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쿵! 쿵!
파르네토 후작은 이것이 땅이 울리는 소리인지,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귀는 멀어 있었고, 초조함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냥감. 딱 그것이었다. 파르네토 후작은 점점 더 가까워지는 울림을 느끼며 계속해서 말의 배를 찼다. 겁에 질려 있는 것은 그의 말 역시 마찬가지라, 이미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기에 배를 아무리 찬들 변하는 것은 없었다.
"쥐새끼 같은 놈."
설족 족장 파그니타는 구노르 위에 앉아서 비릿하게 웃었다.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기에 바쁜 적장을 보자니 한심해서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콰직!
가는 길에 알짱거리던 말 한 마리가 구노르의 앞발에 짓뭉개졌다. 이미 쓰러져서 구슬피 울기만 하던 놈이다.
구어어어억!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저 도망치는 놈이나 잘 쫓아가란 말이다!"
쇠사슬을 잡아당기자 구노르가 머리를 털었다. 동시에 그만 좀 보채라는 듯 뚱한 울음을 흘렸다.
조금 전까지는 녀석이 이런 식으로 반응을 하면 손에서 느슨하게 힘을 뺐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솔직히, 겁쟁이 녀석을 쫓는 것도 이제는 질렸다.
"달려라."
어지간한 성인 남자가 손으로 다 쥐기도 힘들 정도로 굵은 쇠사슬. 구노르에게 맞춘 특제 목줄을 힘껏 잡아당기니 구노르의 기세가 변했다. 그의 뜻을 이해한 것이다.
거대한 덩치나, 해대는 짓거리와는 달리 구노르는 머리가 좋다. 특히 그가 타고 있는 놈은 구노르들의 대장으로서 머리가 좋은 것을 넘어 영악한 구석까지 있다.
구어어어어어-!
장난은 끝이라는 듯, 구노르가 달리기 시작했다. 구노르가 전력으로 달린다고 해도 말보다 빠르지는 못하지만, 앞을 가로막는 것을 만나면 방향을 꺾을 수밖에 없는 말에 비해 구노르는 무시하고 갈 수 있었다. 정확히는, 가로막는 모든 것을 짓뭉개고 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사냥감과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막아!"
적장을 따라서 도망치던 병사들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서 덤벼들었다. 딴에는 대장을 지키겠다고 용감하게 나선 것 같았지만, 파그니타가 보기에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어차피 죽을 놈들이 좀 더 일찍 죽겠다고 목을 들이미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짓밟아버려라.'
손에 쥔 창으로 직접 찔러 죽일 수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별 수 없다. 구노르의 체고(體高)가 있는 만큼 위에서는 아무리 팔을 뻗어도 창에 적이 닿지 않는다. 멍청이들이 고깃덩어리가 되는 꼴을 눈으로 지켜봄에 만족할 수밖에.
"잘도 도망치는구나."
잡스러운 것들이 엉겨 붙는 와중에 목표로 삼은 사냥감이 다시 거리를 벌렸다.
"쯧!"
느긋하게 쫓아가면서 피를 말리는 것도 좋다. 그가 평소에 즐기던 방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투 중인 만큼, 저 잡스러운 놈 하나에 이 이상 시간을 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목을 따야 하는 놈들은 저놈 말고도 더 있으니까 말이다.
파그니타가 창을 치켜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좁힌다 싶더니 냅다 집어 던졌다. 대충 집어 던진 것 같은 창은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가 사냥감이 탄 말의 뒷다리에 꽂혔다.
히히히히힝!
말이 구슬피 비명을 지르며 널브러졌다. 그 위에 타고 있던 사냥감, 파르네토 후작은 몸이 깔리기 전에 옆으로 굴러 피해냈지만 그에게 닥친 위험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쿵! 쿵!
땅이 울렸다.몸이 땅에 닿아 있으니 그 진동을 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몸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에도 재빨리 몸을 일으킨 파르네토 후작은 자신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고 있는 구노르를 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일그러진 그의 눈이 절망에 물들었다.
그가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순간.
두두두!
거친 말발굽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장군!"
파르네토 후작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
피잉!
파그니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느낀 순간, 수염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렀다.
"호오."
일단의 기마가 벌벌 떠는 사냥감에게 다가갔다.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일이백 정도? 그러나 그 중에 눈길을 끄는 놈이 하나 있었다. 방금 전 화살을 쏜 녀석.
'저건 뭐 하는 물건인가?'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던 화살도 그렇고, 척 보기에도 평범한 놈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쪽을 노려보는 시선에는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풍기는 기세도 널리고 널린 흔한 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파그니타는 확신했다. 저놈은 사냥감이 아니다. 가벼이 볼 수 없는, 적수로 인정할 만한 놈이다.
창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구노르의 목줄을 힘 주어 당기며 진정시켰다.
'네게도 흥미는 있다만…….'
흥미로운 놈에게 눈길을 준 사이 다른 놈들이 '사냥감'을 말에 태우고 달아나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저놈을 놓칠 수는 없지.'
한 번 찍은 사냥감이기도 하거니와, 놈은 일군을 이끄는 대장이다. 그냥 심심해서 찍은 목표가 아닌 것이다.
'네놈은 나중이다.'
노려보고 있는 놈을 무시하고 구노르를 몰았다. 그는 사나운 눈을 하고 있는 놈이 알아서 피할 것이라고 여겼다. 때문에 이대로 원래 찍었던 사냥감을 짓뭉갠 후에 도망치는 놈을 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놈'은 피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정면으로 덤벼들었다.
"멍청한 놈!"
죽는 게 소원이라면 굳이 들어주지 않을 이유는 없다. 땅을 찍는 구노르의 발길질이 더 빨라졌다.
쿵! 쿵!
건장한 말이 건물의 기둥 같은 구노르의 앞발에 뭉개지려는 순간. 말이 갑작스레 몸을 반쯤 옆으로 뉘이며 아슬아슬하게 구노르를 피했다.
'오오! 제법!'
모르는 자는 말이 묘기를 부렸다고 생각하겠지만, 파그니타는 보았다. 강제로 말의 목을 비틀듯 하며 절묘한 움직임을 만들어낸 것은 말이 아니라 말을 탄 기수였다.
'역시 보통 놈은 아니로군.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아주 잠깐. 그것도 아주 약간 구노르의 발을 늦췄을 뿐이다. 사냥감이 으깨져 죽을 것이란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 생각할 때였다.
구어어어어어어억-!
갑작스레 구노르가 몸을 흔들었다. 당황한 파그니타가 목줄을 강하게 움켜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놈이……!"
지나쳐 간 적이 희한하게 생긴 창 한 자루를 번쩍 들고 있었다. 굵은 핏줄기가 그 주변을 맴도는 것이 보였다. 그 핏줄기가 이어진 곳에는 일부가 붉게 물든 구노르의 옆구리가 있었다.
'방심했군.'
어떻게? 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두껍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되는 억센 털과 가죽을 지닌 구노르의 몸뚱이는 창칼로도 뚫을 수 없을 만큼 강하다. 그런 구노르에게서 피를 뽑아냈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저 창. 평범한 창이 아니다.'
뭔지 모를 음산함이 느껴졌다.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그런 것이 느껴진다는 건, 저 창에 담긴 힘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다.
구어어어억-!
구노르가 계속 비명을 지르며 몸을 흔들어대자 파그니타가 인상을 찌푸리며 목줄을 당겼다. 안 그래도 두꺼운 팔이 반 배 이상 부풀어 오를 정도로 강하게 힘을 주어 당기니 구노르의 격렬한 몸부림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엄살 떨지 마라. 덩치도 산만한 놈이 생채기 하나 입었다고 난리는……."
피를 흘렸다고는 하지만 구노르의 덩치에 비하면 이 정도 상처는 사람으로 치면 자그마한 생채기 하나 정도 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구노르가 이렇게 크게 난리를 치는 것은, 구노르라는 종 자체가 어지간해서는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느낄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겪은 적이 없으니 면역이 없고, 그러다 보니 자그마한 상처와 고통에도 크게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구어어어어어어-!
본래 큰 상처도 아니었던 만큼 고통은 금방 지나갔다. 그리고 고통이 채웠던 자리를 분노가 대신했다. 몸을 돌린 구노르가 자신에게 상처 입힌 적에게 분노의 시선을 뿌렸다.
"이런이런."
아주 제대로 눈이 돌아가기 직전이라, 여기서는 파그니타도 별 다른 수가 없었다. 목줄을 당긴다고 해서 움직일 것 같지가 않았기에, 그는 말에 올라 막 달리기 시작한 사냥감을 힐끔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손에 쥔 창을 던졌다.
퍼억!
이번에도 역시 화살처럼 날아간 창은 사냥감의 등을 정확히 꿰뚫었다. 창이 반쯤 몸을 뚫고 간 채로, 사냥감은 낙마하여 땅을 굴렀다. 거기까지만 보고, 파그니타는 고개를 돌렸다.
"넌 저놈처럼 편히 죽지는 못할 거다."
또 한 자루의 창을 빼어 들며, 파그니타가 씩 웃었다.
*
파르네토 후작이 기어이 당해버린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보았지만, 군터는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괴물도 그렇고, 그 위에 앉은 범상치 않은 노인도 그렇고,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조금 전 어떻게든 한 방을 먹이긴 했지만, 만족스런 결과는 아니었다.
'얕았다.'
실수한 것이 아니다. 전력을 쏟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부족하지 않게 힘을 주어 베었다. 그런데도 간신히 가죽을 뚫고 피를 조금 뽑아내는 게 전부였다.
'몇 번이나 버틸 수 있을지.'
그에 반해 그가 탄 말은 무리를 했다. 말이 낼 수 있는 능력 이상의 기동은 말의 몸에 부담을 지운다.
조금 전과 같은 기동을 서너 번만 반복해도 말의 무릎이 꺾여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무리를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눈앞에 있는 것은 평범하게 상대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 괴물이다. 정면에서 부딪치면 처참하게 널브러진 시신들처럼 으깨질 것이 분명하고, 방향을 바꿔가며 상대하자니 덩치가 너무 커서 어디로 움직이든 피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활로 상대할 수도 없으니.'
믿을 것은 칸젤뿐이다. 다행스럽게도, 기대했던 대로 칸젤의 날은 저 괴물의 가죽을 가를 수 있었다.
'세 번 정도.'
그 안에 상황을 바꾸지 못한다면 힘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을 앞에 두고도 그의 말이 두려움에 젖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통제에 따라주고 있다는 점.
"덩치만 큰, 멍청한 놈일 뿐이다."
그런 말이 고마워서, 군터는 녀석의 갈기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정을 주는 것이 싫어 이름조차 붙여주지 않았지만 녀석은 자신의 목숨을 온전히 맡겨주고 있었다. 믿음을 준 것이다.
그렇다면 이쪽은 응당 그 믿음에 부응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간다."
한 마음이 된 인마(人馬)가 대적을 향해 달려나갔다.
구어어어어어어-!
그런 그들을, 전장을 뒤흔드는 포효가 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