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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89화 (389/1,064)

389화

베이고르군이 고지를 점하고, 초원의 군대는 아래서 올라오는 형태였다.

적군이 천천히 앞으로 나오기 시작할 때, 군터는 군의 우측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적이 우리의 의중대로 움직일까요?"

할렌이 작게 물었다.

"……."

군터는 답하지 않았다.

'뻔히 보이는 함정이라.'

프롱기우스 후작은 진지의 앞쪽에 풀이며 나뭇가지를 포함해 탈 수 있는 것들을 기름과 함께 대거 깔아놓았다. 적들이 전면에서 치고 올라올 경우 이전의 전투에서처럼 불을 질러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문제는 적이 바보가 아니라, 그런 생각을 분명히 눈치챌 것이라는 거다.

따라서 적은 함정이 놓인 전면이 아니라 측면으로 우회하여 들어올 가능성이 크다. 프롱기우스 후작 역시 그리 생각했고, 따라서 측면으로 돌아오는 적을 요격하기 위해 기병대를 나누어 배치했다. 우측에 군터의 기병대를 두는 한편 후방에는 파르네토 후작의 기병을 둔 것이다.

"적이 측면으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 친다."

초원의 기병은 기동력이 우수하고 마상에서 활을 쏠 수 있지만, 정면 격돌에는 그다지 강점이 없다. 오히려 그 점에서는 무장을 무겁고 단단하게 하는 베이고르의 기병이 우세를 점할 수 있다. 프롱기우스 후작은 그 점을 노려 기병대를 나누어 배치시켰다.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프롱기우스 후작에 대한 믿음을 접어두고 계획 자체만을 놓고 봤을 때, 군터는 적들이 뜻대로 움직여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함정인 정면으로 무리하게 밀고 들어오지는 않을 테고, 전해 들은 적장의 성미를 떠올려보면 지구전으로 끌고 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뿌-우우-우우!

그런 예측이 무색하게, 점차 속도를 올리는 초원의 군대가 향하는 방향은 좌우 어느 쪽도 아닌 정면이었다.

"틀어졌군."

군터는 지휘단 위에 서 있는 프롱기우스 후작을 보았다. 그는 옆의 다른 지휘관들처럼 가만히 적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별다른 신호를 보낼 징후는 없었다.

슈슈슝!

적이 움푹 파인 지형에 다다랐을 때. 미리 대기하고 있는 궁수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붉은 불화살이 어둑한 하늘을 수놓는 광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붉은 선들이 땅에 닿는 순간.

화르륵!

기름을 머금은 땅에서 불씨가 생겨났다. 무수하게 일어난 작은 불씨는 곧 서로를 이었고, 불어온 바람이 닿았을 때 자그맣던 불씨는 거대한 불길이 되었다.

불길은 달려오는 초원의 군대를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순식간에 덩치를 불렸다. 때마침 바람도 북동쪽으로 불고 있는 상황.

'뭐지?'

적들이 저곳에 함정이 있는 것을 몰랐으리라는 되도 않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군터는 적들에게 뭔지 모르는 비장의 한 수가 있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치솟는 불길은 금방이라도 적의 선두를 집어삼켜버릴 듯했다. 무슨 수를 쓰든, 저래서야 이미 늦은…….

"?œŋđζΟΠ-!"

처음 듣는 언어. 어쩌면 그냥 아무렇게나 외친 것일 수도 있는 쩌렁쩌렁한 외침이 전장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갑작스레 하늘에 먹구름이 깔리더니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거의 쏟아지다시피 하는 굵은 눈들로 인해 시야가 가릴 정도였다.

"이게 무슨!"

상상도 못했던 광경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이 입을 쩍 벌렸다. 그러나 입만 벌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눈보라가 불 위로 쏟아지면서 불길이 빠르게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

군터는 다시 한 번 지휘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프롱기우스 후작이 주변에 무어라 바쁘게 외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깃발은 하나도 올라가지 않고 있었다.

*

예상했었다. 처음 적들이 천천히 전진할 때부터 왠지 모르게 그냥 밀고 들어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나온다면, 불구덩이를 돌파할 방도를 쥐고 있음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화려할 줄은 몰랐다.

정말 순간 말문이 막힐 정도로 황당한 광경이었다. 밝은 별들이 춤추던 하늘에 갑자기 어디선가 시커먼 구름이 끼더니 연달아 폭설이라.

적당히 선선하던 공기가 갑자기 살얼음이 낀 것처럼 차가워졌다.

"황당하군."

그러나 감상은 감상이고 전투는 전투. 프롱기우스 후작은 즉각 명령을 내렸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벌어졌을 때를 대비한 준비 역시 다 해두었다.

"흰 수리의 자손들이여! 시작하라!"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차림의 사내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각자 품 안에서 자그마한 석상 같은 것을 꺼내어 내려놓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서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Ħuð…i……."

그들이 내는 소리는 전장의 소란에 금방 묻혔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한 마디씩 그렇게 묻혀갈 때마다 살을 에는 듯 맹렬하던 추위 속에 음습함이 스며들었다.

와아아아아아-!

눈보라 속에서 불길이 죽어가고, 초원의 군세는 사기 백배하여 꺼져가는 불씨 위를 달렸다.

그렇게 그들이 불의 잔해를 반쯤 지났을 무렵.

푸욱!

갑작스레 그들 아래의 땅이 움푹 꺼졌다. 그건 마치 아주 얇게 펼쳐놓은 천 위에 무거운 돌멩이 하나를 올려놓았을 때 벌어지는 일과 흡사했다.

천이 아래로 꺼지고, 그 위의 돌멩이가 떨어진다. 땅 위를 달리던 말과 병사들이 꺼지는 땅속에 파묻혀갔다.

히히히힝!

"뭐, 뭐야!"

풀들이 자라 있던 땅은 어느새 시커멓게 변해 시들어 있었다. 흙마저 생기를 잃고 재처럼 변했다. 단단하던 지반은 풍화된 것처럼 물러졌고, 그 위를 지나던 무거운 인마(人馬)를 버티지 못한 채 무너졌다.

그리하여 나타난 모습은 마치 늪과 같았다. 말과 사람은 빠져 나오려 허우적거렸지만, 아무것도 짚고 나올 것이 없는 물렁한 지대는 그들의 탈출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과 같았다.

"지금이다! 우측의 기병을 돌격시켜라!"

"옛!"

언제 명령이 떨어질지 몰라 잔뜩 긴장하고 있던 병사들이 우렁차게 외치며 깃발을 들어올렸다. 두 사람이 함께 들어야 들어올릴 수 있는 커다란 깃발이 우뚝 섰다.

그와 동시에, 지휘단을 눈 여겨 보고 있던 군터가 군을 이끌고 튀어나갔다.

"장군! 후방의 기병도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이다. 후방의 기병은 계속 대기시킨다."

이제 조금씩 허물어진 땅에서 탈출하기 시작하는 적군. 그들을 바라보는 프롱기우스 후작의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보다도 더 차가웠다.

*

"저것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할렌이 물었다.

"아니! 들은 바 없다!"

정말 몰랐다. 군터가 들은 것은 적이 정면으로 들어오면 불을 지를 것이라는 것과 적이 측면으로 돌아올 시 즉각 요격하라는 명령 뿐이었다. 저 해괴한 광경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쪽에도 숨겨둔 한 수가 있었군.'

뒤통수를 한 방 맞은 기분이나 불쾌하지는 않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기뻤다. 적들의 기이한 술수는 군터 자신의 의표를 찔렀으나, 프롱기우스 후작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철저하게, 예상 밖의 상황에까지 대비책을 세워뒀던 것이다.

"빠져 나온 놈들을 친다!"

땅이 어디까지 무너져있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눈까지 쏟아지고 있으니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때문에 군터는 군사를 최대한 바깥쪽으로 이끌었다. 그러면서 토사에서 빠져 나온 적들을 노렸다. 그들은 목표임과 동시에 지표이기도 했다.

적어도 그들이 딛고 있는 땅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까 말이다.

"크아악!"

힘겹게 땅 위로 올라온 적들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창에 몸을 내주었다. 수십 명이 뭉쳐있다 해도 수천의 기병이 한 번 지나가면 모조리 주검으로 변했다. 군터는 단 한 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고, 그건 그를 따르는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건 쉬워도 너무 쉽군!"

카엘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 것일까. 몇 번 싱겁게 휩쓸었다 싶었을 때, 무너진 토사에서 이전과는 다른 것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번들거리는 검은 갑각 같은 피부. 노랗게 빛나는 눈. 짐승 같은 울부짖음.

바르바피였다.

"바르바피다!"

한 둘이 아니었다. 족히 백은 되어 보이는 바르바피들이 한꺼번에 기어 올라왔다. 군터가 그들을 보았을 때 그들 역시 군터와 그의 병사들을 보았고, 두 무리는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놈들이……."

군터의 뒤에서 할렌과 나란히 말을 달리던 카엘은 전율했다.

'내가, 저런 괴물이 될 뻔한 건가?'

'실패작'이 아니라 '성공작'이 되었더라면, 그랬다면 저런 인간 같지 않은 몰골의 괴물이 되었을까?

'실패작이길 다행이군.'

시답잖은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 적들과의 거리는 어느새 지척으로 줄어들었다. 네 발로 달리는 말들도 빨랐고, 두 발로 뛰는 바르바피들도 그에 못지 않게 빨랐다.

크허엉!

가장 먼저 뛰어오른 바르바피는 허공에서 군터의 창에 꿰였다. 군터는 버둥거리는 놈을 내팽개치며, 달려드는 또 다른 바르바피를 검으로 베었다.

"멈추지 마라! 겨루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고 생각하라!"

바르바피의 무지막지한 생명력과, 그 이상으로 성가신 집요함을 알기 때문에 군터는 바르바피들에게 시간을 끌리길 원치 않았다. 지금 이곳엔 질긴 바르바피들이 아니더라도 상대해야 할 적들이 많았으니까.

크아아아아!

선두에서 길을 여는 군터의 활약에 힘입어, 그들은 엉겨 붙는 바르바피들을 떨쳐낼 수 있었다.

"장군! 놈들이 따라붙습니다!"

그러나 한 번 떨쳐냈다고 끝이 아니었다. 바르바피들은 포기하지 않고 쫓아왔다.

"무시하고 달려라! 놈들이 빠르다 하나 말보다 빠르지는 못하니!"

그러면서 군터는 홀로 옆으로 살짝 빠지며 활을 들었다.

퉁! 투웅!

그러면서 그는 상체만 뒤로 젖히며 몇 대의 화살을 날렸다. 시위를 벗어난 화살들은 빗나가는 것 하나 없이 뒤따라오던 바르바피들을 맞췄다. 하지만 화살은 바르바피들에게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다. 그냥 팔을 들어서 막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강하게 날아간 화살은 바르바피들의 두꺼운 피륙에 틀어 막혔다.

크허엉!

그래도 군터는 실망하지 않았다. 죽이거나 크게 상처 입히지는 못했지만, 선두에서 달리던 놈들의 발을 한 순간이나마 묶었다. 앞에 달리던 놈들이 멈춰서니 뒤에 달리던 놈들도 느려지고, 그 한 순간 동안 거리는 충분히 벌어졌다.

"계속 달려라!"

군터가 화살을 다시 안장에 걸고 선두로 복귀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방향을 틀어, 간신히 숨을 돌리고 있는 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적들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가던 그 순간.

콰아아아아!

갑작스레 쌓여 있던 눈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어어어어어어어어-!

쏟아져 내리는 흰 눈 사이로, 시커먼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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