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구멍이 난 곳으로 물이 빨려 들어가듯, 하늘에서 내리는 눈보라가 어느 한 지점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자연히 시야를 가리던 눈발도 사라졌다.
"으음."
군터가 침음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보라가 사라지고 있는 중심에 파그니타가 서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강해졌다. 아니 회복됐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이곳 저곳 깨지고 파였던 몸이 다시 온전한 형태로 변해 있었고, 그 기세는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로 섬뜩했다.
군터가 그를 바라보듯, 그의 시선 또한 군터를 향하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의 입 꼬리가 슬며시 들렸다.
'다시 원점인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 탄식 대신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파그니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걸어오는 중간에 마주치는 모든 것을 얼음의 가시, 아니 얼음의 창살로 꿰뚫어버렸다. 베이고르군도, 초원의 전사도. 지금의 그에게 군터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푹!
군터는 쓰러져 있는 구노르에게 칸젤을 찔러 넣었다. 쓰러져서 빌빌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구노르에게서 빨아들이는 생기는 막대했다. 몸에 힘이 차오르는 것이 뚜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장군."
할렌의 표정 역시 굳어 있었다. 파그니타와 사투를 벌인 것은 군터였지만 구노르 위에서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할렌과 병사들 역시 지켜보았었다.
"물러나라."
"하오나."
"너희가 합세해봐야 의미 없이 휩쓸릴 뿐이다. 차라리 거리를 벌리고 접근해오는 적을 상대해라."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머리도 가슴도, 저 괴물을 이기지 못할 거라는 쪽에 더 기울었다.
이제껏 정말 적지 않은 싸움을 해왔다. 강적이라 할 만한 자들도 여럿 상대해봤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저 이름 모를 설족 노인은 비교할 만한 자가 없을 정도로 강하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그러나 싸워야 한다. 싸우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이곳에서 저 노인과 자신, 둘 중 하나는 죽는다.
"계속 이곳에 남아 싸울 생각이오?"
"응?"
토어릭의 말에 함께 타고 있던, 다소 허술한 무장을 한 중년인이 말했다. 토어릭이 고개를 돌리니 그가 고개를 저었다.
"무리요. 무모한 일이란 말이오. 사방에 적이 넘쳐나고, 눈앞에는 항거할 수 없는 적이 다가오고 있소. 어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어이. 술사 양반. 지금은 그런 시답잖은 소리나 지껄여 댈 때가 아니라,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서 이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생각을 짜내야 하는 거요."
"무모한 짓이라 하지 않소."
"아니 그러지 말고…잘 한 번 생각해 보시오. 뭐 떠오르는 거 없소? 저 괴물이 얼음덩이를 제 수족처럼 부리는데, 아무리 봐도 저건 당신들이 잘 아는 수법 아니오?"
묻는다고는 하지만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는 것이 답을 내놔라, 하고 협박하는 투에 가까웠다.
그것을 느꼈는지 술사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비슷해 보인다고 해서 다 같지는 않소. 확실히 저 얼음을 이용하는 싸움은 술법에 가깝지만, 가까울 뿐이지 완전한 술법은 아니오."
"알겠으니까 뭐가 됐든 답을 내놓으란 말이오. 활 하나 쏠 줄 모르는 짐들을 태우고 실컷 달렸는데, 고생한 보람은 있어야 할 거 아니오?"
"…말이 너무……."
"보아하니 아직 상황 파악이 잘 안 되시는 모양인데."
토어릭이 팔을 뻗어 술사의 뒷목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거칠게 움켜잡았다. 억센 손아귀가 뒷목을 틀어쥐자 술사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례를 비난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제부터는 정말 목 내놔야 할 판이오. 쓸모 없는 짐을 안고 갈 수는 없다는 뜻이지. 그러니…뭐가 됐든 당신네들의 효용을 증명해보란 말이오. 우리가 아니라, 당신네들 스스로를 위해서."
나직했지만 건조했다. 술사는 안색이 창백해져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
파그니타는 좌우로 나뉘어 흩어지는 베이고르군을 보았으나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이 덤벼들지 않는 한, 길을 막지 않는 한은 굳이 먼저 움직여서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꽤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푸욱!
또 한 명. 가는 길에 얼쩡거리던 멍청한 놈 하나의 몸통이 얼음의 창, 혹은 장대에 꿰여 높이 치솟았다. 그것이 베이고르군인지 초원의 전사인지는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지금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위험하군.]
스스로의 마음이 메아리 친다.
그는 지금 다소 과하게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 흥분은 그가 거둔 선조의 유산에서 기인한다.
그는 선대 족장을 계승했다. 선조의 유산 역시 선대 족장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었다. 선대 족장은 파그니타의 그릇이 유산을 담기에 모자라지 않다고 여겼기에 일개 젊은 부족원에 불과했던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파그니타는 선조의 유산과 족장 지위를 계승 받은 후 한동안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고 유산의 힘에 휩쓸려 사고도 많이 쳤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경험을 쌓으면서 점차 힘을 다스리는 법을 깨쳐 갔다. 그것이 가능해진 뒤부터 그는 동족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잘 다스려온 힘이 지금 위태롭게 범람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전대 족장이 말했었다. 힘을 가지되, 되도록 사용하지 말라고.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늙은이가 갈 때가 되어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말의 앞뒤가 다르고, 이해도 되지 않는 헛소리를 진지한 얼굴로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제와 그 말 뜻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수 있을 것 같았다.
힘이라는 것은 중독성이 있다. 사용하면 할수록 의존하게 되며, 그 외의 것을 떠올리지 못하게 된다.
콰쾅!
힘껏 휘두른 창 끝에서 얼음 줄기가 생겨나 적을 후려쳤다. 채찍과도 같은 형상이었다. 휩쓸린 적들은 누구 하나 버티지 못하고 모조리 나가 떨어졌다. 한 번의 휘두름으로 열 명에 가까운 이들이 멀찍이 튕겨나가 버렸다.
훨씬 강력해진 힘이다. 그의 마음이 인간에서 멀어질수록 그가 발휘하는 힘은 더욱 강력해졌다.
퍼퍽!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들이 몸에 부딪치거나, 박혔다. 통증은 전혀 없었다. 그의 몸은 이미 피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껍데기를 벗어 던졌다. 평범한 화살 따위가 그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는 잡스러운 것들을 무시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상대에게도 향했다.
[혼자서 맞설 줄이야.]
상대는 혼자였다. 부하로 보이던 병사들은 다 물러나게 한 모양이었다.
두려움에 젖지도 않은 채, 담담하게 예의 그 흉험한 창 한 자루를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파그니타가 보기에도 꽤나 인상적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한 건가.]
쓰러진 구노르에게서 힘을 빨아들여 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한 것 같았지만, 별로 대수롭지는 않았다. 설령 완전히 기운을 회복했다 해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그는 선조의 유산에 깊게 먹혀버린 상태였으니. 파그니타라는 존재는 흐릿해졌지만, 대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력해져 있다.
[진정한 전사로군.]
힘의 차이를 느끼고 있을 텐데도, 상대는 담담히 창을 들어 그를 겨누었다. 얼마 남지 않은 파그니타의 '인간'이 유쾌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어붙은 눈은 곧 흉포한 빛을 토했다.
쾅!
흩날리는 눈발이 맹수의 이빨이 되어 상대를 위협했다.
*
프롱기우스 후작은 수하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물러나면서도 맹렬히 뒤쫓아오는 적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쩌면…여기가 내 무덤이 될지도 모르겠군.'
막아 세우려, 하다 못해 잠시 발이라도 붙들려 몸을 던지는 병사들이 애처롭기보다는 허망해 보였다. 저런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에레스."
"예 형님."
대외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프롱기우스 후작에게는 형제가 한 명 있었다. 여섯 살 차이 나는 동생. 지금 그의 옆에서 답을 한 사내, 에레스 프롱기우스가 바로 그였다.
"내게 발톱을 찍어라."
"…예?"
또한 그는 제국에서 사교라 부르는, 베이고르의 토착 교단에서 대사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이이기도 했다. 프롱기우스 후작이 흰 수리라 부르는 교단의 힘을 빌릴 수 있었던 것도 동생인 그의 덕분이었다.
"안 됩니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살기가 어렵다."
"이곳에는 수천의 병사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달려오기 전에 저 짐승이 먼저 내 목에 이빨을 박을 것 같구나."
"형님."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여기서 어찌 목숨을 건사한들, 어차피 나는 오래 살지 못한다."
프롱기우스 후작에게는 꽤 오랫동안 앓아온 지병이 있었다. 원래 어렸을 적부터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많았던 그였는데, 이번에는 얼마간 앓는 정도로는 떨칠 수 없는 독한 상대를 만나버렸다.
에레스 프롱기우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평소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탓에 교인(敎人)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그였다. 하지만 피를 나눈 형제에게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서서히 고통스럽게, 의미 없이 죽어가느니 차라리 내가 정한 곳에서 죽겠다."
"형님……."
"그리고…내 뒤는 네가 이어라. 유언장은 미리 써서 내 서재의 세 번째 금고에 넣어 두었다."
프롱기우스 후작에게는 아들이 둘이나 있었다. 물론 아직 어린 나이이기는 하나, 자신의 아들이 아닌 동생에게 모든 것을 넘기겠다는 말에 주변에 있던 이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 안사람과 두 아들 놈도 네게 맡기겠다. 네가 알아서 잘 보살펴다오."
"……."
"자. 할 말은 다했다. 이제 시간이 없다. 어서 내게 발톱을 찍어라."
모든 것을 털어낸 것 같은 담담한 재촉에, 에레스 프롱기우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크르르르르…….
고통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몸이 어지간히 너덜거리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콰이렌은 몇 걸음 정도 더 다가온 죽음을 느끼면서도 이제 바로 앞에 놓여 있는 사냥감을 향해 피에 젖은 이빨을 드러냈다.
"이제…너를 대신해 죽어줄 놈들도, 지켜줄 놈들도 없구나."
만약 콰이렌이 조금 더 냉정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적장을 지키고 있는 병력이 어느 순간 갑자기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거의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고통마저 잊어버리고 광기와 살의에 가득 차 있는 맹수가 되어버린 그에게, 사냥감이 아닌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힘겹게 검을 뽑아 드는 사냥감에게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콰직!
검을 채 휘두르기도 전에, 길쭉한 발톱이 사냥감의 몸을 찍었다.
크르르…….
콰이렌은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고통에 일그러졌을 사냥감의 눈을 보기 위해 앞발로 찍은 사냥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흐…쿨럭!"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사냥감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와중에도 웃고 있었다.
사냥감은 늘어뜨리다시피 했던 검으로, 자신의 윗목을 찔렀다. 얇은 살결을 뚫고 들어간 검은 머리 위로 튀어나왔다.
"……?!"
이해할 수 없어 당혹한 순간,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 창백하게 변한 사냥감의 몸뚱이가 부풀었다.
콰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