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
군터는 크게 뒷걸음질을 치고 멈춰 섰다. 그리고 문득 창백하게 변한 손을 보았다. 핏기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희게 변한 손에 감각은 희미했다. 간헐적으로 내쉬는 숨결은 허공에 뚜렷이 흔적을 새겼다.
부득!
몸을 움직이려는 데 둔탁한, 뭔가 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잠깐 멈춰있던 사이에 몸이 굳은 것이다.
부드득! 우둑!
만신창이다. 크게 부상을 입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육체는 안에서부터 죽어가고 있었다. 생기의 불씨는 꺼져가고, 억지로 끌어올렸던 힘은 점차 소진되어 바닥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반면, 적은 아직 건재하다. 노인은 이제는 핏기가 도는 살보다 얼음이 더 많이 보이는 형상이었지만 그 힘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그와 계속해서 부딪치던 어느 순간부터, 노인이 인간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몸뚱이가 얼음으로 된 인간이 있을 리 없지만.
'내가 죽을 자리를 찾아온 셈인가.'
자조했으나, 입 꼬리도 얼어붙어 올라가지도 못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이제는 스스로 직감하고 있었다. 설령 마른 우물에 삽을 푸듯, 다시 한 번 비술의 힘을 빌린다 한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껏 온몸을 던져 부딪쳤지만 거둔 성과라고는 노인의 몸뚱이가 조금 더 얼음으로 바뀌었다는 것 정도였다. 몸뚱이의 반절 가량이 얼음으로 바뀌었으나 노인의 힘은 조금도 줄지 않았고, 그의 여유로움 역시 그대로였다.
결국, 처음부터 대적할 수 없는 상대였다는 거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다.
'몸이…움직이지 않는다.'
몰아치는 눈보라는 온기만을 앗아갈 뿐이지만, 노인과 부딪칠 때마다 몸 속의 피와 근육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미미한 수준이었으나, 충돌이 계속되면 될수록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는 이 꼴이다.
"……."
무력감이 몸과 마음을 적실수록, 다른 한편에서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에 대한, 무엇에 의한 감정인지는 군터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저 화가 났고, 그는 그 분노에 저항할 수 없었다.
우…우우우-!
칸젤이 울부짖었다. 포기하려 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하는 주인에게 항의하듯이.
"……."
그러나 외부에서 어떤 목소리가, 감정이 불어오든 군터의 육신은 점차 꺼져갔다. 억지로 끌어올린 생기는 고갈되어갔고, 텅 비어버린 그릇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생사의 경계에서, 군터는 힘없이, 굳어버린 눈으로, 보이는 것을 보았다.
거뭇한 하늘 아래. 흩날리는 눈보라. 창을 비스듬히 내려뜨리고 선, 인간의 형상을 집어 던진 노인.
모든 것이 흐릿해지는 듯하더니, 환영 같은 것이 덧씌워졌다. 그것은 이제껏 군터가 한 번도 보지 못했으며, 상상으로라도 그려보지 못한 괴이한 광경이었다.
알 수 없는, 선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한 것들이 시야에 가득했다. 본래 보던 세상이 흐려질수록 새롭게 나타난 세상은 더 뚜렷해졌다. 그 생소한 세상에서, 군터는 보았다. 흐릿해진 노인의 등 뒤에 떠올라 있는 거대한 무언가를.
무엇을 닮았는가 묻는다면 콕 집어 답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장 비슷한 것을 대라면 늑대라고 답하리라. 그러나 그 늑대는 거대했고, 두 발로 선 것처럼 보였으며, 체형 역시 늑대가 아니라 곰에 가까웠다. 두 발로 선 곰. 그러나 대가리는 늑대였다.
두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었고, 그 자리에서는 음산한 바람이 새어나오며, 가죽 대신 얼음 조각 같은 것이 박혀 있는 늑대. 늑대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튀어나온 주둥이와 날카로운 이빨 정도였지만, 군터는 그것을 본 순간 늑대를 떠올렸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냥 그런 것임을 알았다. 산을 보며 왜 저것이 산인지를 고민하지 않듯이 말이다.
[ŋ……ζ……u…Ħ…]
군터는 중얼거렸다. 스스로 소리를 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그러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세우고 있던 늑대가 고개를 내려 바라보았을 때에야 군터는 자신이 그렇게 소리 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u……Ħ]
늑대의 텅 빈 두 눈에서 푸른빛이 일렁였다. 빛은 곧 형체를 이루었고, 새파란 빛을 뿜는 얼음덩이가 되었다.
군터는 늑대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 모든 것들이 자연스러웠다. 의문은 없었다. 저 늑대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도, 생각이 든 순간 몸을 움직인 것도 모두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카아아아아악!]
늑대의 발톱이 날아듦에, 군터는 그의 뿔을 들어 찔렀다.
*
"끄응."
프롱기우스 후작이 몸을 숙이며 무릎을 짚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부관이 놀라며 다가왔다.
"장군.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실은 별로 괜찮지 않았다. 하루 이틀의 피로도 아니거니와,그는 본래 체질적으로 강건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남들보다 쉽게 지치고, 남들보다 쉽게 아픈 허약한 몸뚱이를 타고 났다. 때문에 젊었을 적에는 그런 자신의 몸뚱이를 원망스러워하기도 했다.
사실 지금도 짜증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원망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으니 그냥 체념하기로 했다.
"후우."
그런 몸뚱이가 전장의 바람을 몇 번이나 맞고, 또 보름이 넘게 시달리기까지 했으니 남아날 리가 없다. 지금 그는 자신의 몸이 쇳덩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런 주제에 대체 무슨 광명을 찾겠다고 전장에 나와 있는 것인지.'
명예? 권력? 다 부질 없다.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다. 베이고르가 다시 일어선 이후로는 그냥 가진 것에 만족하면서 있는 듯 없는 듯 살아도 충분히 여유로운 삶을 누렸으리라.
그럼에도 이렇게 어울리지도 않는 무장을 하고 전장에 나선 이유가 무엇인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저 숨만 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아쉽다는 말이 맞으리라. 기왕에 사는 인생이라면, 무언가 의미가 필요하다. 태어났으니 살고, 그러다 죽는다는 것은 너무 심심하지 않은가.
타고난 재주가 전장에서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의미를 찾고,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참 재미없는 인생이군.'
어찌 보면 숙명과도 같았다. 망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무렵부터 나라를 재건해야 한다는 선친의 말을 귀에 달고 살았다. 물론 귀담아 듣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그 뜻을 따랐다. 그를 둘러싼 환경이라는 것이, 그 선택지 말고는 다른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했고,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 베이고르는 다시 일어섰고, 프롱기우스 가문은 후작 가가 되었으니까.
'만족하십니까.'
딱히 다시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살아서 못 볼 광영을 왜 그리 욕심 냈는지 정도는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을 보이며, 만족하느냐고도 묻고 싶었다.
"…지긋지긋해."
"옛?"
"아무것도 아니다."
잠깐 상념에 젖어있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전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끝없이 일어나는 자그마한 변화들을 주시하고 있던 그는, 문득 한 곳에서 전열이 꿈틀대는 것을 눈치챘다.
"…오는군."
전세가 꽉 막혔을 때, 적이 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예상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정예 부대로 이쪽의 머리를 치는 것. 일전에 싸웠던 타칸 연합의 부족장도 써먹었던 방법이다.
"장군! 적이 포위를 뚫었습니다! 이쪽으로 오고 있는 듯합니다!"
예상했던 만큼 대책도 세워두었다.
"방진을 세운다. 보마르와 세바스탄에게 명을 내려라. 적의 진입을 막으라고."
"옛!"
명을 받은 보마르 남작과 세바스탄 남작은 즉시 휘하 병력을 이끌고 방진을 세웠다. 그들은 프롱기우스 후작이 위치한 지휘단을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포진하며 다가오는 적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들이 지휘하는 것은 하나같이 중무장한 병사들이었다. 무거운 철갑을 걸친 병사들은 기동력이 떨어지는 대신 한 자리에서 버티는 데는 탁월하다. 바로 지금과 같이 방진을 짠 채로, 돌격해오는 적을 상대하는 일에는 최적이다.
쾅!
두 군세가 충돌했다.
"아아악!"
"물러서지 마!"
버티려는 쪽과 돌파하려는 쪽. 형세는 어느 한쪽으로의 쏠림도 없이 비등했다.
'이렇게 했는데도 막지 못하면 혀를 깨물고 죽어야지.'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중보병대다. 기병이라고는 하나 경기병이라 돌파력이 뛰어나지도 않은 초원의 기병도 막아내지 못하면 들인 돈과 시간이 아까웠을 것이다.
'그래도…이대로 끝나진 않겠지.'
초원의 족속들 중에는 괴물들이 있다. 바르바피라던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괴물들 말이다.
쾅!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무난히 막나 싶었던 보병 대열의 한 곳이 거칠게 출렁였다. 그 중심에는 멀리서도 한 눈에 보이는 푸른 눈의 거한이 있었다.
무겁게 무장한 병사들이 대여섯 씩 뭉쳐서 막으려 해도 막지 못했다. 둔기인지 창인지 모를 것을 한 번 휘두르면 막아서던 병사들이 두셋씩 나가 떨어졌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괴력을 가지고 있어야 저런 것이 가능한가 싶어 프롱기우스 후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푸른 눈의 괴물은 기어이 두터운 방진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그대로 말을 달려 보마르 남작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신뢰하던 수하의 머리가 터져나가는 광경은 죽음에 둔감한 프롱기우스 후작으로서도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장군! 이대로라면 적이 이곳으로 들이닥칠 겁니다!"
알고 있다. 보마르 남작의 머리를 날려버린 놈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었으니까.
"길을 트게 해라."
"옛?"
부관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차피 막지 못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길을 터주고 뒤에서부터 조인다."
"허면 장군께서는……."
"사병(死兵)을 쓰겠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거리가……."
"전장에 위험하지 않은 곳이 있다더냐."
코웃음 친 프롱기우스 후작이 몸을 돌렸다.
'아직 죽기는 이르지.'
당도할 적을 맞으려면 약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
신비한 경험이었다.
뭔가, 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열심히 싸우고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싸우는 것인지, 싸우는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느 순간 뿌옇던 시야가 밝아지고, 전신이 얼음으로 뒤덮인 노인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것을 보았어도 별 감흥이 없었다.
콰득!
노인의 몸은 이곳 저곳이 부서져 있었다. 파여있기도 했고, 뚫려 있기도 했다. 군터는 직감적으로, 그 모든 것이 자신이 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몸이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그랬다. 물에 들어가 있는 듯했다.
다만 방금 전까지는 머리 끝까지 물에 잠겨 있었다면, 지금은 숨구멍 정도는 물 밖으로 빠져 나온 듯했다.
'이건 또 뭐고.'
그의 창, 칸젤이 오른 손에 들려 있었다. 그런데 그 형상이 사뭇 기괴했다. 검은 줄기 같은 것이 창신에서부터 뻗어 나와 팔을 감싸고 있었다. 언뜻 보면 군데군데 구멍이 난 갑옷 같았지만 그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칸젤과 이어진 줄기가 그의 심장과 함께 맥동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시…달라졌군.]
소리가 들려왔다. 힘겨움과, 고통이 느껴졌다.
"……."
[넌 뭐냐.]
그 물음은, 그 누구보다도 군터 자신이 던지고 싶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