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군터는 시종일관 수세에 몰렸다. 반격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저 필사적으로 몸을 날리고 칸젤을 휘두르며 죽지 않고 버틸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변할 수는 없는 건가?]
파그니타는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이것을 목숨을 건 싸움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저 여흥, 즐기는 '사냥'으로 여길 뿐이었다.
콰앙!
다시 한 번 군터가 거칠게 땅을 굴렀다.
굴욕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런 사치스러운 상념조차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몰아치는 파그니타의 맹공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다시 변할 수 없느냐고.'
변한다는 게 뭔지 감도 잡히지 않는데,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이성이 흐려지고, 환상이 보였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었으니까.
촤르륵!
뱀이 낮게 우는 것 같은 소리. 순간적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재빨리 칸젤을 들어 막아냈으나, 부딪치며 박살 난 얼음조각들이 튀었다. 일부는 얼굴을 스치며 성에를 만들었고, 일부는 너덜너덜해진 갑옷 사이로 파고들어 박혔다.
"쿨럭!"
그러나 그런 피륙의 상처보다 더 심각한 것은 충격이었다. 가볍게 휘두르는 공격마다 쉽게 받아낼 수 없는 거력(巨力)이 실려있다. 매번 받아낼 때마다 충격이 쌓이고, 쌓일수록 몸은 안에서부터 망가져갔다.
푸드드.
"……!"
피를 토하면서 바닥을 굴렀다. 그가 있던 자리에 자그마한 얼음 조각들 수십, 수백 개가 꽂혔다. 하늘에서 내리던 눈들이 비수가 되어 날아든 것이다.
"……."
제대로 숨 한 번도 돌릴 수가 없다. 막다른 곳으로 몰이를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강해졌다. 너무 강해졌어.'
조금 전 구노르의 등 위에서 겨뤘을 때와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다. 버티고는 있지만, 전혀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놈은 눈이 멀었다.'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온전히 군터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니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피잉!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군터가 들었으니 파그니타도 당연히 들었지만, 그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임에 틀림 없는 자그마한 것을 무시했다. 이제껏 숱하게 맞은 화살 따위,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퍼억!
그 확신은 틀리지 않았다. 얼음이 된 몸에 박힌 화살은 단단한 얼음에 자그마한 흠집을 내고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날아온 것은 화살만이 아니었다. 화살촉에 걸린 자그마한 주머니가 파그니타의 몸에 내용물을 쏟았다.
[음?]
이질적인 감촉에 파그니타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날아든 수십 개의 화살이 그를 타격했다. 그리고 역시, 묶어서 쏜 주머니 속에 든 내용물이 그를 적셨다.
[이게 뭐지?]
순간 파그니타는 당황하기보다는 흥미를 보였다. 자신의 몸에 끼얹어진 검은 액체가 무엇인지, 손가락으로 찍어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속 쏴라!"
할렌의 외침과 함께 수십, 수백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모두 다 이전의 화살들처럼 주머니를 매단 것들이었다.
개중 일부는 이전의 것들이 그런 것처럼 파그니타에게 닿아서야 내용물을 쏟았지만, 일부는 허공에서 주머니의 끈이 풀리며 내용물이 쏟아졌다.
검은 액체는 비처럼 파그니타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지금!"
그것을 보고 있던 할렌이 술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열 명이 안 되는 술사들은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술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들이 낼 수 있는 최대의 힘을 발휘해 술법을 사용했다.
화르르륵!
그리 크지 않은 불꽃이 허공에 피어 올랐다. 허나 그것들은 곧, 쏟아져 내리던 검은 액체와 만나 무섭게 덩치를 키웠다.
[이……!]
내리는 눈마저도 증발시켜버리는 거대한 불꽃.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파그니타가 분노하며 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덩치를 불릴 대로 불린 불덩이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치이이익!
순간적으로 주변의 냉기가 파그니타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불길은 이미 그의 몸에 닿았고, 그의 몸 곳곳에 묻은 기름은 불이 닿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거세게 불을 지폈다.
[크아악!]
불의 크기도 크기였으며, 무엇보다 평범한 불이 아니었다. 불의 술법을 다루는 술사들이 전력으로 지핀 불이었다. 파그니타가 전력으로 냉기를 발했지만 불길은 쉬이 기를 꺾지 않았다.
"후우…후우……."
파그니타가 불길에 휩싸여 괴로워 하는 동안, 군터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한 번 구노르에게 칸젤을 꽂아 기운을 흡수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구노르의 몸뚱이가 어느새 차게 식어서 반쯤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체내에서부터 얼어붙은 듯 숱한 상처에서는 이제 피 한 방울 새어 나오지 않았다.
"끄응."
'살길이 열린 건가.'
아직까지도 파그니타는 꺼질 줄 모르는 불길에 휩싸여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그의 울음소리는 통상적인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속을 진탕 시키는 것 같은 울림이었다. 그 거친 울림은 거친 눈바람을 일으켰다.
"물러서지 마!"
할렌과 병사들은 다가온 적들과 맞붙으며 발이 묶였다. 수천 병사가 움직이면서 크게 방해를 받지 않고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이 행운이었다. 그러나 운이라는 것이 계속 따를 수는 없는 법이고, 여전히 이곳은 적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제는 선택해야 한다. 저 괴물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물러서던가. 아니면 끝을 보던가.
"……."
물론, 첫 번째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칸젤은 통한다.'
끝을 보려 하는 이유다. 달리 수가 없다면 포기하고 물러났겠지만, 그의 창은 저 괴물을 끝장낼 수 있다. 그것은 괴물이 줄곧 여유를 부리면서도 착실하게 공격을 막아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칸젤이 별 위협이 안 된다고 여겼다면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화살을 대하는 것처럼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늘어뜨린 그의 창도 동의한다는 듯 낮게 울었다. 군터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입은 자존심의 상처와 굴욕을 그의 창 역시 느꼈음을. 그래서 분노하고 있음을.
퍼억!
불타오르고 있는 괴물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가던 중,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등에 꽂혔다. 크게 휘청거린 군터가 칸젤로 땅을 짚고 버텼다.
"큭!"
화끈한 고통이 흐려졌던 정신을 일깨웠다. 아주 잠깐,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오랫동안 이곳이 어딘지 잊고 있었다.
이곳은 전장이다. 하릴없는 자들끼리 누가 더 강한지 비교하는, 그런 한가한 곳이 아니었다.
'머리가 어떻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무언가에 홀려있었음이 분명하다. 군터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외쳤다.
"할렌!"
"예 장군!"
"말을!"
모여드는 적에 맞서 병사들에게 열심히 지시를 내리던 할렌이 병사를 시켜 군터에게로 보냈다. 말을 탄 병사는 주인을 잃은 말의 고삐를 쥐고 달려왔다.
군터는 선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그리고 달려오는 말 위에 내려앉으며 고삐를 쥐었다.
"술사들은?"
"옛?"
"아까 같은 것을 다시 한 번 할 수 있겠느냐?"
"아…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들 모두가 진이 빠져버린 것 같았습니다. 몇몇은 말 위에서 버티기도 버거워 보였습니다."
그들의 힘을 빌리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대충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내가 끝내야 한다.'
상처 입은 자존심이나, 오기 같은 것 때문이 아니다. 지금은 저리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있지만, 저 괴물이 이대로 죽어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늦든 빠르든 저 불길이 꺼지고 나면, 괴물은 한 번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기이한 방법으로 힘을 회복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더는 손 쓸 방법이 없어진다.
'지금 뿐이다.'
마음을 굳힌 군터는 자그마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곳을 향해 말머리를 틀었다.
"장군!"
"놈을 처리하고 가겠다. 할렌에게 빠져나갈 준비를 하라 전해라."
대답은 듣지 않고 말의 배를 찼다. 말이 나아가려 하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두려워하는 것이다. 당연하다.
[크아아아아아아아!]
몰아치는 눈바람이야 그렇다 쳐도, 이 '소리'만큼은, 군터 자신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으니까.
'달려라. 아니면 죽이겠다.'
서늘한 손으로 말의 뒷목을 쓸었다.
히히히힝!
그러자 말이 잘게 떠는가 싶더니 크게 울며 달리기 시작했다.
후우웅!
눈바람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거세졌다. 처음에는 그저 간간이 눈을 찌푸려야 할 정도였다면, 어느 정도 다가갔을 때는 아예 눈을 뜨기가 힘들어질 정도였다.
푸르륵!
그것은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려움에 질려 어떻게든 달렸지만,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게 되니 달리는 말의 발걸음 역시 조금씩 굼떠졌다. 앞으로 나가길 주저하는 것이다.
'계속 달려라.'
군터는 그런 말을 위협으로 채근했다. 달리는 방향은 그가 정해주었다. 비록 눈을 뜨지 못한다 해도, 앞을 보지 못한다 해도 괜찮았다. 그는 이 끝없이 이어지는 '소리'를 통해 상대가 있는 방향을 알 수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
캄캄한 어둠 속.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곳에서 흐릿한 형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아주 조금이지만, 정신을 잃었을 때 본 환상과 닮아 있었다.
괴이하게 생긴 늑대. 투명한 보석 같은 몸을 가진 늑대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그 울음이 터져나올 때마다 온통 검은 세상이 크게 떨리는 듯했다.
'노리는 것은 목.'
군터는 눈을 감은 채, 점점 가까워지는 늑대를 보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늑대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가 느끼고 있는 고통. 분노. 하지만 군터는 그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직, 그런 감정의 찌꺼기들이 흘러나오는 근원에 집중했다.
'지금.'
칸젤의 긴 창대를 양 손으로 쥐고, 온 힘을 다해 휘둘렀다.
전력을 실은 칸젤은 그대로 허공을 갈라 목표한 곳에 가 닿았다.
콰직!
늑대의 목이 베였다. 부서졌다. 깨졌다.
그렇게 느낀 순간. 어마어마한 힘이 군터를 밀어냈다.
히히히히히힝!
처절한 말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군터는 그대로 하늘을 날았다.
*
"…군! 장군!"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군터는 입에 가득 찬 눈인지 얼음인지 모를 것을 뱉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 새 몸이 굳었는지 팔에 힘을 주어 땅을 미는데 뿌득 거리는 소리가 들었다.
"장군!"
고개를 들어 보니 할렌과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뒤쫓아오는 적군이 보였고,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역시 적군임에 분명한 군세가 보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상황이 변하지 않을 것을 보니 의식을 잃은 것이 아주 잠깐이었던 모양이다.
뿌우우우-!
뿔 나팔 소리.
할렌을 쫓아오던 군세가 속도를 줄였다. 군터는 그 선두에 선 자가 낯이 익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군터가 그를 보았을 때, 그 역시 군터를 보았다.
"다시 보게 되는군!"
목소리를 듣고서야, 군터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때와는 상황이 좀 바뀐 것 같지만!"
일전에 한 번 겨룬 적이 있었던 초원의 족장. 호타가르아였다.
"화려하게도 날뛰었군! 정말 그 괴물 늙은이를 죽인 건가?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구만! 하지만 이걸 보면 믿지 않을 수도 없고."
호타가르아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니, 군터도 눈을 돌렸다. 그리고 호타가르아의 말이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주변의 풍경이, 의식을 잃기 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의식을 잃기 전에도 제법 눈이 쌓여가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예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눈이 뒤덮여 있었다. 마치 설원처럼 말이다.
"내 목을 가지러 왔나?"
군터의 물음에 호타가르아는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글쎄. 어떨 것 같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