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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91화 (391/1,064)

391화

와아아아!

군터와 병사들이 비장하게 각오를 다진 것이 무색하게 전황은 급격히 변했다. 적의 측면을 들이받은 베이고르의 기병 때문이었다.

"파르네토 후작입니다!"

셍겐 파르네토 후작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호기다."

위기를 탈출했다고 안도의 한숨만 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위기 뒤에는 종종 기회가 딸려오기 마련이고, 지금이 바로 그때다.

다행스럽게도 병사들의 칼같이 갈린 기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호응한다!"

군터는 파르네토 후작이 돌파하고 있는 곳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앞뒤로 적에게 찔리게 된 초원의 군세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측면을 찌른 파르네토 후작군에 대응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던 그들은 군터군에게 다시 한 번 허를 찔리자 혼란에 빠졌다.

"좋아! 돌파하라!"

군터가 지체 없이 호응하자 파르네토 후작도 더욱 기세를 올렸다.

'역시 싸움을 아는 놈이군.'

건방지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마음에 드는 놈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감상을 접어놓고 보면 전장에서는 꽤나 믿음직스러운 아군이다. 지금과 같은 순간, 기대했던 것보다 빠르고 강한 호응은 불편한 사감마저 잊게 해줄 정도로 반갑기 그지없다.

"밀어붙여! 승기는 우리에게 있다!"

적들이 당황하고 있다는 것은 맞부딪치고 있는 병사들이 가장 먼저 느낀다. 그 순간에는 별다른 독려도 필요 없다. 병사들은 마른 풀에 붙은 불처럼 알아서 더 강하게, 더 크게 번져나간다. 승리할 때까지. 전투가 끝날 때까지.

"하하핫!"

파르네토 후작은 확신했다. 빠르게 무너져가는 적군에게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수단은 없어 보였다. 바르바피들이 산발적으로 날뛰고는 있지만, 그래 봐야 통제되지 않는 소수일 뿐. 그들이 대세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

용맹하게 적을 몰아붙이고 있는 병사들을 보며 그리 생각할 때였다.

콰아앙!

가만히 있어도 귀가 먹먹해지는 전장에서도 바로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큼직한 굉음.

구어어어어-!

연달아 울리는 거대한 포효.

승리에 대한 예감에 도취되어 있던 머리에 경종이 울렸다.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그 위용을 뽐내는 괴물이 보였다.

"구노르……."

악 다문 이빨 사이로 침음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착각인지 모르겠으나, 괴물은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주치는 병사들은 도망치기에 바빴고, 도망치지 않거나 못한 병사들은 처참하게 짓뭉개졌다.

"아무리 기세 좋게 날뛰어도 결국 한 마리일 뿐이지 않은가!"

파르네토 후작은 그의 친위대를 중심으로 주변의 병사들을 집결시켰다.

자그마한 언덕이 명백한 적의를 가지고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사람인 이상 두렵지 않을 수 없었지만, 파르네토 후작 역시 한때 몸뚱이 하나만을 믿고 적과 맞서던 전사였다. 비록 세월의 먼지가 쌓여 젊은 시절의 용맹함을 다소 잃어버렸지만, 그렇다 해서 겁쟁이가 되지는 않았다.

"전장에서 사냥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주제도 모르는 짐승이 겁 없이 날뛰니 별 수 없지!"

일전의 전투에서 경험했기에 저 괴물이 얼마나 흉험한 것인지 잘 알았다. 그러나 그때 저 괴물은 초원 전사들의 엄호 속에서 활약을 했던 것이지, 혼자 동떨어져 나와 마음대로 설쳐댄 것이 아니다.

아무리 가죽이 두껍다 해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두들기다 보면 갈라지기 마련.

"놈의 뼈를 발라내어 내 도시의 광장에 전시하고, 가죽은 벗겨다 침실에 널어놓겠다! 놈의 이빨은 용맹하게 싸우는 자들을 골라 포상하도록 하마!"

와아아아아!

파르네토 후작은 앞장 서서 말을 달렸다. 물론 처음에만이었고, 조금씩 속도를 늦추며 자연스럽게 뒤로 빠졌다.

병사들을 독려하는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부관이 이어받았다. 눈치 빠른 병사 몇 정도는 후작이 뒤로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탓할 수는 없다.

지휘관이 자신들과 함께 목숨을 걸어주길 바라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바람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으니.

'저건 뭐지?'

병사들을 앞세운 파르네토 후작은 괴물과의 거리가 줄어듦에 따라 조금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냥 괴물 한 마리가 날뛴다고 생각했는데, 그 위에 자그마한 뭔가가 더 있었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는데, 조금씩 거리가 더 좁혀지자 그것이 사람임을 알았다. 믿기지 않지만, 분명 사람이었다. 사람 하나가 괴물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미친……."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광경에 한 마디를 뱉는 순간. 병사들과 괴물이 부딪쳤다.

병사들을 이끄는 부관은 괴물과 정면에서 부딪치지 않았다. 그는 병사를 둘로 나눠 좌우로 갈랐다. 그리고 괴물의 옆과 뒤를 노렸다.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파르네토 후작 본인이 직접 병사를 이끌었더라도 저렇게 대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괴물의 반응은 상상 이상으로 기민했다. 병사들이 양 옆으로 나뉜다 싶은 순간 바로 방향을 틀어 흩어지고 있는 병사들을 들이받았다.

'저놈!'

파르네토 후작은 똑똑히 보았다. 괴물의 위에 타 있던 놈이 목줄인지 뭔지 모를 것을 잡아당기는 것을.

믿기지 않지만, 괴물은 놈의 통제에 따라 움직였다. 일전에 보았던, 앞만 보고 달리던 것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었다.

'저 기수 놈부터 처리해야 한다.'

그리 판단하고 다시 명령을 내리려 할 때였다.

한 번 왼쪽으로 꺾었던 괴물이 다시 정면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괴물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병사들이 거리를 벌린 틈을 탄 것이다.

'나를 노리는 건가.'

생각은 들자마자 확신으로 굳었고, 확신한 순간 몸이 굳었다.

쿵! 쿵!

땅이 울린다.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턱 끝에 걸려 흔들렸다.

*

군터는 군사를 뒤로 물렸다. 흩어지는 적을 세 번 돌파한 후였다.

병사들과 말의 피로가 컸기에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동시에 혼란스러운 전장을 살펴볼 시간도 필요했다. 그저 당장 눈에 보이는 대로 움직이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니까 말이다.

여전히 무지막지하게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서 멀리 떨어진 것을 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흐름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곧 당도하겠군.'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후방의 본군이었다. 프롱기우스 후작이 이끄는 본군이 전장에 가까워져 있었다.

본군을 확인한 후에는 파르네토 후작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산발적으로 나뉘어 우왕좌왕하는 적군을 몰아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전세는 좋았다. 적이 불러냈음이 분명한 폭설은 그들을 불길에서 구해냈지만, 동시에 혼란을 안겨주었다.

무지막지한 눈보라가 가린 것은 베이고르의 눈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적들 역시 제대로 시야 확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꺼진 땅 밑에서 올라와 지휘체계를 회복하지 못한 적들이 느끼는 혼란은 베이고르보다 훨씬 컸다.

그나마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포위 대형을 만들어 냈지만, 파르네토 후작의 급습에 모든 것이 무너져버렸다.

'음?'

파르네토 후작을 찾던 중, 대장기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눈에 힘을 주고 그곳을 자세히 보니 파르네토 후작으로 보이는 자가 소수의 병력과 함께 어딘가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쫓기고 있었다. 분명하게, 그는 도망치고 있었다. 그를 쫓는 커다란 괴물로부터.

'기수?'

구노르였다. 그런데 그 구노르 위에 사람이 떡 하니 앉아 있었다. 목줄 같은 것까지 쥐고 말이다.

조금 더 자세히 보니 그것이 쇠사슬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사슬이 구노르의 두툼하다는 말도 부족한 굵은 목에 감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믿기지 않지만 저 사람, 노인으로 보이는 자는 정말로 구노르의 기수였다.

저 괴물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고작 한 기에게 저리 쫓기다니.'

확실히 구노르의 기수는 범상치 않아 보였다.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화살들을 간단히 피하거나 쳐내고 있었고, 그런 와중에도 구노르로 하여금 파르네토 후작을 쫓게 했다. 물론 그런 무공이 아니더라도 저 괴물을 부릴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위태롭군."

"예?"

할렌은 군터가 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카엘 역시 마찬가지.

"파르네토 후작이 쫓기고 있다."

"옛? 그게 무슨……."

"전황이 좋지 않은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파르네토 후작이 군사를 지휘하지 못하고 무작정 도망만 치고 있는 상황에서, 적군은 느릿하게나마 혼란을 수습하려는 기미가 보였다.

특히 바르바피들이 한쪽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본능만이 남은 짐승들이 한곳에 모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들을 이끌 만한 구심점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전사장 콰이렌.'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는 모른다. 다만 일전에 바르바피들을 제대로 통솔했었던 초원의 대전사를 떠올려보면, 저렇게 바르바피들을 통제할 수 있는 이는 전사장이라는 적장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더 이상 끌려서는 안 돼. 여기서는 일단 빠져야 한다.'

잠시 물러났다가 본군과 합류를 하던가, 아니면 본군이 교전을 벌이는 틈을 타 다시 한 번 적의 측면이나 배후를 노려야 한다. 기병이 보병처럼 한 곳에 버티며 싸우는 것은 좋지 않다. 수가 몇 배나 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지금은 물러나야 한다. 물러나야 하는데, 명령을 내려야 할 지휘관이 쫓기고 있다. 목숨을 건사하기에 바빠서 군사를 지휘할 정신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구하려 하십니까?"

할렌이 물었다.

"그래야지. 파르네토 후작이 당하면 곤란하다."

후작이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가 거느린 병력이 문제다. 머리가 없어지면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은 몸뚱이나 군대나 비슷하다.

게다가, 어찌 되었든 파르네토 후작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렇다면 받은 만큼은 돌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백 기만 대동하겠다. 할렌. 너는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본군에 합류해라."

"예? 하지만……."

"많은 병력이 움직이면 그만큼 적의 시선을 끌게 된다. 어차피 파르네토 후작을 쫓는 적이 소수이니, 우리도 적게 움직이는 것이 좋다."

소수도 그냥 소수가 아니라 단 한 기에 불과하다. 물론 그 한 기가 손 쓸 방도가 보이지 않는 괴물이기는 하지만…….

'창칼이 통하지 않는다지만, 그 두꺼운 가죽이 이 녀석까지 막을 수 있을까.'

군터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를 실망시킨 적이 없는 그의 애병, 아니 분신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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