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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88화 (388/1,064)

388화

수천의 병사가 북방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위글로우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적어도 며칠 전까지는 그랬다.

일반 시민들의 삶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관료들. 특히 고위 관료들은 공기가 변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정확히 사흘 전, 영주의 친위대장이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면서부터였다.

친위대장을 잃은 이후, 영주는 무려 이틀 동안이나 칩거했다. 당연히 그 동안의 모든 일정은 취소 되었다. 부친을 잃었을 때도 이렇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측근을 잃은 영주의 상심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이틀을 칩거한 영주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를 본 몇몇 이들은 영주가 변했다고 느꼈다.

그는 전과 달리 어두운 분위기를 풍겼다. 여기까지는 아직 상심에 차 있어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영주는 조급하거나 짜증을 내는 모습이 늘었다. 이전의 영주는 조급해할 만하거나 짜증을 낼 법한 일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상심에 차서라고 보기에는 너무 극단적이었다. 이전부터 영주를 봐왔던 이들에게는 갑작스레 사람 자체가 바뀐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와중에도 그들은 조금 시간이 지나면 영주가 심신을 추스르고 예전처럼 돌아올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어떤 몇몇 사람들은, 영주가 이전처럼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조심스럽게 내다보기도 했다.

*

"한 시녀가 소영주님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또 말인가?"

미겔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니클라스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하! 이건…실망스럽군."

"불충한 언사입니다."

니클라스의 정색에 미겔은 피식 웃었다.

"이 정도는 봐주게. 아마도 나는 자네만큼 충성스러운 신하는 아닌 모양이지."

"……."

"걱정스럽군. 영주님께서 죽은 친위대장을 의지하시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사람 하나를 잃는 것이 그리도 큰가?"

"……."

"자네에게 묻는 말이네."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정말 무뚝뚝하군. 말을 섞는 재미가 없어."

"……."

"하여간 영주님도 걱정이지만, 불똥이 엄한 곳에 튀는 것도 걱정스러워. 벌써부터 동요하는 자들이 생기고 있지 않은가?"

"갈대 같은 자들에 불과합니다. 영주님께서 기침만 해도 후사를 걱정할 이들입니다."

"하하. 자네는 영주님을 섬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충성심은 어찌 그리 깊은가?"

"한 번 잃었으니 두 번은 잃지 않겠다는 마음뿐입니다."

"그거 참 감동적이군. 영주님께서도 이런 충성스런 신하가 있음을 아시고 마음을 다잡으셔야 할 터인데……."

중얼거리는 미겔을 쳐다보고 있던 니클라스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재미있으십니까?"

"음? 뭐가 말인가?"

"이 상황이 말입니다."

"아니. 그렇지는 않네만."

"그렇지만 웃고 계시는군요."

그 말에 미겔은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그리고 자신의 입 꼬리가 슬쩍 들려 있음을 확인했다.

"흐음.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군."

"무엇이 그리 재미있으십니까?"

"글쎄……."

입술을 매만지던 미겔이 손을 내렸다. 올라갔던 입술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자네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나는 자네보다 더 오래 영주님을 섬겼다네. 그래서 자네보다는 영주님을 더 잘 알지. 아니, 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까?"

"내가 봐왔고, 생각한 영주님은 상당한 야심가였네. 거의 모든 일에 철두철미하고, 절대 감정적으로 일을 대하는 법이 없었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어떤 요인으로든 경솔한 판단을 내리기 마련인데, 영주님은 그런 것이 없었어. 감정적이게 행동하는 듯하지만 나중에 가서 보면 다 계산된 행동이었지.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나는 때때로 영주님이 두려웠었네. 그분의 앞에 설 때면, 내 모든 것이 까발려지는 것만 같았거든."

미겔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나는 신하로서 영주님께서 하루빨리 기운을 차리시기를 바라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분께서 지금처럼 힘들어 하시는 것을 보며 안도감을 느낀다네. 그분께서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말이야."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니클라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시녀는 어찌할까요."

"입 단속만 시키게."

"괜찮겠습니까?"

"관저에서 일하는 이들 치고 눈치 없는 이가 없지. 제 목숨 아까운 줄 알면 어디 가서 입을 놀리지는 못할 것이야. 치워버리면 오히려 다른 이들의 주의를 끌 수 있으니, 간단히 처리하는 것이 좋아."

"알겠습니다."

니클라스가 물러가고 잠시 후,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가 들어왔다.

"대장. 오면서 니클라스를 봤는데."

"아. 잠깐 불러서 이야기 좀 나눴지."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닙니까? 별로 믿을만한 놈 같지도 않은데."

"실력이 있잖느냐."

"이 바닥에서 칼 솜씨가 언제부터 그리 중요했다고……."

"없는 것보다는 낫지. 그리고 믿을만한 놈이다. 한 번 마음을 얻기만 하면 말이지."

"그래서 그 마음은 얻으셨습니까?"

"아직."

"쯧! 그 놈이 무슨 숨겨놓은 애인이라도 됩니까? 싸고 돌기는 어찌나……."

"잡소리는 그쯤 하고. 무슨 일이냐?"

"폴사도에서 전갈입니다. 미트라스와 폴사도의 미망인이 붙어먹었다는군요."

"폴사도의 미망인?"

"영주, 아니지. 전 영주 부인 말입니다. 현 영주의 엄마."

"허! 그 와중에도 계집질은 아주 제대로 했군."

"대단하지 않습니까?"

"대단하지. 대단해. 그냥 단순한 불장난이라 하더냐?"

"자세한 건 조금 더 봐야 알겠습니다만…설마 불장난이겠습니까?"

정말 만에 하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이성적으로 미친 듯이 끌렸다고 해도, 그 두 사람은 본능을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야심가다. 충동에 이끌린 불장난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잘 알고, 그런 위험을 멀리할 수 있는 자기조절 능력을 갖춘 자들이란 거다.

그런데도 그들이 함께 밤을 보냈다면 그것은 단순히 뜨거운 본능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정략적 동맹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 옳다.

"미트라스 부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정말 볼만하겠군."

"정말 그럴 겁니다. 사교계에서 치맛바람 좀 날리는 여인네가 아닙니까? 위글로우에서는 미트라스도 아내의 눈치를 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그건 과장이고 헛소문이겠지만, 실제로 미트라스 부인이 사교계에서 행세 좀 하고 다니는 것은 사실이었다. 전 영주 부인이 처량한 신세가 된 이후로, 줄곧 사교계의 중심은 그녀였다.

영지의 세 기사 중 하나가 그녀의 남편인데다, 그 남편은 단순히 기사라는 작위만이 아니라 군부의 최고 지위까지 겸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위글로우의 유지 가문 출신이다. 자연히 주변에 사람이 몰릴 수밖에 없고, 그 사람들은 고스란히 그녀의 인맥이 되었다.

"그래도 요즘엔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면서?"

"아아. 그 루시라는 여자 말입니까?"

예전부터 조금씩 이름이 들리던 여자다. 마찬가지로 영지의 세 기사 중 하나인 군터의 측근, 할렌의 부인이다. 그녀는 사교계에 잘 출입을 하지 않는 군터 부인을 대신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미트라스 부인에 비하면 부족해도 나름대로 사교계에서 상당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이 사실이 새어나가면 여러 사람이 곤란해지겠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뭐라 둘러대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미트라스나 그 부인이나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흐음."

"보고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영주에게 보고를 하면 미트라스는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이다. 특히 요즘 들어 잔뜩 예민해져 있는 영주라면, 어쩌면 곧바로 미트라스를 소환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리 되면 미트라스는 아마 높은 확률로 그의 지위를 잃게 될 것이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지금 같은 때에 괜히 긁어 부스럼일 것 같단 말이지."

"그럼 보고하지 않으실 겁니까? 나중에 곤란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미트라스의 감시는 영주가 직접 명한 사안이다. 사소한 일도 아니고, 이런 큰 건을 보고하지 않고 뭉개고 있다가 나중에라도 영주가 알게 되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

"일단은 보류다. 내가 따로 말을 하기 전까지는 입 단속 철저하게 시켜. 아니. 그냥 잊고 있어라."

"뭐…알겠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는 듯, 표정만큼이나 대답도 떨떠름하다. 평소 같았으면 머리통이라도 한 대 후려쳤을 것인데, 흥미로운 소식을 가져왔으니 미겔은 한 번 봐주기로 했다.

'감이 없는 작자는 아니었는데, 폴사도에 틀어박혀서 한동안 왕 같이 지내다 보니 긴장이 풀렸나 보군.'

조금 지루해진다 싶으면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참 재미있지 않은가.

*

뿌우우우우-!

저 뿔 나팔 소리는 아마도 자신들의 용기를 북돋기 위한 것이었을 거다.

하지만 고맙게도, 볼이 찢어지도록 나팔을 분 그들의 노력은 군터에게도 힘이 되었다.

얼마나 이어질지,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는 전투의 서막을 알리는 나팔 소리는 긴장되기보다는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자문해보아도 답은 들을 수 없다.

"저게 구노르군요. 저런 건 본 적도 없습니다."

할렌이 옆에서 무언가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

괴물이다 괴물이다 말만 들었지, 직접 보지는 못했었다. 그러다가 이제야 멀리서나마 그 정체를 눈으로 확인하게 되니, 일단은 감탄부터 나왔다.

우선 덩치는 거대했다. 두 마리였는데, 그 중 큰 놈의 덩치는 도시의 성문만했다. 어째서 저놈이 공성병기의 역할을 할 수 있었는지 덩치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창칼도 화살도 소용이 없다는데, 사실일까요."

"글쎄. 확인해보면 알겠지."

멀리서 보기에도 단단해 보이기는 했다. 수북하게 자란 흰 털이 온 몸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 위세가 대단했다. 다만 몸 곳곳에 그을린 자국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전의 전투에서 불에 그을린 흔적인 것 같았다.

"군터 경!"

프롱기우스 후작의 목소리에 군터는 바로 말을 달려갔다. 높게 쌓은 지휘 단에 올라 있던 프롱기우스 후작은 가까이 온 군터를 내려보며 말했다.

"앞서 말했듯 수시로 지휘기를 올릴 걸세. 전투 와중에도 계속 이곳을 확인하도록 하게."

"그리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전투가 끝난 후에 다시 보세."

"예."

프롱기우스 후작과 짤막한 대화를 나눈 후, 군터는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럼 시어문드 장군. 이쪽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예."

시어문드가 담담히 답하며 고개 숙였다.

이 전투에서 군터는 오직 기병만 이끌게 되었다. 전적으로 그의 선택이었다. 군터는 자신이 직접 전군을 이끄는 것보다 기병만 이끌고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리라 판단했다. 그의 이런 결정은 시어문드를 비롯한 휘하 장수들의 반대에 부딪쳤지만 군터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뿌우우우우우-!

"전투가 끝나고 다시 보세."

"예. 곧 다시 뵙지요."

군터는 시어문드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휘하 기병들과 함께 진영의 우측으로 이동했다. 어느덧 전장의 공기는 최고조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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