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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90화 (390/1,064)

390화

"흩어져-!"

군터는 그리 외치며 거칠게 고삐를 당겼다. 경황 없는 와중이라 전마의 사정을 봐줄 여유가 없었다. 목이 꺾일 뻔한 군마가 황급히 방향을 틀었다.

구어어어어어-!

"피해라!

거대한 바위가 굴러오는 것 같았다. 말을 탄 병사들조차도 고개를 직각으로 꺾어야만 괴물의 머리 꼭대기를 볼 수 있었다.

쿵! 콰직!

말과 사람이 동시에 짓이겨졌다. 괴물은 단지 앞만 보며 달릴 뿐이었다. 그 단순함과 과격함에 수천의 기병이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괴물이 들이받는 대로 대열이 갈라져갔다.

"쏴!"

그렇다고 그들이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괴물의 우악스러운 돌진을 피해 흩어지면서도 활을 든 병사들이 괴물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병사들이 쏜 수백 발의 화살은 괴물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화살이 제대로 가죽을 뚫지도 못한 채 튕겨 나왔고, 극소수의 화살만이 아주 얕게 박혀 있다가 괴물이 몇 걸음 더 돌진하자 허망하게 떨어졌다.

퍼억!

오직 군터가 쏜 화살만이 괴물의 몸에 박히고도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단지 그뿐. 괴물은 화살을 맞았어도 맞은 줄 모르는 것처럼 날뛰었다. 결국 군터가 쏜 화살조차 괴물에게는 별다른 고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다섯 발의 화살을 연달아 쏘고서 군터는 자신의 화살이 괴물에게 타격을 줄 수 없음을 깨닫고 인상을 구겼다.

'창칼이 들지 않아 불로써 물리칠 수밖에 없었다더니.'

거짓일 거라고는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과장이 섞였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전해 들었던 말은 모두 조금의 과장도 없이 사실이었다.

'손 쓸 도리가 없는 건가?'

대적해야 할 적을 앞에 두고 암담함을 느끼기는 처음이다. 마치 자그마한 언덕이 움직이는 것 같은 저 괴물은 그의 손을 벗어난 존재처럼 보였다.

그렇게 군터가 활 시위를 당기는 것도 멈춘 채, 앞만 보고 달리는 괴물을 피해 뿔뿔이 흩어지는 부하들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akara! bragaikaa!"

수북하게 깔리는 눈보라 너머에서 일단의 병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외형은 초원의 전사들과 확연히 달랐다. 가볍게라도 무장을 갖춘 초원 전사들과는 달리, 그들은 마치 사냥꾼처럼 털 달린 가죽옷만을 입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말에 올라 있지도 않았으며, 통일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길고 짧은 칼이며 도끼 같은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저놈들이 설족인가.'

그들과 전투를 치러본 이들은 그들을 짐승보다 더 짐승 같은 놈들이라 했다. 정말 그러한지는 직접 부딪쳐봐야 알겠으나,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짐승 같아 보였다.

"집결하라-!"

이제껏 특별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군터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목청이 범인과 비할 수 없이 우렁참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괴물의 난동으로 흩어졌던 병력이 그의 외침에 다시 모여들었다.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괴물에 기가 죽기도 했지만, 군터의 병사들은 그 와중에도 자신들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redara gaa!"

정면에는 수백의 설족.

구어어어어어!

뒤쪽에는 돌아선 괴물, 구노르.

거기에 점점 무너진 땅에서 올라오고 있는 초원의 전사들까지.

"여기서 발이 묶이면 끝장이다."

"하하. 새삼스럽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런 일이 한두 번이었던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할렌은 능글맞게 웃었다. 어쩌면 사선(死線)에 걸쳐 있는지도 모를 상황에서 말이다. 군터는 그런 할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 생겼는지 모를 흉터들을 훈장처럼 새긴 노련한 군인에게서는 한때 그의 소유였던 노예 소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도 그렇군."

"돌파합니까?"

군터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가 동요하는 군마의 목 뒤를 쓸어 내리며 칸젤을 고쳐 쥐는 사이, 할렌은 자연스레 그의 우측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좌측에는 자연스럽게 카엘이 자리했다.

"이런 살 떨리는 전장은 처음입니다."

할렌이 카엘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서 겁나나?"

"겁? 그럴 리가 있소!"

씩 웃는 카엘의 눈이 번들거렸다. 거칠어진 호흡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에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따르라! 돌파한다!"

"nabu shaa!"

카앙!

날아드는 손도끼를 쳐내며, 군터가 말을 달렸다. 앞서가는 그런 그의 뒤를 병사들이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따랐다.

*

"제기랄!"

호타가르아는 힘겹게 단단한 땅에 올라오자마자 욕부터 내뱉었다. 설마 이중 함정일 줄은 짐작도 못했다.

설족의 사제들이 적의 화공을 무력화시켰을 때만 해도 그는 이 전쟁이 콰이렌의 승리로 끝나리라 확신했었다. 그런데 적장에게도 한 수가 있었다.

'아니지. 두 수지.'

덫 속의 덫이라니. 땅이 무너질 때 밑으로 가라앉으며 거칠게 노성을 지르던 콰이렌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명했다.

'이렇게 되면 아직 모르는 건가.'

호타가르아는 온 몸에 달라붙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생각했다.

그는 현 상황을 냉정히 따져보았다.

바로 어제, 북동쪽에서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콰이렌은 그쪽으로 병력 일부를 보냈다. 호타가르아는 일부러 이곳에 남았다. 만에 하나 베이고르가 선전을 해준다면, 그는 전투 중에 전장을 이탈할 생각이었다.

'아직은 아니다. 한 방 먹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병력이 건재하고, 무엇보다 설족이…그 괴물이 멀쩡할 테니.'

피부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정말 터무니 없군."

하는 일 없이 어깨에 힘만 주고 다니는 늙은이인 줄 알았더니 이런 재주가 있었는가. 호타가르아는 신기의 힘을 빌려 기후를 주무르던 대족장을 떠올렸다.

물론 그 늙은이의 능력이 대족장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충격적인 것은 사실이다. 선선하던 하늘이 한 순간에 혹한의 눈보라를 뿌리고 있지 않은가.

"족장. 어찌 할까요."

마찬가지로 몸에 흙먼지를 덕지덕지 묻힌 수하가 다가와 물었다.

"일단 전사들을 모아서 추스르는 게 먼저다."

불에 타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갑작스레 땅 밑으로 추락해버리는 것도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말과 사람이 뒤엉켜 부딪치고 깔린 탓에 인마(人馬)가 제법 상했을 것이다. 지금만 해도 올라오지 못하는 전사들이 꽤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무덤을 찾았으리라.

콰아앙!

전장의 소음을 뚫고 귀를 찌르는 굉음에 호타가르아가 휙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 떨어진 곳. 수북이 쌓인 눈이 사방으로 비산하는 가운데 거대한 형체가 땅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구어어어어어어-!

구노르. 그리고 그 위에 올라 있는 또 다른 형체.

초원의 전사들 중에서도 눈이 좋은 편인 호타가르아의 눈에는 그 형체가 뚜렷하게 보였다.

울부짖는 구노르의 위에 올라 타 있는 것은 상체에 늑대 가죽 하나만 덜렁 걸친 노인이었다.

'역시 살아있었군.'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일말의 기대감을 가졌었다. 저 괴물 늙은이가 그대로 계속 땅 속에 묻혀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역시 헛된 기대였다.

괴물은 멀쩡했다. 그리고…무척이나 화가 난 것 같았다.

*

"fragaa! eiduaa!"

설족들은 바르바피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 힘과 몸놀림은 바르바피에는 못 미쳐도 확실히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르바피와는 달리 본능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전투를 사냥하듯 했다. 대열이라든지, 훈련 받은 군인의 전투방식이 그들에게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각자 따로 움직이는 그들에게서는 난잡함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강했다. 어떤 이는 도끼를 투척했고, 어떤 이는 한껏 몸을 낮추며 창을 찔렀다. 또 어떤 이는 큼지막한 양손 검 하나를 들고 달리는 말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군인이 아니라 싸움꾼 내지는 전사 같았다. 매우 야성적인 전사.

까다로운 상대였다. 하나하나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콰직!

"velakaa!"

그러나 그를 멈춰 세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군터의 양 옆은 할렌과 카엘이 보조했고, 그 뒤는 수천의 기병이 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정면의 적만 신경 쓰면 됐다. 단지 그뿐이라면, 군터는 자신의 앞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자신했다.

콰직!

오만이 아니었다.

퍼걱!

손에 쥔 칸젤이, 힘이 넘치는 육신이 그리 속삭이고 있었다.

우리의 앞을 막을 수 있는 적은 없다고 말이다.

푸욱!

"garakaa!"

창 날에 복부를 관통 당한 적이 피를 토하며 무기를 휘둘렀다. 군터는 칼날이 자신의 몸에 닿기 전에 칸젤을 털어 발악하는 설인을 떨궈냈다.

"아아악!"

"velahii!"

뒤에서 처절한 고함과 비명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군터는 고개 돌리지 않았다. 최대한 신경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빨리 길을 여는 것이었기에.

"흐읍!"

찌르고, 벴다. 이따금씩 몸이 흔들릴 때면 다리에 힘을 주어 말의 배를 조였다. 어깨에 박힌 화살도, 옆구리를 가른 도끼 날도 군터의 집중을 흐트러뜨리지는 못했다.

오직 앞만 바라보며, 막아서는 적들에게 칸젤을 휘둘렀다. 하나하나가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에 검도 뽑지 않았다. 두 손으로 칸젤을 쥐고 전력을 다했다.

콰앙!

도끼를 들어 막은 설인이 박살 난 도끼 날 일부를 얼굴로 받은 채 뒤로 튕겨 나갔다.

"후우…후우……."

열 여섯 번째 적을 치워낸 군터의 눈이 빛났다.

"길이 열렸다-!"

와아아아아-!

그의 고함이 터지기 무섭게 뒤쪽에서 우렁찬 함성이 뒤따랐다. 이 짧은 한 마디가 지친 병사들에게 힘이 되었으리라.

히히히힝!

앞을 가로막는 적이 없어지고서도 얼마 동안 더 말을 달린 후에 군터는 뒤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오른쪽 가슴에 손도끼 한 자루를 달고 있는 할렌이었다. 입가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낼 정신도 없는지, 고삐를 쥔 채 위태롭게 말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할렌! 괜찮은 것이냐!"

"괜찮습니다. 갑옷 덕분에 멀쩡합니다. 그냥 피를 좀 흘려서 어질어질한 것뿐입니다."

그 말에 다시 보니 몸 여기저기에 입은 상처들이 눈에 들어왔다. 심각하다 싶은 것은 없었으나, 피가 흐르지 않는 것 또한 없었다.

"크으! 정말이지 무식한 놈들이군요."

할렌이 가슴에 박힌 도끼를 잔뜩 인상을 쓰며 뽑았다. 그의 말처럼 갑옷이 제대로 보호를 해주었는지 피는 거의 흐르지 않았다.

"이야. 부하를 챙기는 상관이라니.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카엘이 환히 웃었다.

그 역시 멀쩡한 몰골은 아니었다. 노르스름하게 변한 눈은 숨을 쉬면서도 이따금씩 고통으로 얼룩졌다.

"주인과 수하의 오붓한 한 때도 좋습니다만, 일단은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나갈지를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카엘의 말을 들은 군터가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조금 전 보았던 것보다 족히 수십 배는 더 되어 보이는 적군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들은 정확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가능하겠습니까?"

카엘이 조금은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군터는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히며 칸젤을 꽉 쥐었다.

"해내지 못하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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