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어떨 것 같나? 내가 이대로 너희를 모두 죽여버리는 것은 쉬운 일일 텐데 말이지."
호타가르아의 뒤에 도열한 병력은 크게 상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약삭빠르게 뒤로 잘 빠져있었다는 뜻이다.
그에 반해 군터와 병사들은 연이은 전투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수에서도 차이가 나고, 처한 상황도 차이가 나니 전투를 벌인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군터는 굽히지 않았다.
"조롱은 집어치워라. 싸우겠다면 피하지 않겠다."
"진정하지. 싸울 생각은 없다. 싸울 생각이었다면, 지금처럼 너희가 숨을 돌릴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몰아쳤겠지."
"……."
그 말을 듣고, 군터는 호타가르아 뒤쪽의 병력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과연 그들에게서는 전의가 엿보이지 않았다. 말로는 거짓을 말할 수 있어도, 군기(軍氣)는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
"호타가르아! 어째서 멈춰서 있지?! 설마 배신이라도 할 생각이냐!"
반대쪽에서도 적이 밀려왔다. 그들은 호타가르아와는 다른 쪽에 서 있는 이들인 듯, 대뜸 외치는 말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호타가르아는 그에게 외친, 아마도 족장으로 생각되는 사내를 보며 코웃음 쳤다.
"배신? 그건 좀 너무하군! 애초 같은 편이었던 적이 없는데 배신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
"이놈! 전사장께서 네놈의 팔다리를 잘라 짐승의 먹이로 내던지실 거다!"
살벌한 외침에도 호타가르아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리 외친 자를 조롱했다.
"전사장? 뭐, 그 놈이 살아서 내 앞에 선다면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놈이 살아있을 거라 보나?"
"무슨 개소리냐!"
"그 놈이 베이고르의 대장을 잡겠다고 뛰쳐나간 것이 벌써 오래 전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지 않은가! 대장의 목을 베었다면 당장 요란하게 북을 울리든, 뿔 나팔을 불든 했을 터인데 그러지 않고 있다! 그게 무슨 뜻이겠나?!"
호타가르아의 말이 이어질수록 듣고 있던 사내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져갔다. 길게 늘어놓는 말들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전사장 콰이렌이 일단의 병력을 이끌고 적 본진으로 달려간 것을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까지 조용하다면 그것은 둘 중 하나다. 아직 적과 교전 중이거나, 적에게 당했거나.
그리고 전자라고 보기에는, 이미 시간이 꽤 많이 지났다.
"콰이렌은 죽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베이고르의 대장에게 패해서 도망치고 있는 중이겠지! 그런 놈이 어찌 내 팔다리를 찢고 짐승의 먹이로 던져주겠는가?!"
둥! 둥! 둥!
때마침 베이고르의 본진 쪽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퇴각 신호는 아니었다. 일정하고 길게 이어지는 북소리에는 병사들의 북돋는 웅혼함이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베이고르의 본진에 있던 병사들이 쩌렁쩌렁한 함성을 내며 진군하기 시작했다. 멀리서도 검은 물결이 밀려오는 것이 어렴풋이 보일 정도였다.
"오는군.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겠지."
군터와 병사들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양 측의 군세는 비등했다. 그러나 호타가르아가 기색의 변화가 없는 반면 그와 말을 주고 받는 반대측 족장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져갔다. 호타가르아는 그런 상대의 표정 변화를 즐겁게 지켜보다가 다시 군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머저리들과 전투가 벌어지면 사이에 낄 텐데, 어쩔 텐가? 날 돕겠나?"
"말이 잘못 된 것 아닌가. 내가 널 돕는 게 아니라 네가 날 돕는 거겠지."
"쓸 데 없는 데서 자존심을 내세우는군."
호타가르아가 피식 웃었다.
그러나 서로 날을 세운 보람도 없이 상황은 싱겁게 끝이 났다. 호타가르아와 금방이라도 칼부림을 벌일 것처럼 굴었던 족장이 그대로 말머리를 돌린 것이다.
"시끄럽게 떠들어놓고 꽁무니를 빼다니."
멀어지는 이들을 보며 호타가르아가 비웃었다.
적이 눈앞에서 물러나고 있음에도 군터는 그들을 쫓지 않았다. 적이 전세가 불리해짐을 느끼고 퇴각을 했다지만 그들의 전력은 여전히 온전했다. 게다가, 협력을 한다고 말은 했지만 호타가르아를 믿고 등을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말이다.
"싱겁게 됐군."
"본대가 당도하기 전에 달아나는 게 좋을 거다."
"물론 그래야지. 개인적으로…다시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너희가 초원을 떠나 내려오지 않는다면 그리 되겠지."
"내륙인처럼 말하는군. 네놈 또한 초원 출신이면서."
"출신이 뭐가 중요한가. 중요한 건, 나는 지금 이곳에 있다는 거지."
"하하. 그도 그렇군."
호타가르아는 시선을 돌려 주변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숱하게 널브러져 있던 시신들은 수북이 뒤덮인 눈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여기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이곳의 바람은 영 꿉꿉해. 시원하지도, 상쾌하지도 않단 말이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호타가르아는 그의 무리를 이끌고 떠나갔다. 요란하게 북을 두들기던 본대가 당도했을 때 그들은 이미 저 멀리 흐릿한 뒷모습만을 보이고 있었다.
*
군터는 뒤늦게 당도한 본대와 합류한 후에 프롱기우스 후작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적의 대장, 전사장 콰이렌과 함께 죽었다고.
'그렇게까지 할 자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가 본 프롱기우스 후작은 냉철하고 비정한 자였다. 설마 자기 목을 걸고 적장을 참살하는…같이 죽겠다는 각오를 세울 수 있는, 피가 뜨거운 사내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다다라 발악하듯이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형님의 권한은 내가 이어받았소. 물론 국왕 전하께 정식으로 인가를 받아야 하지."
"그렇습니까."
"그렇소. 그러니…수도로 개선하는 동안에는 군터 장군께서 군대를 이끌어주셔야겠소."
형의 뒤를 이어 새로이 프롱기우스 후작이 된(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에레스 프롱기우스 후작은 군터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지휘권이라고 해봐야 실질적인 것은 아니고, 대표 자리를 내어준 것뿐이지만 그것도 작은 의미는 아니었다. 후작이 되어 일개 기사에게 윗자리를 양보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면밀히 따져보았을 때, 이런 그의 양보는 타당한 것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그는 형으로부터 모든 것을 물려받았을지언정 아직 진정한 후작 위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그의 지위가 정식으로 힘을 발휘하려면 국왕의 인가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정통성이 충분하다고 해도, 후작령의 주인이 되었다 해도 새로운 프롱기우스 후작의 신분은 군터보다 낮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높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의 신분은 일개 기사였지만, 또한 '장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후작이 장군께 자리를 양보하다니. 이런 날도 오는군요."
할렌을 비롯한 군터의 수하들은 자그마치 후작이나 되는 자가 뒤를 따라 온다는 것이 꽤나 자랑스러운 듯했다. 몸이 만신창이가 된 와중에도 씩 웃는 것을 보면 말이다.
"길잡이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군터는 들뜬 부하들을 진정시키며 전후 수습에 집중했다.
그러나 수습이라고는 해도 별로 할 일은 없었다. 전사자의 시신은 얼마나 쌓인 건지도 모르는 눈에 대부분 묻혀버렸고, 수습할 수 있는 시신은 얼마 되지 않았다. 파낼 수도 없을 만큼 눈이 두텁게 쌓였고, 금새 얼어버렸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소수의 시신을 모아 태우는 것 정도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게 전사자와 부상자들을 수습하며 숨을 돌리던 차에 정찰병이 급하게 돌아왔다.
"장군! 남서쪽 이틀 거리에 아군이 접근 중입니다!"
"아군?"
오고 있는 자들의 정체를 짐작했기에 군터의 대꾸는 건조하고 퉁명스러웠다.
"예! 얼추 2만은 되어 보였습니다. 선두에는 리에론 공작 각하의 깃발이……."
2만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분기가 치밀었다. 이전의 전투에서 그 2만이 있었다면…….
군터는 곧장 프롱기우스 후작에게 향했다.
"리에론 공작이 오고 있다 합니다."
"음."
역시나 그 또한 표정이 좋지 않았다. 리에론 공작의 엉덩이가 조금만 가벼웠어도 자신의 형이 죽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별 수 없지 않겠나. 맞이하는 수밖에."
내키지는 않지만, 어찌 되었든 리에론 공작은 지원군을 이끌고 오는 것이었다. 2만이나 되는 군세가 다가오는 것을 모르는 척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 대응은 해야 했다.
그러나 맞이한다고는 해도 대대적으로 인원을 동원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주요 지휘관들이 리에론 공작이 오는 쪽으로 미리 이동해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아마 리에론공작 역시 제대로 된 환영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머리에 든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말이다.
"…오는군."
완만한 구릉 너머로 조금씩 깃발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무수한 병사들이 흩날리는 깃발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뻔뻔하기는……."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곧 군터의 심정과 같았다.
군터는 저 멀리 대장기 아래 보이는, 말을 탄 사내를 가라앉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리에론 공작은 태연해 보였다. 만신창이가 된 이쪽의 상황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느긋하고 시끌시끌하게 군을 이동시켰다.
군터와 지휘관들은 일어서서 리에론 공작과 그의 군대를 맞이했다. 경사진언덕 위를 점하고, 말을 타고 다가온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의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불만 표출이었다.
"이런. 내가 너무 늦은 건가."
군터는 저 가증스런 입을 찢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처럼 저질러버릴 수는 없기에, 길게 숨을 내쉬며 짤막하게 대꾸했다.
"전투는 끝났습니다. 아군은 적의 수괴를 처치, 주력군을 격파했고 적은 패퇴하였습니다."
"그대는?"
표정 변화 없는 얼굴. 그가 자신을 알아보았는지, 알아보지 못했는지 군터는 알 수 없었다.
"동부연합군을 이끌고 있는 군터입니다."
"프롱기우스 장군은 어디에 있나?"
그에 대한 답은 군터가 아니라 옆에 있던 당사자가 직접 했다.
"형님께서는 적장과 함께 전장에 묻히셨습니다. 그리고 형님의 유언을 따라, 아우인 이 몸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런가. 그가 이곳에 묻혔군. 내 불찰이다. 내가 더 서둘렀더라면, 그가 죽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지."
"……."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어찌 되는가. 적이 패퇴하였다고는 하나 아직 국경 밖으로 나간 것은 아닐 테고, 군세를 추스른 뒤에 다시 들어올지도 모르지 않나."
"힘겨운 싸움이었습니다. 이쪽은 여력이 없습니다. 뒷일은 장군께서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그의 눈이 군터를 향했다. 살짝 찌푸린 눈.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말을 끊은 것? 아니면 '공작 각하' 대신 '장군'이라 칭한 것?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기분이 어떤지 따위는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았으니까.
부글부글 끓던 마음이 슬쩍 고개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우리의 전쟁은 끝났소. 그러니…우리는 이만 돌아가겠소이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알 필요 없소.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어쩌면 또 한 번, 크게 실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머리도 있고, 가슴도 있다. 그 둘은 때때로 서로 뒤섞이며 엇나가기도 한다. 딱 지금처럼 말이다.
왕국의 최고 권력자고 뭐고, 지금 군터의 눈에 저 중늙은이는 야비한 너구리에 불과했다. 당장에라도 목을 비틀어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의 머리는 충분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 보게 될 걸세."
등 뒤로 들리는 말을 무시하고, 군터는 자신의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날 저녁. 병사들을 이끌고 귀로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