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별로 보기 좋은 몰골은 아니지?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반칙은 네가 먼저 했으니, 억울해 하지는 마라.]
"해괴한 짓거리는 집어치워라."
[난 제국어는 할 줄 몰라.]
노인이 굳은 몸을 풀듯이 팔을 슬쩍 옆으로 틀었다.
[이제부터는 창으로 말하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군터의 굵은 눈썹이 씰룩였다.
노인의 느긋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것이 여유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기리라는 확신. 그것이 노인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묻어 나왔다.
더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저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음에도 당장 달려들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본능이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끊임없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저 자 역시 괴물이다.'
지금도 멋대로 날뛰고 있는 발 밑의 구노르도 괴물이지만 저 노인 역시 그에 못지 않은 괴물이다. 군터는 그것을 인정했다.
"후우.'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적을 살폈다. 사소한 움직임, 숨소리 하나까지. 모든 신경을 노인에게 맞추고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노인은 그리 길지 않은 창을 빙글빙글 돌리며 한 걸음씩 거리를 좁혀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노인의 몸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날아왔다.
잘못 표현한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날아'왔다. 노인의 두 발은 괴물의 등을 밟지 않았다. 가볍게 뛴다 싶었을 때 노인은 이미 수십 걸음 정도 되는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고 있었다.
쾅!
거리를 좁힌 것은 노인이었으나 선공을 날린 것은 군터였다. 노인의 급작스럽고 말도 안 되는 움직임에도 당황하지 않고 칸젤을 내질렀다. 노인은 창대를 비스듬히 들어 막아냈고, 여전히 주도권은 군터에게 있었다.
그러나 군터는 공격을 이어가지 못하고 뒤로 몸을 날려야 했다. 노인의 몸이 하늘을 난 것과 마찬가지로, 터무니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난데없이 허공에서 날아든 뾰족한 얼음 조각들이 그것이었다. 그것들은 휘둘러진 칼처럼 바람을 타고 군터가 서 있던 자리를 할퀴었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이능을 상대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바르바피들부터가 이미 인간의 범주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난 이들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 능력이 눈에 확 들어왔던 바르바피들과 달리 노인의 힘은 무엇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어떤 면에서는 일전에 겨뤘던 리에론의 기사 그림왈드와도 비슷했다.
아무 것도 없는, 눈발만 휘날리던 허공에서 얼음 칼날인지 발톱인지 모를 것이 할퀴어왔다. 발을 딛고 있던 구노르의 등에서 큼직한 송곳 같은 것이 허리를 찔러오는 것도 예사였다.
군터는 노인의 창을 막아내면서도 쉴 새 없이 몸을 던져야 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튀어나오는 변칙적인 공격들은 더없이 까다롭고 위협적이었다.
콰직!
한 번은 발 앞에서 치솟는 얼음 송곳에 냅다 칸젤을 휘둘러 박살을 냈다. 그런데 윗동이 부러진 얼음은 그대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을 만난 덩굴처럼 칸젤의 창대를 휘감아 얼리려 들었다. 창신에 눌러 붙는 얼음을 느끼자마자 재빨리 몸을 빼지 않았더라면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할 뻔했다.
그 뒤로 군터는 더욱 신중해졌다. 당장 공격 한 번을 더 하기보다 이 생소한 형태의 싸움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카앙!
"후우……."
또 한 번 생소한 형태의 공격이 나왔다. 노인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허리를 비롯해 하반신이 무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 극도의 추위에 몸의 근육이 굳는, 그런 현상 말이다.
지금도 여전히 몰아치고 있는 눈보라와 불어오는 바람이 몸을 시리게 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갑작스레 몸이 굳어지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몸에 힘을 주며 몇 걸음을 움직이니 뭔가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어느새 희미하게 깔려 있던 연기 같은 것이 흐려졌다. 뭔지는 몰라도, 노인이 또 술수를 부린 것이 틀림 없었다.
[쉽지는 않았을 텐데 가뿐히 빠져나가는군. 대단한 힘이다.]
희한하게도 머릿속으로 박히는 것 같은 '소리'에서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 목소리를 낼 때도 어느 정도 감정이 담기기 마련이지만, 이 '소리'는 그것이 더 선명했다.
노인은 분명히 감탄하고 있었다.그러나 그의 감탄이, 군터는 조롱처럼 느껴졌다.
"….…."
숨이 가빠졌다. 몸에 가득했던 힘도 조금씩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다 그러하듯, 비술의 힘도 한계는 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넘어선다면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본래도 한정적인 생기를 억지로 끌어 쓰는 것인 만큼 후유증이 적지 않은데, 거기서 한 번 더 무리를 하게 된다면 그 뒷감당은 피 몇 번 토하는 정도로는 치를 수 없을 터. 하지만.
'하지 않으면 당장 죽는다.'
칸젤이 머금은 사기를 더 풀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심장으로 이끌었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생명의 본능은 더욱 격렬히 요동친다.
"하아……."
내쉬는 숨결에서 희미하게 비릿한 냄새가 났다. 눈을 뒤덮은 붉은 핏기가 한층 더 진해졌다. 몸 이곳 저곳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늘었지만, 동시에 빠졌던 힘이 다시 돌아와 충만감이 느껴졌다.
[기세는 강해졌는데 죽음은 더 가까이 다가왔군.]
"말이 많군 늙은이."
알아듣지 못했으나 뜻을 짐작했을까. 노인, 파그니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군터의 은근한 바람대로, 그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 대신 가시처럼 찔러오는 수십 개의 얼음 송곳으로 답했다.
*
프롱기우스 후작은 서두르지 않고 착실히 군대를 전진시켰다. 파르네토 후작과 군터의 기병이 적진을 휘젓고 있는 상황에서 적들은 바깥쪽에서 다가오는 베이고르군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일부는 의식하고 있을지 모르나 적장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베이고르군이 어느 정도 거리를 좁혔을 때도 적군의 움직임이 안쪽으로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넓게 펼친다. 최대한 넓게 펼쳐서 적을 섬멸하는 거다."
"하오나 장군. 그랬다가는 자칫 적에게 돌파를 허용해 대열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럴 일은 없다."
프롱기우스 후작은 수하의 우려를 단호하게 일축했다. 설명도 없었다. 그저 그럴 일 없다는 한 마디로 얼핏 타당하게도 들리는 조언을 잘라냈음에도 수하 무관은 아무런 불만이나 의심 없이 고개 숙이고 물러났다.
"……."
프롱기우스후작은 눈보라 속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전장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둘 다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파르네토 후작도 군터도 적당히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다가 전장을 이탈했어야 했다. 그 후 진군한 본대와 발을 맞추어 양 측면에서 적군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적들은 여전히 대열을 정비하지 못하고 불규칙적으로 꿈틀대고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빠져 나왔어야 할 파르네토 후작과 군터가 발을 빼지 못한 것이다.
발이 묶인 것이든, 자의로 날뛰고 있는 것이든 당초의 계획이 어그러진 것은 분명하다. 이 상황에서 프롱기우스 후작은 현재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설령 둘 모두가 당했더라도, 잔군(殘軍)이 버티는 이상 적들은 기민하게 반응할 수 없다. 여기서는 포위 대형으로 단숨에 밀어붙이는 것이 최선.'
다행스럽게도, 이 황당한 눈보라는 이쪽의 눈뿐 아니라 저쪽의 눈까지 같이 가려주고 있다.
"북을 울려라!"
둥! 둥! 둥!
웅장한 북소리가 울리자 적들도 시선을 바깥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베이고르군이 대열을 갖추고 돌격해 들어가고 있었다.
"응전하라!"
몇몇 지휘관 급 전사들이 외쳤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별 힘을 얻지 못했다. 애초 초원의 군세는 부족 단위로 움직였던 데다, 그나마도 무너진 땅에서 올라오며 병력이 본래의 편제에서 뒤죽박죽으로 섞인 상태였다.
잠깐 동안은 거기서 어느 정도 수습을 하기도 했으나, 군터와 파르네토 후작이 연달아 들이치면서 다시금 혼란에 빠진 그들이었다. 외부에서 포위를 좁혀오는 적에 맞서 기민하게 움직이는 병력은 열에 둘, 셋 정도에 불과했다.
"방패 들어!"
전열의 베이고르군은 2인 1조였다. 장창을 든 병사 하나와 방패를 든 병사 하나. 그들은 한 몸처럼 움직이며 날아드는 화살을 막고, 돌진해 들어오는 기병을 견제했다.
가시를 잔뜩 늘어놓은 것처럼 전열을 구성한 채 밀고 들어가는 베이고르군 앞에서 산발적으로 대응하는 초원의 군세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들은 안쪽에 있는 적들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전사장! 적이 사방에서 좁혀오고 있습니다!"
"……."
막 베이고르군 장교 하나의 머리를 으스러뜨렸던 콰이렌이 고개를 돌렸다. 푸르스름한 눈이 차갑게 빛났다.
"바르바피들을 소집해라."
"전사장…그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땅이 내려앉았을 때부터 그들은 이미 잔뜩 흥분한 상태였지 않습니까."
"으음."
콰이렌이 피로 물든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래. 그랬지.'
전투가 시작된 이래, 중간중간 이성의 끈이 흔들림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침착함을 잃고 감정적으로 움직였었다. 바르바피들을 신경 쓰지 못했던 것 역시 분노에 눈이 뒤집혔을 때의 일이었다.
'역시…나는 안 되는 건가?'
대족장이 살아있었을 당시의 그는 전사장으로서 대족장의 호위에만 전념하면 됐다. 거느린 수하라고 해봐야 호위대의 전사들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그가 따로 명령을 내릴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대족장 사후, 콰이렌은 스스로 지도자가 되어 모든 일을 이끌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신경 써야 할 일들은 한 둘이 아니었고, 심화(心火)는 꺼지는 일 없이 계속해서 커져만 갔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의 정신을 좀먹었다. 콰이렌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내면에 잠든 짐승이 깨어났다. 완전히 제압했다고 여겼던 놈은 눈을 뜬 것을 넘어 종종 그의 이성에 이빨을 박아 넣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면 대전사는 종종 경고를 했었다. 내면의 짐승에게 먹혀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때는 그 말이 자신이 아닌, 미숙한 전사들을 위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었지만…….
'대전사여. 내가 죽고 당신이 살아남으셨다면…….'
잠시 무력감에 고개를 떨어뜨렸던 콰이렌이 곧 이를 갈며 고개를 처 들었다. 그의 눈에 가득 담긴 푸른 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했다.
"내가 직접 전사들을 이끌고 바깥쪽의 적을 상대하겠다."
"허면 이곳의 적은……."
"이곳의 일은 어르신에게 맡긴다."
구노르의 포효가 울려 퍼지는 방향을 힐끗 본 콰이렌이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