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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01화 (401/1,064)

401화

혹시 모를 재침을 대비한다고는 하지만, 대장이 죽고 기세가 꺾인 적들이 다시금 무언가를 도모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사실은 거의 불가능하다.

호타가르아를 위시한, 일찍부터 전사장 콰이렌과 그를 따르는 세력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대거 군에서 이탈하면서 그것은 더더욱 분명해졌다. 전사장 콰이렌을 따르던 이들과 호타가르아를 따르는 이들. 그들은 이제 힘을 합치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서로를 적대할 것이다.

그런 와중에 리에론 공작의 군대까지 당도했으니, 그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말머리를 다시 남쪽으로 돌릴 리는 없었다.

"다 끝낸 전쟁인데 이렇게 밥만 축내게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부상을 입은 몸이라고 해도 며칠 동안 가만히 한 자리만 지키고 좀이 쑤시는 법이다. 튀어나온 것은 할렌의 입만이 아니었다.

적의 재침을 막는다면서 북쪽으로 올라간 리에론 공작의 군대가 이렇다 할 전투도 없이 시일만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소식을 들은 모두가 혀를 찼었다.

"승전연이라도 벌이고 싶은 모양이지."

군터와 프롱기우스 후작. 그리고 죽은 파르네토 후작의 군대까지. 수천을 넘어 만 명에 가까운 군대가 벌써 열흘이 넘도록 군량만 축내고 있었다. 해산 명령이라도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마음이었다.

그러나 불편한 기분을 가라앉히며 기다려 보아도 해산하라거나 철수하라는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혹시나 우회하여 왕도로 습격해올지 모를 적군을 방비하라는, 별 의미도 없는 헛소리에 가까운 명만 내려왔을 뿐.

그렇지만 그런 헛소리도 명은 명인지라, 그들은 꼬박 열흘을 더 한 자리에서 주둔했다. 그쯤 되자 군영 내에서도 슬슬 높은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

형의 자리를 이어받은 프롱기우스 후작은 매사 신중한 모습을 보여왔다. 사람 자체가 원래 조용한 성격인 듯했는데 형을 잃고 후작이라는 자리에 앉게 되니 더욱 행실을 조심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그조차도 불만의 말을 토하게 할 만큼, 왕도의 조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군량이 썩어나는 것도 아닌데 이만한 병력을 벌써 스무 날이 넘도록 이렇게 방치만 해놓고 있으니, 아무리 성격이 조심스럽고 어쩌고 해도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것도 큰 전투를 치른 군대에게 이런 식의 대접이라니.

"이쯤 되면, 뭔가 일이 있다고 밖에는 볼 수 없겠군."

"일이라 한다면?"

"복잡한 정치의 작용이겠지. 그게 무얼지는 나도 모르겠군."

피차 하릴없는 사람들끼리 이런저런 속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던 날들 중에, 리에론 공작이 일부 병력을 이끌고 돌아왔다. 그의 몰골은 처음 북쪽으로 향할 때와 다를 바 없이 깔끔했다. 전투는커녕, 세찬 바람 한 번 맞지 않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 말끔한 모습을 보고 은근히 표정을 구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적들은 초원 쪽으로 넘어간 것 같네."

"그렇다고 하지만, 총대장께서 자리를 비우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프롱기우스 후작이 은근히 핀잔 주듯 말했다. 그 속에 있는 뜻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리에론 공작은 여유롭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쩌겠는가. 왕명이 내려왔으니 따를 수밖에."

"왕명이요?"

"몰랐나? 전하께서 이 몸을 호출하셨다네. 물론 자네들도 함께지."

"그럴 리가…아니. 혹시……."

작게 중얼거리던 리에론 후작이 슬쩍 눈을지켜 떴다. 그제야 이 답답했던 한 달 여의 내막을 짐작한 것이다.

"함께 개선하세. 왕도의 모든 시민들이 발 벗고 뛰어나와 우리를 맞을 걸세."

프롱기우스 후작은 확신했다.

'이 자였군.'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왕이 동부연합의 군대나, 프롱기우스의 군대가 회군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대전을 치른 만큼 상할 대로 상한 군대이며, 그들이 원하는 것은 대단한 대접이 아니라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이 자가 왕을 움직인 것이야.'

개선식이라. 유치하다 싶으면서도, 비웃음을 감내하며 실리를 챙기는 모습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가 이 전쟁에서 세운 공훈이 막대하든 미미하든, 왕도의 열린 성문으로 가장 먼저 말을 몰고 들어갈 이는 리에론 공작이다. 그에게 시민들은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낼 것이고, 그의 이름을 연호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본격적으로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려 들 것이다. 휘하의 막강한 군대와 시민들의 연호를 등에 업고서.

'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는가.'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너무 순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이제는 세상에 없는 자신의 형도.

*

리에론 공작이 역겨운 인간이라는 것을 그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선식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몰려나온 시민들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뒤에서 지켜보기에 상당히 가증스러웠다. 그는 마치 왕도 시민들의 환호가 당연하다는 듯 굴었다.

명예욕에 속을 끓이지는 않지만, 그렇다 해도 내 것을 도둑맞은 것 같은 느낌을 좋아할 이는 없다. 군터는 그 뒤에 이어진 왕의 치하도, 다음날 열린 대 연회에도 전혀 즐거움이나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연회는 언제 끝난다는 말도 없이 주구장창 이어졌다. 하루. 이틀. 사흘……. 군터는 동부연합군의 총지휘관의 자격으로 매일 자리에 나갔으나, 연회장에서의 시간은 별로 의미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동부연합군의 총사령관이라는 지위도 일개 기사라는 신분이 옆에 붙자 권력의 향을 쫓는 이들의 눈에는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나마 그에게 다가오는 이들은 권력을 쥔 당사자들 보다는 그들의 주변인들이었다.

리에론 공작만큼 유명세를 타지는 않았어도 전장에서 활약했다는 군터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자들이었다.

그들과 간단히 말벗이라도 하며 시간을 죽였지만, 쓸모 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스무 날이 넘도록 군량만 축내며 대기했던 것하며, 왕도에 와서 허수아비라도 된 양 자리만 지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감히 일개 기사 주제에 왕이 마련한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군터는 다가오는 이들과 혹여 마찰을 빚지 않기 위해 행동거지를 주의하며 이 실속 없는 승전연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화려한 축제가 이렇게 뭐 같을 수도 있다는 게 참 신기합니다."

군터는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왕성의 연회자리에 참석하고, 밤부터는 수하들과 자리를 가졌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와중에 딱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은 그럴듯한 숙소와 동이 나지 않는 술과 음식이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것이라도 없었다면 왕성에서의 무료한 나날들이 한층 더 힘겨웠을지도 모른다.

"듣자 하니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는 것 같더군요. 군대를 해산시킨 후에는 본격적으로 귀족들을 불러모아 대 연회를 열 것 같습니다."

한 명이 전한 말에 다른 이들이 모두 코웃음을 쳤다. 군터도 그 중 하나였다.

"연회. 그 놈의 지긋지긋한 연회는 죽자고 찾아대는군. 질리지도 않는가."

"무얼 기대하셨습니까? 이 나라의 높으신 분들께서는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앉아서 입만 나불대는 것뿐이고, 내세울 거라곤 허영심 밖에 없는, 무능하고 짜증나는 족속들입니다."

술이 들어갈 만큼 들어간 탓에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절제나 조절은 찾아볼 수 없었다. 평상시라면 괜히 한 번 주위의 눈치를 살폈을 이들도 지금은 다들 얼굴이 벌개져서 고개를 끄덕이기 바빴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떠들썩하게 왕국의 권력자들을 씹어대는 분위기에서, 유일하게 입을 다물고 말수를 적게 가져가는 이가 있었다. 엄밀히 말해, 이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이기도 했다.

그는 바로 센트리올군의 지휘관 시어문드였다.

"하하."

군터의 부름을 받은 시어문드는 잠시 난처한 듯 웃어 보이고는 들고 있던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여러모로 생각이 깊은 것처럼 보였다,.

"으음. 곤란하군요. 다들 열이 단단히 올랐나 봅니다."

"어찌 안 그렇겠습니까? 보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마시는 포도주가 누구의 피인지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지기 위해 싸웠는데, 대체 저 어디에 나라가 있고 왕과 귀족이 있단 말입니까."

다들 불만이 쌓였지만, 그 중에서도 할렌이 최고였다. 경험으로 덮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타고난 본래의 욱하는 성정은 여전히 그의 속 안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왕성에서 향락을 즐기고 있을 어떤 이들은 할렌의 그런 성정에 제대로 불을 붙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은 차라리 왕도 따위. 초원 군대의 말발굽에 짓밟히게 둘 걸 그랬습니다."

"취했군. 마음을 다스려라."

군터는 잔뜩 달아오른 할렌에게 짤막하게 한 마디 한 뒤 시어문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할렌이 말을 심하게 하기는 했으나, 여기 있는 모두의 마음이 녀석과 크게 다르지 않소. 물론 거기에는 나 또한 포함이지."

"모두라 하셨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모두는 이 사람 역시 아우르는 것입니까?"

"그대는 똑똑하지. 하지만 똑똑하다 해서 속까지 없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아. 그러니 내 초대에 응한 게 아니겠나."

"현명하시군요."

"아부는 됐소. 태어나 똑똑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나요."

"똑똑함은 머리. 현명함은 눈이지요. 현명하다 함은, 눈으로 본 것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장군께서 머리가 좋으신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좋은 눈을 가지고 계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 저 역시 화가 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내색을 안 하고 있을 뿐. 부아가 치밀고 있습니다. 장담컨대, 이 나라가 저런 '머리'를 달고 계속 이어지다가는……."

"……."

"파…아니지. 안 좋은 결말만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군터는 그 말이 만족스러웠다. 아마도 술기운이 조금 오른 탓이었을 것이다. 기분이 나쁜 만큼, 그 시름을 씻기 위해 마시고 또 마셨으니.

때문에 다음날 이른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군터는 약간이지만 두통까지 느꼈다. 씻고 잠을 청했음에도 일어난 그의 몸에서는 여전히 술 냄새가 물씬 풍겼다.

"장군."

군터가 세숫물에 얼굴을 씻는 동안 새벽에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장군을 찾는 사람이 왔습니다.위글로우에서 온 것 같습니다."

"……."

군터는 병사가 건넨 수건으로 물에 젖은 얼굴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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