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있다. 흔히 운명이라 일컬어지는 것.
각자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다 다르듯이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정말 있다고 해도 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모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 있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결코 피할 수 없는.
바로 죽음이라는 이름의 운명이다.
탄생이 시작이라면, 죽음은 끝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삶이란 머리에서부터 이어지는 꼬리에는 죽음이라는 마침표가 찍혀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좋아하지 않는다.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뿐. 사실 받아들인다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 사람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수긍보다는 체념에 가까우니까.
종종 죽음이라는 녀석은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그저 눈길 주지 않고 어디론가 제 갈 길을 가는 것처럼 군다. 아니, 사람이 그리 여긴다.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자신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과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었던 것 같은 것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대개의 반응은 동일하거나 비슷하다.
극렬히 부정하다가, 진이 빠질 즈음 포기한다. 체념하는 것이다.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청하지 않은 손님이 물러가지 않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쿨럭!"
지금. 막시밀리언은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에게도 드리웠음을 깨달았다. 코르넬을 데려간 녀석이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그에게도 손을 뻗은 것이다.
'죽음이라.'
두렵지는 않았다.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어렸을 적부터 종종 죽음을 생각했었다. 군인이 되어 전장에 나온 후에도 마찬가지. 하찮게 꺾여가는 무수한 목숨들을 보며 상념에 잠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역시, 멀찍이서 지켜볼 때와 직접 맞닥뜨렸을 때의 느낌은 달랐다. 기침을 할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무딘 칼로 쓸리는 느낌이 들고, 입을 가린 손에 검붉은 피가 젖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표현하기 힘든 낯선 상실감에 좌절해야만 했다.
방 안 가득 쌓인 금은보화도, 중무장한 수백의 병사도 부질없다. 그 무엇도 이 성가신 병마에게서 그를 구하지 못했다.
"쿨럭쿨럭!"
"괜찮으십니까?"
젊은 여인이 다가와 손수건을 건넸다. 막시밀리언은 손수건을 든, 고생이라고는 생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매끄러운 손에 흘깃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이어 그 손의 주인을 보았다.
걱정 가득한 얼굴이다.
'하긴. 지금 내가 죽어버리면 곤란하겠지.'
아리안 코누디스.
젠탄테르 가의 여식이다. 정략혼으로 묶였으나 아직 아들을 보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과부가 되어버리는 것은 그녀나 그녀의 가문이나 원치 않는 일일 것이다. 만약 코누디스 가문에 자식이 없다면 이야기는 달랐겠지만, 그들에게는 안타깝게도 막시밀리언에게는 자식이 있었다. 그것도 가문을 이을 수 있는 아들이.
비록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나, 후계자는 후계자다. 자식 없는 정실 부인의 입장에서는 어린 후계자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겠지.
그렇기에 더 애가 타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굳이, 거의 하루 종일 옆에 붙어서 간병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터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이런 지극정성이 그저 밖에다 보여주기 위한 요식 행위는 아닌 셈이다.
웃음이 나왔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와중에도, 뻔한 속내를 애써 감추며 절실함을 드러내는 어린 여인의 모습이 인간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재미있게 느껴졌다.
"약을……."
"충분히 먹었소. 오늘 먹을 것도 물론 먹었지. 더 먹는다 해서 기침이 덜 나올 것 같지는 않구려."
몸이 아픈 것은 이쪽인데 얼굴에 진 그늘은 그녀 쪽이 더 짙었다. 이래서야 누가 병자인지 모를 지경이다.
나이가 어려 그런지 신색을 관리하는 것이 영 미숙하다. 귀족 가문의 여식이고 정략혼을 치렀다지만 이제 고작 스물이 된 여인일 뿐이다. 반면에 이쪽은 노회한 군인이자 정치가. 표정 아니라 눈만 슬쩍 들여다 봐도 속을 짐작할 수 있다.
팔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처지. 어떻게든 가문을 위하고, 자신을 위하려는 여인의 속내가 빤히 읽혔다.
'우습게도, 너만이 나를 진정으로 걱정하는구나.'
어떤 이유에서건 그녀는 자신을 걱정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녀를 보는 막시밀리언의 눈길이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밤새 잠도 못 주무셨지 않습니까. 약을 조금 더 처방하게 하시지요."
"병이라는 것이 약을 들이붓는다 해서 낫는 것이었다면 세상에 병자가 없었을 것이오. 내 몸은 내가 챙길 터이니 부인은 들어가 쉬시오. 내가 잠을 설치는 통에 그대도 덩달아 잠을 못 이루지 않았소? 나 때문에 그대까지 병이 들까 우려가 되오."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 내가 안 괜찮소. 쉬시오. 쉬고, 내일 봅시다."
흐릿하게 걸려있던 미소는 아리안 코누디스가 돌아가자마자 자취를 감췄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는 무서울 정도로 짙었다.
홀로 남은 막시밀리언은 몇 번 더 마른 기침을 토하고는 방 밖의 병사를 불렀다. 그의 명을 받은 병사는 곧바로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명의 여인이 그의 방을 찾았다.
"왔나."
"몸은 좀 어떠신지요."
"뭐…보다시피."
막시밀리언은 가느다란 손을 들어 보였다. 벌써 열흘 가까이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탓에 그의 몸은 몰라볼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하루하루…감탄이 나올 만큼 착실하게 죽어가고 있지."
자조 섞인 가벼운 농담. 언제나 그랬듯 그녀. 라일라는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들은 것처럼, 솜씨 좋게 만들어진 조각상 같은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다.
저 얼굴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특별하다고도 생각했었다. 하여 나름대로는 제법 마음을 주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무언가 왈칵 튀어나오려는 것을, 막시밀리언은 웃음으로 다스렸다.
"내 몸이 이런 탓에 며칠 째 녀석의 얼굴도 보지 못했군. 녀석이 아비를 찾지는 않던가?"
"늘 그랬듯이 많이도 울었습니다. 그 중에 당신을 찾는 울음이 섞여 있었겠지요."
"그래. 그랬겠지……."
"……."
아마도 여기서 라일라는 자리를 피하고 싶었겠지만, 막시밀리언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정말 신기하군. 어째서 당신은 늙지를 않지?"
"…신께서."
"아아. 그래. 신. 당신의 신께서 당신에게 긴 젊음을 내려주었다고 했었지. 그래. 그랬었지."
비틀린 웃음. 이제 막시밀리언은 아무것도 가리거나 숨기지 않았다. 그가 느끼고 있는 바를, 그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였다.
"항상 그런 식이었지. 무언가를 파고들려 할 때마다 신을 이름을 팔았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이야. 쿨럭쿨럭!"
피 섞인 기침이 목을 찢고 흘러나왔으나 막시밀리언은 조소를 멈추지 않았다.
"네 신이 뭐라 하던가? 날 죽게 내버려두라고? 내가 죽으면 그 어린 녀석이 내 뒤를 잇게 되겠군. 세상물정은커녕, 성 밖 물정도 모르는 어린 아이 대신에 자연스레 당신이 영지의 실권을 쥐게 될 것이고."
"몇 번이고 말씀 드렸지만, 오해입니다."
"난 그저 궁금할 뿐이야. 말해보지 그래. 온갖 기적을 부리는 신께서 내 몸뚱이에 내린 병 하나를 다뤄주기는 어렵다 하던가?"
"병이 깊어 심신이 어지러워지셨습니다. 향을 피워드릴 터이니 일단 푹 주무시고……."
"아니. 내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멀쩡해. 몸이 죽어갈수록 정신은 맑아지고 있어. 그러니 알 수 있는 것이야. 네가 날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침대에서 일어난 막시밀리언은 조금씩 비틀대며 라일라에게 다가갔다.
"잘 생각하는 게 좋아. 내가 있기에 너희가 있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야. 영주부인으로서의 삶? 소영주? 내가 사라지는 순간 덩달아 사라질 허상에 불과하지."
막시밀리언은 조금 흥분해 있었다. 또한 분노해 있었다. 그는 확신이 있었다.
라일라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다. 그녀의 재주는 어깨에 힘 들어간 술사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술사들을 보며 신기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이상의 감흥을 받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달랐다. 그녀의 행사는 신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거기에 매료 되었고, 한낱 포로 계집에게서 자식을 보며 가문의 안주인으로까지 삼았다.
'넌 날 살릴 수 있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 확신했기에, 막시밀리언은 라일라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면 체념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도가, 희망이라는 것이 비쳐 보였기에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명심해라. 내가 죽으면 너희도 죽는 거다."
속삭이듯 건넨 말에 라일라가 처음으로 반응다운 반응을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에 감정이 깃드는 것을 보는 것은 회색 세상에 색이 더해지는 것처럼 인상적이었다.
"…당신의 혈육입니다."
"알고 있지 않나. 뭐든지 처음이 힘들 뿐이야. 내가 못할 것 같은가?"
불길하게 번들거리는 눈이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과 마주쳤다. 라일라는 슬쩍 입술을 깨물더니 휙 몸을 돌렸다.
"……."
다시 홀로 남은 막시밀리언은 침대 위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금세 땀에 젖었다.
*
군터는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남쪽으로 이틀 거리 정도 되는 지점에 군을 주둔시켰다. 리에론 공작에게는 내 전쟁은 끝났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그렇다 해도 당장 영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왕명을 받고 출정한 군대이기에, 돌아가려 해도 왕명이 필요했다. 때문에 그는 프롱기우스 후작과 함께 왕도로 서신을 보냈다.
군대의 해산과 귀환을 허락해주길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보내주지 않을 겁니다. 적군이 크게 패하여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든 수습해서 다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이고…그게 아니더라도 전후의 혼란을 수습을 위해 얼마간은 군대가 주둔하는 것이 낫다고 여길 테니까 말입니다."
시어문드가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며칠 후 돌아온 전령이 전한 왕의 서신은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왕은 선대 프롱기우스 후작의 전사를 애도하며 시작해 승전을 치하하고 위무하면서도 이쪽의 역할이 아직 남아있음을 역설했다.
"결국 하는 일 없이 시간만 죽여야 한다는 거군요."
할렌을 비롯한 대부분의 이들은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이도 저도 아닌 미적지근한 조치가 영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리에론 공작을 견제하는 조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곳에 있음으로 인해, 리에론 공작은 얻는 것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움직여야 할 겁니다."
시어문드의 말이었다.
이번에도 그의 말은 맞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리에론 공작이 패퇴한 초원 병력을 눈에 불을 켜고 몰아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