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
몽롱함에서 깨어나 불쾌함을 느낀 순간, 그의 오른팔을 칭칭 감고 있던 검은 줄기는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무력감이 전신을 덮쳤다.
허리가 숙여지고 무릎이 꺾였다. 칸젤을 지팡이처럼 짚고 거기에 의지해 쓰러질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텼다.
[왜 그러지? 힘이 다했나?]
"……."
말도 통하지 않지만, 욕 한 마디라도 던질 기운조차 없었다. 칸젤에 몸을 의지한 채 몸을 떠는 것이 군터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끝이군. 개운하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지.]
멀쩡해 보이지 않는 외관만큼이나 노인의 행동 역시 부자연스러웠다. 예의 그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얼음을 다루는 술수 역시 없었다. 직접 끝을 내려는 듯, 아래로 질질 끄는 창 한 자루만 쥔 채 휘청거리며 반 걸음씩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퍽!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노인의 관자놀이를 때렸다. 화살은 얼음으로 변한 노인의 머리를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으나, 화살이 때린 부위에서 부서진 얼음조각들이 떨어져 나갔다. 노인도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았는지 살짝 휘청거렸다.
"장군!"
고개를 돌릴 힘도 없어 쳐다보지 못했다. 그러나 보지 않더라도 귀에 익은 목소리의 주인이 할렌임은 알 수 있었다.
'멍청한 녀석. 돌아왔군.'
자칫 이끌고 있는 병사들까지 다 죽일 수 있는 바보 같고 무모한 선택이지만, 그 덕에 연명할 수 있게 된 처지기에 탓할 수는 없다.
구어어어-!
"흩어져!"
할렌과 병사들은 가까이 접근하지는 못했다. 조금 다가갈라치면 구노르가 성을 내며 날뛰니, 치이거나 밟혀 죽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할 수 있는 것은 활을 쏘는 것뿐이었지만 그것들은 노인의 발걸음을 조금 늦추는 정도의 역할 밖에 하지 못했다. 또한 주변에 널린 적들까지 상대해야 했기에 그나마도 여의치가 않았다.
[수하들이 이렇게까지 하다니. 좋은 대장이었던 모양이군.]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가 사형집행인이 죄수에게 건네는 적선, 혹은 조롱의 몇 마디처럼 들렸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에 좌절감이 밀려올 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군터는 그 즉시 마지막 힘을 쥐어 짜 칸젤을 거꾸로 바꿔 쥐고 찔러 넣었다. 그가 딛고 있는, 구노르의 등을 향해서.
푹!
얕다. 힘이 부족했던 탓이다. 하지만 칸젤의 예기는 여전히 살아 있어, 얼마 되지 않는 힘으로도 두꺼운 구노르의 가죽을 뚫고 어느 정도 파고들 수 있었다.
두근!
사력을 다해 찔러 넣고 무릎을 꿇음과 동시에 느꼈다. 창날을 타고, 창대를 타고 밀려오는 생명의 흐름을.
군터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무엇을 노린 것인지 노인은 곧바로 눈치챘다.
[그대로 둘 것 같은가!]
분노. 그리고 다급함.
이제야 인간 같은 면모가 드러난다. 외관은 여전히 동떨어져 있지만 그 안에 자리한 본질은 인간의 그것이다.
구어어어억-!
거대한 구노르의 몸에 꽂힌 칸젤은 사람의 몸에 박힌 자그마한 가시와 같았다. 그러나 그 크기와는 별개로, 칸젤이 빨아들이는 것은 구노르의 생명 그 자체였다. 그에 이질감을 느낀 구노르가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도 사납게 날뛰었지만, 이제는 정말 눈이 뒤집혔다. 칸젤이 아니었다면 군터도 나가떨어졌으리라.
두근!
칸젤은 구노르에게서 빨아들인 생기를 군터에게 전했다. 텅 비고 메말랐던 그릇에 물이 조금씩 차 올랐다.
경련을 일으키던 몸이 다시 힘을 얻었다. 굽어진 허리가 펴지고, 늘어졌던 다리가 기둥처럼 단단히 섰다.
가까이 다가온 노인이 창을 도끼처럼 내리쳤다. 동시에 군터도 칸젤을 뽑아 휘둘렀다.
카앙!
*
콰이렌은 어느 순간부터 막아서는 베이고르군이 적어졌음을 느꼈다.
'일부러 길을 여는군.'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따금씩 너무 흥분을 해버리기는 하지만, 지금과 같이 이성이 유지될 때는 부족하지 않은 시야와 냉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은 지금 적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대장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지 않은 군대는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길을 열어준다는 것은, 이 앞에 어떠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까지 와서 또 뭘 꾸민다는 거지?'
의심이 들지만, 아마 뭔가가 있기는 있을 거다. 적장이 아무리 대범한 자라고 해도 제 목을 향해 들어오는 칼을 앞에 두고 이런 배짱을 부릴 수는 없었을 테니.
"길을 열었다! 따르라!"
전사의 경험은 신중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러나 본능은 여기서 머뭇거릴 틈이 없다고 말한다.
콰이렌은 경험보다 본능을 따랐다. 그는 피에 젖은 전사들을 독려하며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비켜라!"
창이라기보다는 쇠몽둥이에 가까운 것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중보병들이 하나 이상씩은 반드시 나가떨어졌다.즉사하는 이는 적었으나 방패를 들었던 팔이 부러지거나 갑옷이 찌그러지거나 해서 무력화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비싼 돈과 많은 시간을 들여 양성한 정예들조차 콰이렌의 괴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콰이렌이 그렇게 맹위를 떨치는 와중에도 뒤쪽의 전사들은 양 측면과 후방까지. 삼면(三面)에서 들어오는 공격에 서서히 쓰러져갔다. 무장을 가볍게 한 초원의 전사들은 지금 같이 병력이 극도로 밀집된 전장에서는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아악!"
그것을 콰이렌도 알고 있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말머리를 돌릴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쾅!
그의 푸른 안광이 점점 더 짙어졌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악 다문 이빨 사이로 가느다란 피가 흘렀다.
와아아아!
처음 포위망을 돌파할 때에 비해 병력이 거의 삼분지 일로 줄어들었을 때, 마침내 콰이렌은 탁 트인 정면을 볼 수 있었다.
완만한 경사. 그 끝에 적장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애를 먹게 한 상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약해 보이는, 손가락 두 개로도 단번에 목을 분질러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사내가.
"……."
적장에게 가는 길목에는 당연하지만 베이고르군이 깔려 있었다. 하나같이 왠지 모르게 꺼림직한 기분이 들게 하는 놈들이었다.
'이거로군.'
직감했다. 저 병사들이야말로 적장이 준비한 함정이다.
"조무래기 놈들이!"
모두 보병. 무장은 제각각. 영문을 모르겠지만, 어쨌든 꺼림직한 기분이 든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볼일 없었다.
쾅!
그것은 처음 맞닥뜨린 적병의 머리통을, 들어올린 칼과 함께 박살내며 확실해졌다.
"……!"
그러나 그렇게 하나를 끝냈다고 생각한 순간. 머리가 터진 병사의 몸이 부푸는가 싶더니 터졌다. 날아오는 화살도 보고 반응할 수 있는 콰이렌조차 미처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일어난 일이었다.
푸푸푹!
히히힝!
그나마 팔을 들어 머리와 목, 심장은 가렸지만, 팔뚝이나 상반신에 뼛조각들이 날아와 박혔다. 그의 말 또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낙마하여 땅을 뒹구는 중에, 콰이렌은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죽은 자의 몸이 터지고, 뼈와 살이 비수가 되어 산 자의 몸을 찢는다던 이야기.
어느 부족의 누가 무슨 거대한 맹수를 잡았다더라 하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흘러가는 소문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도 신경 쓰지 않았었다. 헛소문이거나, 대단치 않은 것이라 여겼던 거다.
'이놈이었군.'
무기를 버리고 맨몸으로 일어섰다. 몸 곳곳에 박혔던 뼛조각들이 툭툭 튀어나와 떨어졌다.
크르르르…….
강해진 몸은 자잘한 상처들을 무시했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머릿속을 떠돌던 생각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크아아아아아아-!
거대해진 팔을 휘둘러 덤벼드는 적들을 후려쳤다. 길게 자라난 발톱은 살가죽은 물론, 쇠붙이에까지 깊은 흔적을 남겼다.
퍼억!
뼈와 살점이 쉬지 않고 날아들었다. 붉은 살점은 미미한 충격밖에 주지 못했고 조각난 뼈만이 갑각과 같은 외피를 뚫고 박혔을 뿐.
그러나 하나로서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작은 상처라 할지라도, 그것이수십, 수백 개가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질주하는 말처럼 내달리던 콰이렌의 몸이 전신에 흐르는 피가 많아질수록 점차 느려져 갔다.
그러나 그의 걸음이 멎기 전에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피와 살점, 뼛조각의 난무가 끝이 났다. 만신창이가 된 콰이렌의 푸른 눈이 멀지 않은 곳에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적장을 담았다.
크허어어엉!
죽음에 몸을 던지는 맹수의 포효가 흉험하게 울려 퍼졌다.
*
채채챙!
다시 맞붙은 두 사람은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치열하게 싸웠다. 노인, 파그니타는 더 이상 얼음을 이용한 술수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와 군터는 오직 순수하게 창 한 자루만을 가지고 서로의 목을 노렸다.
채앵!
강하게 한 번 맞부딪친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째서.'
군터는 어렵사리 회복한 체력이 다시금 고갈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사나운 눈이 파그니타를 향했다.
'어째서 지치지 않지?'
힘이 고갈된 것은 상대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당장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봐도 그렇고, 술수를 부리지 못하는 것이나, 하다 못해 몸놀림과 창에 실린 힘만 가늠해 보아도 처음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 된 상태에서 벌써 수십 번은 창을 부딪쳤는데도 상대의 힘이 그대로인 것 같다는 점이다. 그의 힘은, 구노르로부터 생기를 갈취하고 맞붙은 뒤로 줄곧 일정했다. 이쪽의 체력은 서서히 줄어들어가는데 말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군터는 상대와 거리를 최대한 벌린 후에 다시 한 번 칸젤의 힘을 빌리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먹기 무섭게, 파그니타가 한쪽 무릎을 꿇더니 얼음 조각처럼 변해버린 손을 구노르의 등에 얹었다.
[쓰러져라.]
구어어어어어-!
구노르가 비명을 질렀다. 이전에 내지른 성난 포효와는 다른, 고통에 찬 비명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휘청거린다 싶더니, 곧 그 거대한 몸이 땅에 쓰러졌다.
쿠웅!
쌓여있던 눈이 물결처럼 사방으로 퍼졌다. 구노르가 쓰러질 때 온 힘을 다해 몸을 던진 군터는 가까스로 구노르의 몸뚱이에 깔리지 않을 수 있었다.
'놈은 어디지?'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아직까지 자욱하게 깔린 눈 너머를 훑었다. 그런데 그가 파그니타를 발견하기 전에 다른 이들이 그에게 달려왔다.
"장군!"
"이쪽이다!"
근처에 있던 할렌과 병사들이었다. 구노르를 사이에 두고 적과 교전을 벌이던 차에 구노르가 쓰러지며 전투도 잠시 소강을 맞은 것이었다.
"놈을 보지 못했느냐?"
"보지 못했습니다. 괴물이 쓰러지기 전에 장군께서 몸을 날리시는 것을 보고 즉시 달려온 것입니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할렌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콰쾅!
멀지 않은 곳에서 길쭉한 얼음 가시가 솟아올랐다. 베이고르의 병사들과 초원의 전사들이 그 가시에 찔려 얼어붙어 있었다.
"…빌어먹을."
그것을 본 군터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