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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87화 (387/1,064)

387화

"나설 자가 있는가?"

군터가 그리 말하며 초원 출신인 수하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순간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목을 반쯤은 내어놓고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누구라도 망설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군터는 즉답하지 못하는 수하들에게 실망하지 않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침묵이 흐르던 중에, 가장 먼저 입을 연 자가 있었다. 군터는 그를 보았다.

토어릭. 일찍부터 군터를 따랐던 수하였지만 말재간이 조금 좋다는 것 외에 특별히 눈 여겨 본 적은 없었다. 고만고만한 무예에, 지휘관으로서도 그리 눈에 띄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괜찮겠나? 자칫 일이 틀어지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거다."

"어차피 장군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이대로 있는다 해서 희망적인 미래가 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뚱한 것 같기도 하고, 천연덕스러운 것 같기도 한 대꾸다. 군터는 그의 배짱에 흡족해하며 슬쩍 미소 지었다.

"초원어는 잘 기억하고 있나?"

"물론이지요. 걱정 마십시오. 어버버 거리다가 목이 잘리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돌아오면 두둑이 포상하겠다."

"예. 그 두둑한 포상을 받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날 밤.

토어릭이 엄선한 병사들과 함께 떠났다.

*

"족장."

호타가르아는 막사 밖 수하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무슨 일이냐."

"힐게 족장의 사람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

뭐가 문제냐는 듯 찌푸려져 있던 호타가르아의 표정이 그제야 풀렸다.

힐게 족장과 그는 사적으로도 제법 자루 교류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서로에게 사람을 보낼 때 쓰는 수하들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자연히 눈에 익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고.'

의심도 의심이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들여보내라."

"예."

수하와 함께 들어온 자는 수하의 말처럼 낯선 얼굴이었다. 또한 무장을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간단한 말 몇 마디 전하러 온 것 같지도 않았다. 표정은 태연하지만,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뭔지 모를 비장함이 흘렀다.

'암살자인가?'

슬쩍 낯선 자의 옆에 선 수하에게 눈길을 주니 수하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몸 수색은 샅샅이 했다는 뜻이다.

암살자가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제 곧 알게 될 테니.

"뷔아르 족장을 뵙습니다."

"그래. 넌 누구냐? 암살자냐?"

"암살자라니요. 그럴 리 있습니까. 그 반대입니다."

"반대?"

"토어릭이라 합니다. 족장님을 구해드리러 왔습니다."

"베이고르 놈이군."

이름을 듣고서야 호타가르아는 이 토어릭이라는 자가 베이고르인임을 깨달았다.

"초원 출신인가?"

"그렇습니다."

"배짱 한 번 두둑하군. 죽을 자리를 제 발로 찾아오다니."

"죽을 자리인지 공을 세울 자리인지는 모르는 일이지요. 그것은 오롯이 족장님께 달렸습니다. 또한 족장님께서 사실지, 죽으실지도 족장님의 선택에 달렸지요."

"끌고 가 목을 베오리까?"

가만히 듣고 있던 수하가 나서자 호타가르아는 고개를 저어 제지했다.

"조금 더 들어보겠다."

동시에 그는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수하가 막사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혹시라도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경계를 강화한 것이다.

"계속 해봐라."

"이 전쟁이 어떻게 끝이 나든, 족장님께서는 무사하시기 힘들 겁니다."

"이유는?"

"족장님과 친우분들께서 전사장 콰이렌의 눈 밖에 났다는 소리가 베이고르의 군영까지 들리더군요."

"싱겁군. 단지 그 때문인가?"

"앞으로는 지금까지와 다를 겁니다. 남방의 원군이 올라오고 있고, 아국의 동맹인 요정들도 요정왕의 지휘 하에 군대를 조직하고 있습니다."

"……."

"어려운 전투가 시작되면 전사장은 피 흘릴 자들을 선별하게 되겠지요. 누가 거기에 먼저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족장님과 같은 분께서는 따라도 죽고, 따르지 않아도 죽습니다."

"그 전에 네가 먼저 죽겠지. 내가 지금 당장 네놈의 목을 베어 전사장에게 가져간다면 그의 신뢰를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좋은 생각입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신뢰를 얻기보다는…족장님께서 겁쟁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 밖에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난 그리 생각하지 않는데?"

"사람 생각은 다르니까 말입니다. 그리 생각하신다면 제 목을 베십시오.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건 제 개인적인 의문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이해해보려고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만, 도무지 답이 나오지를 않아서 말입니다."

"곧 죽을 놈의 질문하나 못 들어줄까. 무엇이 그리 궁금한가?"

"족장님께서는 어째서 이곳에 계십니까? 이곳은 족장님께서 계실 곳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족장님과는 상관이 없는 전쟁 아닙니까?"

공기가 달라졌다. 호타가르아의 입은 여전히 흐릿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그렇지 않았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이 전쟁은 초원의 전쟁이다. 대족장의 유지를 잇는 일이기도 하고."

"이제 곧 목이 떨어질 자에게 어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십니까? 그저 반박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면 그렇게라도 본인 스스로를 속이고 싶으신 겁니까?"

"……."

이제 호타가르아는 웃지 않았다. 대신 토어릭이 웃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침묵 속에 부딪쳤다.

"…좋아. 네놈의 말이…완전히 헛소리는 아님을 인정하지. 그런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설마하니 나더러 전사장을 등지고 베이고르의 편에 서라던가 하는,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총명하십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더 들을 가치가 없군."

"잃는 것은 없고, 오직 얻는 것들 뿐인데 어째서 들을 가치가 없다 하십니까?"

"배신자의 오명을 쓰고 초원의 모든 이들에게 신망을 잃을 테고, 베이고르가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내가 얻을 것은 또 무엇이겠는가. 간사하게 혓바닥을 놀려 날 기만할 생각은 집어치워라."

"애초 족장님과 전사장은 서로 믿음을 주고 받은 적이 없으니 배신이 아니며, 족장님을 비난할 자들은 전부 이곳에 묻히게 될 터인데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또한 베이고르가 족장님께 줄 수 있는 것은 없을지 몰라도, 프롱기우스 각하께서는 족장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호타가르아가 눈에 힘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지금까지 네 목을 자르지 않고 있는지 나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군."

"머리와 달리, 가슴은 솔직하기 때문입니다. 족장님께서도 알고 계신 겁니다. 이대로라면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어째서 계속 제 이야기를 듣고 계십니까?"

"……."

"생각해 보십시오. 전사장은 되도 않는 이유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외치는 것은 타칸 연합의 재건이 아니라 대족장의 복수입니다. 가당치도 않은 명분이지만, 그걸 이룬다 해도 이 전쟁의 끝에 무엇이 남습니까? 그는 그저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에 숱한 목숨을 밀어 넣는 미치광이에 불과합니다."

"그 미치광이를 상대로 너희는 쩔쩔매고 있지 않은가?"

"족장님과 같은 분들이 그의 칼이 되어주기 때문이지요. 칼 없는 미치광이가 상대라면 두려워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호타가르아가 침묵하자, 토어릭이 한 마디를 더 던졌다.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엔디게르가 처벌을 받았습니까?"

"…그것까지 알고 있나?"

"뒤늦게 말씀 드리자면, 저는 군터 장군의 휘하에 있습니다."

"하하."

호타가르아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웃었을 때, 토어릭은 내심 긴장했다.

'여기서 갈린다.'

성공이냐 실패냐. 사느냐 죽느냐. 모든 것이 다음에 이어질 호타가르아의 반응에서 결정된다.

두려움보다도 짜릿함이 토어릭을 지배했다. 도박판에서 전 재산을 걸고 판을 벌였을 때보다도 더한 흥분이었다.

살 떨리는 긴장감에 몸이 굳어갈 무렵. 호타가르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나는……."

*

"성공했군."

"성공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실패도 아닙니다만……."

"살아왔으면 그것으로 성공이다."

반은 진심이었다. 성공하지 못했다는 말에 실망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이지만, 군터는 토어릭과 병사들이 몸 멀쩡히 살아서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놈이 뭐라 하던가?"

"짐작했던 대로 상당히 신중한 자더군요. 그 자는 남의 전쟁에서 피를 흘리지 않겠다 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이대로 전사장과 함께 우리와 싸우지도, 우리와 손을 잡고 전사장과 싸우지도 않겠다는 뜻이지요."

군터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그런 대답이 있단 말인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대체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한 마디로 간을 보겠다는 겁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전세를 살펴보다가, 우리 쪽이 선전한다 싶으면 그때 발을 빼겠다는 것이지요."

"약아빠진 놈이군."

"발을 빼고 싶은 마음이 강하지만, 우리가 초원의 군대를 이겨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같이 죽기는 싫다는 투로 말하더군요."

"…그래. 알겠다. 지금 내게 한 말을 프롱기우스 후작 앞에서도 똑같이 하거라."

"예."

군터는 토어릭을 데리고 프롱기우스 후작을 만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토어릭은 군터의 앞에서 했던 말을 반복했다.

"흐음. 역시 그렇게 쉽게 따라와주지는 않는군."

"놈이 이리 반응할 것을 예상하셨습니까?"

"대충은. 아무리 불만이 쌓여 있다 해도 대뜸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부담을 지려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

"허면, 처음부터 실패할 거라고 예상하셨으면서도 제게 사람을 보내라 하신 겁니까?"

군터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러자 프롱기우스 후작이 눈을 좁혔다.

"잡을 수 있는 것이 풀밖에 없다면, 그거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나? 전쟁은 장난이 아니네 군터 장군. 그리고 완전히 끌어들이지 못했다 해서 실패는 아니네. 어쨌거나 호타가르아는 우리 쪽에도 한 발을 담갔고, 그와 뜻을 함께 하는 자들도 그리 되겠지.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큰 이득이야. 적어도 그들은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을 테니."

군터는 울컥 치밀었던 분기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그래. 이제 쓸 수 있는 수는 다 썼네. 어느 정도의 소득도 있었고, 행운까지 따랐어."

"행운? 무슨 행운 말입니까?"

"자네가 오기 직전에 보고를 받았네. 북부 다섯 개 영지에서 일어난 병사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하더군. 아마 하루나 이틀 정도면 적들도 눈치 채겠지. 그리 되면 놈들의 전력이 한 번 더 분산 될 터. 호타가르아와 그의 무리가 그쪽으로 빠지지 않고 이곳에 남아준다면, 그때가 우리가 노릴 수 있는 마지막 호기겠지."

프롱기우스 후작이 흐릿하게 웃었다.

"칼을 갈아두게 장군. 이제 곧 일전을 치러야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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