를 도중에 나가겠다면 그만한 사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전하의 위신이 걸린 일이니까 말이네. 더욱이 자네는 동부군의 사령관이 아닌가. 말해두지만, 어지간한 것으로는 힘들 것이야. "
"직접 전하를 뵙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으신다면 전하께서도 이해해주실 것입니다."
"그래. 그러길 바라지."
군터는 숙소로 돌아와 오후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연회장에는 왕이 없었다. 물어보니 왕이 몸이 좋지 않아 연회에 불참했다 했다.
'이런.'
혹시나 하고 연회장을 나와 따로 알현을 요청했지만, 역시나 아침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몸이 좋지 않아 나중에 찾아오라는.
"후우."
답답했다. 하필이면 이럴 때 왕이 드러누워 버릴 것이 뭐란 말인가. 지난 연회에 빠짐 없이 참석해 술을 마시더니 술병이라도 난 것인가.
하는 수 없이 다음날을 기약했다. 그리고 해가 뜨자마자 다시 알현을 신청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같았고, 또 그 다음날도 같았다.
이쯤 되자 군터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왕이 정말 중병에라도 걸린 것이 아닌 이상 이렇게까지 나올 수는 없었다.
일개 기사의 신분이라고는 하나 리에론 공작의 말마따나, 일단은 동부군의 수장이 아닌가. 지금 열리고 있는 연회의 주역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군터였다. 그런데 급한 일이라 말을 했음에도 연달아 사흘 동안이나 바람을 맞힌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무언가 수를 써야 한다.'
달리 방도를 내지 않는다면 며칠이고 이런 상황이 되풀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추측이지만, 군터는 왕이 자신을 피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궁리를 하던 군터는 시어문드를 불렀다. 엄밀히 따져 외지인인 그에게 영지의 속사정을 털어놓아도 될지 망설여졌지만, 이대로 여기서 계속 발목을 잡히고 있는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군터는 시어문드가 밖에다 떠벌리고 다니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해서 당장 코누다이안으로 돌아가야 하네. 그런데 전하께서 알현을 받아주시지를 않는군. 공교롭게도 내가 찾아간 날부터 와병 중이시란 말이지."
"뭔가 수를 내야겠군요."
"그렇지. 그래서 자네의 생각을 빌리고 싶군. 뭔가 수가 없겠는가?"
"으음. 전하의 측근들을 통해 접근하심이 어떨지요."
"측근이라면?"
"알려지기로, 전하께서 가장 총애하는 신하가 둘 있다고 하지요. 바라누엔 각하와 하이윈즈 각하 말입니다."
"바라누엔과 하이윈즈라……."
"전하께서는 편찮으시다지만, 그 두 분은 연회장에 나오실 겁니다. 그분들과 말씀을 나눠보십시오. 그분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면, 자연히 전하께도 전해지지 않겠습니까?"
"…좋아. 그리 해보지."
군터는 다음날 연회에 참석하여 바라누엔 백작을 찾았다. 하이윈즈 백작이라는 자는 이름만 얼핏 들었을 뿐 면식이 없었으나, 바라누엔 백작은 만난 적이 있었다.
비록 이야기를 나누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영지의 손님으로 온 그를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는 영주와도 공적으로나마 교분이 있었으니, 사정을 말하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바라누엔 백작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연회장에서 그의 자리는 군터의 자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바라누엔 각하."
"군터 장군이시군. 무슨 일이오?"
푸근한 인상이나 눈매만은 날카로운 중년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다.
"송구스럽습니다만, 긴히 드릴 청이 있습니다. 잠깐 괜찮으실지."
"청이라.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청이지만, 맹세컨대 사사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야."
군터는 바라누엔 백작과 따로 연회장을 나가 한적한 뒤뜰로 향했다.
"말해보시오. 내게 청할 것이 무엇인지."
"실은……."
군터는 그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영주가 위독한 상황이며, 그가 자신에게 돌아오라 서신을 보냈다는 것까지.
"…해서 전하를 알현하기를 청했습니다만, 며칠 째 뵙지를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으음. 그렇군. 허나 미안하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없는 것 같소."
"예?"
"생각해보시오.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위글로우에 깔린 눈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으시오? 전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오."
"……."
"또한 리에론 공작도 알고 있지. 그게 문제요. 리에론 공작은 장군이 돌아가기를 원치 않소."
"그건 어째서입니까?"
"장군이 돌아간다는 건 왕도에 머물고 있는 군대도 돌아가는 것이 아니오? 그러면 승전연의 흥이 깨질 수밖에 없지. 리에론 공작은 그것을 원치 않소. 족히 보름은 더 본인이 왕도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고 있소."
"그런 유치한……."
"유치하다? 하하하."
유치하다는 말이 우스웠는지 아니면 통쾌했는지, 바라누엔 백작은 표정까지 요상하게 구겨가며 크게 웃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군. 아무튼, 리에론 공작은 장군이 돌아가기를 원치 않소. 그리고 전하께서는, 리에론 공작의 기분을 되도록이면 맞춰주고 싶어하시오."
"허면…방법이 없는 것입니까?"
"리에론 공작과 이야기를 나눠보시오. 조언을 해주자면, 그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들어주는 쪽으로 말을 해보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장군이 원하는 건 코누다이안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리에론 공작이 원하는 건 동부의 군대가 조금 더 왕도에 머물며 그의 장식품 역할을 해주는 것이오. 그 두 가지가 꼭 함께 묶인 것은 아니지 않소?"
"……."
바라누엔 백작은 그 말을 남기고 떠났고, 군터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
"쿨럭쿨럭!"
막시밀리언은 입을 가렸던 손을 뗐다. 피로 흥건하게 젖은 손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래.언제부터였나?"
속삭이는 것 같이 작은 목소리. 그러나 적막에 싸인 공간에서는 그 자그마한 목소리도 제법 뚜렷하게 들렸다.
"글쎄요. 사실 언제부터였느냐고 물으시는 것도 우습지 않습니까? 그리 말씀하시는 영주님께서도 처음부터 저를 믿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
"줄곧 의심하셨지요. 의심을 하기로 했다면 철저했어야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허술해지시더군요. 그래도 그럭저럭 만족하는 나날들이어서 얌전히 따랐습니다. 그런데…좋은 제안이 들어와서 말입니다."
"…쿨럭! 무엇을…약속 하던가?"
"영주 자리입니다."
"흐흐…하하! 그런가. 그 계집이 납득하던가?"
"현명한 여자입니다. 영주님께서 사라지시면 영지를 온전히 다스리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더군요. 코누다이안은 세 개 영지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 중에 하나를, 그녀 역시 하나를 받게 될 겁니다."
"…나머지 하나는?"
"그건 그쪽에서 결정하겠지요. 뭐…감시자가 하나 내려오지 않겠습니까?"
막시밀리언은 이제 피를 토하면서도 입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꺾어 막힌 하늘을 보았다. 천장 너머에는 아마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볼 수가 없다.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내가 10년을 넘도록 싸워 얻어낸 것을 너무 쉽게 가져가는군."
"세상사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버는 놈 따로 있고 훔치는 놈 따로 있지요.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그래. 알고는 있지. 하지만 직접 당하니…좀 화가 나는군."
"그렇다 한들 어쩌시겠습니까. 어차피 할 수 있는 것도 없으시지 않습니까."
미겔이 싱긋 웃었다. 막시밀리언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피식 웃었다.
"쉽지는 않을 거다."
"군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자 역시 곧 영주님의 뒤를 따라갈 겁니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손을 써뒀나."
"물론이지요."
"흥. 기대하지."
"그러십시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쿨럭쿨럭!"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가는 숨을 가쁘게 몰아 쉬며, 막시밀리언은 눈을 감았다.
다가오는 죽음에서 시선을 떼자 어두운 세계에 여러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 중 가장 먼저 떠오르고, 가장 뚜렷하게 보인 것은 아주 어린 소년이었다.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자그마한 손을 그에게 내미는 소년.
'미안하구나.'
평생 하지 않았던, 떠올리지도 않았던 말을 그제야 막시밀리언은 작게 중얼거렸다.
*
어두컴컴한 밤이 되어서야 굳게 닫힌 성문 앞에 당도했다.
군터는 할렌에게 일러 성문을 열게 했다.
앞으로 나간 할렌이 수문병들과 잠깐 실랑이를 하는 듯하더니, 곧 화들짝 놀라며 부리나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병사들까지 알아 좋을 일은 아니지 않느냐."
성문이 열리고, 군터는 수하들과 함께 곧장 내성으로 향했다. 그새 이야기가 전해졌는지 내성의 성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혹 살라스가 있나 싶어 훑어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살라스는 어디에 있나?"
"영주님께 가 계시는 것으로 압니다."
내성 수비대의 병사가 말했다.
"알겠다. 곧장 관저로 가겠다."
군터는 수십의 부하와 함께 영주 관저로 이동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본, 입구를 지키던 병사의 낯이 익었다.
"다시 뵙는군요."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고도 바로 다시 일을 하나?"
왕도로 그를 찾아와 서신을 전했던 병사. 드미트리였다.
"그것도 제가 해야 할 일. 이것도 마찬가지로 해야 할 일입니다."
"멋지군."
군터가 피식 웃었다. 왕도를 떠난 이후로 처음 짓는 웃음이었다.
"전해주겠나."
"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드미트리가 바쁘게 안쪽으로 달려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달려 나와 영주의 말을 전했다.
"들라십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군터는 할렌과 몇몇 수하만을 대동한 채 안으로 들어섰다. 앞서 걸으며 안내를 하던 드미트리는 저택이 보일 즈음 돌아서며 말했다.
"저는 이 이상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알고 있다."
허락을 받지 못한 것은 할렌과 수하들 역시 마찬가지. 군터는 홀로 관저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와는 달리 이번에는 영주의 침실로 향했다. 그의 병이 위중함을 다시 한 번 짐작할 수 있었다.
"군터 경."
침실의 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그를 알아보고 살짝 목례했다.
"아뢰어라."
"예."
병사가 몸을 돌려 문 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몸을 돌리지 않고 있던 병사들이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어 휘둘렀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움직임이었기에 군터는 가까스로 그것을 피해낼 수 있었다. 다급히 몸을 뒤로 뺀 뒤에야 그것이 예리한 단검임을 알아보았다.
"이게 무슨."
의문을 표시할 틈도 없었다. 세 명의 병사는 각기 한 방위를 점하고 달려들었다. 들어올 때 무장을 모두 해제한 군터였기에 곧바로 반격을 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또한 병사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은 것도 한 몫 했다.
'이놈들. 병사가 아니다.'
일반적인 급소를 노리는 공격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몸에 생채기를 내겠다는 듯, 틈이 보이면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 군터는 직감적으로 저 단검에 독이 발려있음을 짐작했다. 희미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역한 냄새는 그의 짐작을 확신으로 굳혀주었다.
"흡!"
그러나 군터도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회피에 집중하다가 한 순간 드러난 허점을 놓치지 않고 대뜸 주먹을 내질렀다.
그의 주먹은 병사의 어깨를 강타했고, 그대로 으스러뜨렸다.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는 병사의 품에 파고들어, 그의 몸을 휘둘러 나머지 두 병사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움직임이 멈춘 두 병사에게 벼락처럼 달려들어 각기 주먹과 발길질 한 방씩을 먹여주었다.
주먹은 안면을 박살냈고 발길질은 가슴을 뭉갰다. 군터는 쓰러져 비틀거리는 그들의 목을 발로 짓밟아 부숴버리고, 아직 열리지 않은 침실의 문을 발로 걷어차 박살냈다.
쾅!
"쏴라!"
그러나 문 너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석궁을 든 병사 너덧 명이었다. 그 뒤로도 병사들이 더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다급히 몸을 옆으로 날리면서도 군터는 침실 안에 영주가 없음을 확인했다.
푸푹!
"큭!"
본 순간 곧바로 움직였지만, 그럼에도 한 발의 화살을 왼쪽 허벅지에 허용하고 말았다. 군터가 집중한 것은 후끈한 고통 뒤에 뭔가 몸을 타고 흐르는 무언가였다.
'독.'
몸을 일으키며, 마침 바로 옆에 쓰러져 있던 병사의 손에서 단검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침실에서 가장 먼저 뛰어나온 병사의 목에 투척했다.
"컥!"
목에 단검이 박힌 병사가 비틀댔고, 몸을 일으킨 군터는 그의 몸을 방패 삼아 밀고 들어갔다. 뒤따라오던 병사들이 있었지만 군터의 괴력을 이기지 못하고 속절없이 밀려 넘어졌다.
"이…커억!"
지휘관으로 보이는 병사의 목을 낚아채 분지르고, 검을 쥔 그의 손목을 움켜잡고 휘둘러 옆의 병사를 베었다. 그리고 발악하는 지휘관을 방패 삼아 한 걸음 물러서면서 그의 손목을 비틀어 검을 빼냈다.
"영주님은 어디에 있나."
검을 손에 쥔 군터의 몸에서 끔찍할 정도의 살기가 터져 나왔다.
*
"흐음. 이상한데."
"뭐가 말입니까?"
뜬금없는 할렌의 말에 휘하 장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니. 이곳에는 예전에도 가끔 와본 적이 있는데, 그때와는 좀 달라서 말이다."
"뭐가 다릅니까?"
"너무 조용해."
"참. 그거야 당연하지요. 하늘을 보십시오. 안 조용하게 생겼나. 이 시간에 깨어있는 건 밤새들이나 우리 같은 사람들 뿐일 겁니다."
"아니. 그건 아는데, 그렇다 쳐도 너무 조용하단 말이지. 네 말대로 우리 같은 사람들은 깨어있을 텐데도, 너무 조용해."
"그게 무……."
퍼억!
말을 하다 말고 뒤로 쓰러지는 수하의 모습에, 순간 할렌조차도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입을 먼저 벌렸다. 그러나 한 순간이었을 뿐. 두 번째 화살이 날아들었을 즈음에, 할렌은 검을 뽑아 들고 외쳤다!
"적이다!"
적? 적이라니. 대체 무슨 적이란 말인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숱한 실전의 경험이 그들을 이끌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인지하고, 엄폐할 수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들이 예상치 못한 것은, 적이 한 방향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퍼퍽!
"아악!"
스무 명에 달하는 인원 중 열 명 가량이 쓰러졌다. 할렌은 분노를 토하면서도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짧은 순간의 막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누가?'
머릿속을 의문으로 가득 채우면서도 할렌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옆에 옆머리에 화살을 맞고 쓰러진 수하의 몸을 들어 뒤쪽을 가렸다. 화살 몇 대가 퍽퍽 소리를 내며 시신에 날아와 박혔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그때였다.
콰앙!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굉음과 함께 관저의 문이 박살 났다.
문을 박살낸 것은 머리가 반쯤 사라진 몸뚱이였다. 박살 난 문을 익숙한 모습의 거한이 뛰쳐나왔다.
"장주님!"
"할렌! 내 창을!"
그 말을 듣자마자 할렌은 들고 있던 고기 방패를 내던지고 등에 매고 있던, 두꺼운 천에 둘둘 싸인 창을 잡고 힘껏 던졌다.
푹!
그 짧은 사이 화살 한 대가 날아와 어깨 뒤쪽에 박혔지만, 다행히도 던진 창은 원하던 곳에 제대로 날아갔다.
콱!
거한, 군터는 천에 싸인 칸젤을 받아 들고서 외쳤다.
"따라라!"
날아드는 화살들을 모조리 쳐내며, 군터는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긴 창을 든 병사들이 그의 앞길을 막아 섰으나 칸젤을 든 군터에게는 잠깐 발이 묶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창두를 자르고, 파고들어 뼈와 살을 갈랐다. 고작 숨 몇 번 쉴 정도의 시간에 여섯을 베어 넘겼고, 군터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콰앙!
또 하나 닫혀 있던 문이 목 없는 몸뚱이와 부딪쳐 열렸다. 그러자 문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큭!"
함정에 함정. 함정의 연속이었다. 가는 곳마다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을 모두 베어 넘기며 움직이고 있자니, 영주 관저가 이리도 넓었나 싶었다.
'끝이 보인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니, 결국 계속해서 이어질 것만 같았던 함정도 끝이 보였다.
"다 왔다. 이제……."
"어딜 그리 바삐 가시나! 준비한 사람 섭섭하게!"
뒤쪽이었다. 이미 지나온 곳에서 들린 목소리에 발길을 멈출 필요는 없었지만, 그 목소리가 귀에 익은 목소리라는 것이 군터가 걸음을 멈춘 이유였다.
"미겔."
감찰대장 미겔이었다. 그는 족히 백 명은 되어 보이는, 기병을 뒤에 거느리고 느물느물하게 웃어 보였다.
"대단하군. 대단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애를 먹일 줄은 몰랐어. 알고 있나? 지금까지 당신 때문에 상한 병사가 족히 백은 훌쩍 넘을 것이야."
군터가 이를 깨물었다.
"네놈이었나?"
"뭘 말하는지 모르겠군. 당신의 목을 거둘 사람이 나라고 물은 거라면, 그렇다고 해두지."
믿기지 않았다. 어째서 영주를 만나러 와서 죽을 고비를 겪어야 하는지, 어째서 미겔이 저곳에서 자신을 죽이겠다 지껄이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믿기지도 않았다. 이게 현실인가 싶었지만, 온 몸에 입은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분명 이것이 현실이라 말하고 있었다.
'기병이 백.'
머릿속이 아찔할 정도로 복잡한 와중에도 군터의 눈은 적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전투에 익숙하다 못해 통달한 그의 경험과 감각은 본능적으로 상황을 판단했다.
"…들어라. 여기는 내가 맡겠다."
"장……!"
"알겠느냐. 내 아내와 아이들을 찾아라. 그리고 어떻게든 위글로우를 벗어나. 나는 놈들을 막고, 말을 뺏어 뒤따르겠다. 할렌. 이것은 명령이다."
맹렬히 휘몰아치는 살기는 할렌에게 하는 말에까지 스며들었다. 그 기세는 흥분하여 반발하려던 할렌마저 입을 다물게 했다.
"내가 움직이는 순간. 곧바로 달려라."
미겔이 손짓했다.
기병들이 말의 배를 찼고.
"달려!"
군터는 백 기의 기병을 향해 돌진했다.
*
어느 순간부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머리를 비우고, 보이고 들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콰직!
칸젤이 울부짖었다.
그에 왜 우느냐고, 속으로 물었다. 돌아오는 답은 더 큰 울음뿐이었다.
푸욱!
흐르는 물속에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았다. 힘 있게 발을 디뎠으나 갈수록 몸은 무거워지고, 밀어내는 힘에 조금씩 밀려났다.
그러다 어느 순간.
콱!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후우."
창 날이 한쪽 다리를 뚫고 나와 있었다. 목 아래에는 부러진 화살이 꽂혀 대롱대롱 흔들렸다.
히히힝!
울부짖는 말의 주둥이를 주먹으로 후려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푹!
"……."
등 뒤에서 꽂힌, 가슴을 뚫고 나온 창 한 자루에 군터는 일어나지 못하고 도로 주저앉았다.
'어째서?'
그 순간. 군터는 누구보다 칸젤에게 물었다.
어째서 더 힘을 내지 않느냐고. 왜 언제나 그랬듯, 전신을 가득 채우는 힘을 전해주지 않느냐고.
그의 물음에, 그의 창은 이번에도 슬픔 가득한 울음으로 답했다.
"…질리는군. 질려."
"…미…겔."
"여기까지만 하자고. 끔찍한 괴물 같으니."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꽉 다문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기까지 했다.
어째서?
기쁘지 않은가? 너의 승리인데.
"단칼에 보내주지. 꿈에라도 찾아오지 마시오."
흐릿한 세상에, 희끄무레한 선이 그어졌다.
서걱!
울음이 더 커졌다. 그러나 그 울음은 점점 더 희미해져만 갔다.
거센 물길이, 맹렬히 덮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